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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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를 마치고
나는 내 삶 전체를 지배하는 쓰레기같은 패턴에서 아무리 몸부림치어도 결코 벗어날수 없음을 느꼈다
수능은 빙산의 일각일 뿐, 나의 삶은 수능이아닌 어떠한 생활속에서도 비슷한 형태를 유지하며 진동하는 주기함수이고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루듯 나는 하잘것없는 하루하루의 퍼즐을 모아 내 인생이란 거대한 쓰레기를 완성해가는 노역을 강제당하는 운명의 마리오네트가 아닐까
이런 생각속에서 일찍 시들어가는 가난한 청춘의 빈자리로 표표한 현실이 스미어든다
나는 아직 피지못한 꽃봉오리인가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그맣게 피고는 이젠 져물어버린 보잘것없는 꽃이었나
더이상 나의 열정에대한 확신조차 서지않는 쓸쓸한 가을밤 나는 이 춥고 작은 방안에서 하는수없이 죽어간다
더는 회피할수도 없을만큼 빠르고 무겁게 굴러온 현실이 둔탁한 바위가되어 내어깨를 짓누르려한다
내 운명은 나에게 이러한 위치와 이만큼의 분수만을 허락하는것이다
나는 채찍에 길들여진 노예처럼 천명을 받들어 정해진 가시밭길을 따라 걷는수밖엔...
없나?
아니다
없나?
정말이지 이젠 순응하는길밖엔 없다. 운명을 거스른 죄로 내 청춘엔 삼수라는 채찍이 내리꽃혔다
이렇게 뒤쳐지고 버려진채로
실패한 삼수생인 나는 평생에걸쳐 헤어나오지 못할 눈물의 늪에 너무나도 깊이 빠졌다
그믐달의 붉은빛이 피눈물처럼 내 검은자위에 스미면
나는 청춘의 고락을 함께한 재수생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못난 삼수생을 이해하려들지않고 다만 위로해주었던 친구와
군대에서 누구보다 쓸쓸한 밤을 맞이하고있을 또 다른 친구를 떠올리고
그들도 나도 같은 그믐달을 바라보곤 슬퍼하고 눈물흘리며 그 아래서 또다시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초라한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으며 잠을 청한다..
행복합니까? 예 행복합니다 정말이지 미칠듯 행복합니다
오늘은 논술 시험날.. 원치도않던 왕십리로 향하며 나는 이렇게 마약같은 위안을 되뇌곤한다.
이제는 일상의 모든 반복이 너무나 익숙하기에 나는 행복을 끝없이 외치며 또 붕괴직전인 정신을 하루 더 지탱하는것이다
실은 모든것이 건조하여 싫증난지가 오래다. 다가올 패배 혹은 성공을 실감할 능력은 상실한지 오래이다. 다만 상상한다. 그 상상을 일종의 마취약 삼아 나는 이렇게 하루씩 딱 그만큼만 살아나갈뿐..
그러나 시선만큼은 항상 하루앞을 기약한다. 참 못났다. 이러한 생활에 묶인 나는 그저 숙명이 깔아놓은 길위를 구보하는 수형인이아닐까?
어쨌든 또 하루는 시작되었다. 잠자리를 나서 익숙한 동네를 거쳐 왕십리를 걸으면서도 내 두눈은 언제나 관악을 향하고 또 내일을 향한다.
한양대 앞을 활기차게 걸어가는 수많은 수험생들.. 그들의 행복의 찬 얼굴을 스쳐보며 나도 그 물결속으로..
삼수에서 패배한후 하루하루를 나는 도박과 게임과 알코올이 가져다주는 아드레날린으로 연명하였으나
이제는 이러한 아드레날린의 분비마저 싱거워졌다
한망대를 향하는 개떼같은 인파속에섞여 나는 그저 힘없이 걷고 있었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그런데! 나의 발걸음은 어느새 한양대아닌곳으로 향하고있는것이다
한번도 가본적없는 마음의 고향! 나는 그곳에 닿기를 갈망하며 3년이란 세월을 쌓아온 허무한 모래성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큰 도로가 보인다. 모든것이 눈부시기만 하였던 십대 시절, 이곳을 넘어 도서관을 향할때마다 한조각씩 새겨넣었던 그곳의 퍼즐
산산조각내어진 그 퍼즐조각들이 희미해진 정신의 곳곳을 다시금 자극하고 있었다
나는 그 도로와 나란히 걸어 어느새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는 오전의 적막을 채우려 담배한개피를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나의 잃어버린 열정처럼 모두 산개되고 난 후 드디어 어디로 향하는지모를 버스한대가 도착한다.
