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鉉PD [314079] · MS 2009 · 쪽지

2018-11-20 17: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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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국어 31번 문제에 대한 교수님들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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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국어 31번 문제에 대하여


수능에 나온 뉴턴의 만유인력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앞으로도 꼭 이런 문제를 내야 한다는 적극적 옹호론부터 매우 부적절했다는 반대 주장까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31번 문제 같은 것은 수능에 출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칫하면 이 주장을 오해하기 쉽다. 물리학자인 내가 왜 수능에 이런 물리 문제가 나오면 안 된다고 할까?


사실 31번 문제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이슈가 섞여 있다. 이를 구분하지 않으면 자칫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1. 31번을 옹호하는 주장은 대체로 한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수능 국어에는 문학이나 인문학 계통의 글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글이 다 나와야 하고, 특히 시대의 흐름에 맞게 과학 지문이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 계통의 31번 문제는 아주 적절했으며 앞으로 이런 문제가 계속 나와야 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그간 수능에 과학 지문이 거의 나온 적이 없거나 나왔더라도 최근 1,2년 사이에 새롭게 등장했어야 한다. 그래야 과학 쪽 지분 확보나 새로운 시대 조류의 첨병으로 31번 문제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능 이전 세대에서 막연히 이런 주장을 하기 쉬운데, 시실은 실상을 잘 모르고 하는 얘기다. 이미 수능 초창기부터 과학 지문이 국어 주요 지문으로 배정되어 있다. 물리 쪽만 봐도 수능 첫 해인 1994년에 이미 양자역학이 등장한다. 또한 전에 내가 14년 만에 오류를 찾아냈다고 했던 2004학년도 지문은 심지어 양자역학의 얽힘에 대한 것이었다. ‘얽힘’은 최근의 교양과학서에는 나름대로 주목 받는 개념이 되었지만 15년 전에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찌 보면 수능 지문이 교양과학보다 앞서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지문이나 문제의 구체적 질이 문제였지 과학 자체가 외면 받은 적은 없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31번 문제와 관련하여 막연히 과학 계열 문제이므로 옹호하는 것은 “계속 과학 쪽 문제를 내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왜?” 정도의 반응이 돌아올 뿐이다. 아무도 수능 국어에서 과학 지문을 내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25년 전 처음부터 계속 그래왔다.



2.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이유로 31번 문제에 주목한다. 수험생이나 관련자들은 물론 이 문제가 터무니없이 어려웠기 때문에 주목한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과학이어서가 첫째 이유가 아니다. 어려워서다. 사전 지식 없이 시험장에서 제한된 시간 안에 그 지문을 읽고 즉석에서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가능한가? 아마 문과 쪽 출제위원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출제자의 설명을 들어가며 평생 처음 보는 참신한 논리를 겨우겨우 이해했을 때, 소위 ‘킬러 문제’로 적격이라고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이 정도는 내야 변별력이 유지된다고 했을 수도 있고, 또 누눈가는 우리는 빨리 못 풀지만 젊은 아이들은 귀신같이 푼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대강대강 설득되어 문제가 나오고 또 대강대강 검토되어 확정되었을 것이다.


문제가 어렵기만 했다면 나 같은 사람까지 특별히 주목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수능에 초인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문제가 한둘인가. 하지만 이 문제는 물리를 공부한, 눈치 빠른 일부에겐 터무니없이 쉬운 문제였다. 만유인력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만 있으면 지문을 전혀 읽지 않아도, 31번에 제시된 ‘보기’를 무시해도, 그냥 5개 선택지 중에서 아무 고민 없이 손쉽게 답을 고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물리 지식이 특별히 많지 않은 내가 아는 어떤 화학 교사는 보기가 잘 이해되지 않아 잠깐 당황했지만 그냥 포기하고 선택지를 보니 답이 바로 보이더라고 했다. 출제위원들은 과연 이런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이 문제의 출제를 강행했을까?



3. 31번은 수능 국어에서 본래 의도했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 한다. 만유인력을 알고 눈치 빠른 일부에겐 아주 쉬운 물리문제였을 뿐 과학지문 해석 능력을 전혀 측정하지 못한다. 만유인력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알지만 처음부터 읽어 내려간 우직한 수험생들에겐 좌절을 안겨줬을 뿐이다. (아니면 일부 특목고 학생에겐 뻔한 교과서 논리였거나.) 과학지문 해석 능력보다는 짧은 시간 안에 감에 의존하는 숙달된 답 찾기 기술을 선보여야 했다. 마치 제한시간 안에 판을 깨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는 컴퓨터 게임처럼.


만유인력을 모르는 문과 쪽 출제위원에겐 평생 처음 보는 새로운 논리, 새로운 지문으로 학생들의 독해력을 측정할 더 없이 좋은 문