나는 무작정 그 버스에 몸을 싣고는 멀어져가는 이곳 왕십리를 속절없이 바라보았다. 더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그렇게나 도망치고싶었던 그 건조한 'n수'라는 컨베이어벨트위로 다시 돌아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아무도 알아주지않는 외길위에 남겨온 3수라는 발자취가 새삼 허무해졌다.
버스는 어느새 수십 정거장을 거쳐 지하철역에 다다랐으나 나의 몸은 내릴줄을 몰랐다
그냥 이대로 어딘가 먼곳으로 유폐되고싶은 충동에 동전 한닢없이 버스에 오르지 않았나
이윽고 버스가 다시 출발한다.
급한 가속에 저릿해오는 심장이 왜 이대로 정지해버리지않나 참 한탄스러웠다
그저 조용히 머릿속 백지위에 실패한 삶을 변명하는 유서나 한장 써보자 하고 운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이 부셨다.
한낮의 태양빛보다도 눈부신 무언가에 이끌리듯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아아! 서울대학교! 그토록 갈망하던 그곳의 정문이 태양보다도 찬란한 빛줄기들을 발산하며 내 거듭된 실패의 그늘에 감금된 열정을 해방하려 하고 있었다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 팔에는 VERITAS LUX MEA 등에는 Seoul National University!
캠퍼스를 활보하는 아름다운 젊음들.. 저들또한 나와 다름없는 청춘이오 그런데 나와는 상반된 저토록 해맑은 표정은 무엇인가
손가락끝에 닿을듯한 행복은 또 무엇인지.. 아롱진 그 미소의 파편들이 다시금 나를 동요케한다.
그리고 이름모를 서울대생이 버린 베이지색 담뱃갑에 그려진 거대한 고래를 보며 나는 에이해브선장의 숙적 모비딕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말할것이다.. 사수를 해서 서울대를 간들 무엇하냐고.. 네 청춘은 이미 끝났고 너는 뒤쳐질대로 뒤쳐진 낙오자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에이해브선장이 어디 돈이나 향유를 위해서 다시 모비딕을향한 작살을 던졌던가?
모비딕과의 혈투에서 승리한들 그의 잃어버린 다리를 되돌릴수도 없는것이고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릴수도 없는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다리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한번 모비딕, 아니 스스로와의 힘겨운 전쟁의 선봉장이 되어 피쿼드호에 올랐다
그렇다면 나또한 청춘을 다하여 그렇듯 젊음의 열정을 다시한번 쏟아내어보는것도 괜찮지 않은가
나는 다시한번 피쿼드호의 선장이되어 수능을향해 분노의 작살을 던질것이다
그래.. 마지막으로 일년을 더 해보는것이다.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필사의 각오로 쇄도할것이다.
유보된 나의 청춘.. 그것을 보상해줄것은 오직 이 싸움에서의 승리를통한 성장, 그리고 관악뿐이리라.
발산되어야할 젊음이 몇년째 반평짜리 책상위에 켜켜히 쌓이고 또 쌓여만가니 참 괴로울것이고 그럴때마다 나는 되뇌일것이다. 이 괴로움은 성장통이라고, 반드시 이겨내어야 한다고 끝없이 주문을 걸며 마침내 이겨낼것이다
이제 나는 발길을 돌려 교보문고에 들러서 참고서도 사고.. 집으로 가서 인터넷강의도 결제하고... 이렇게 나는 다시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일년을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사수라는 낙인위에 꽃히는 모든 멸시와 비난과 조소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묵묵히 한발을 내딛을 것이다
다시 일년을...나는 시작할것이다... 다시...일년을...나는 시작할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참 이상스럽게도 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이상스럽게도..이상스럽게도 나의 두눈에선 짙은 눈물이 흘러 흘러 메마른 볼을 하염없이 에이고 내 가슴을 저미고 저미고...
그 서글픈 난도질은 도무지 멈출줄을 모르며 쉼없이 흐른다...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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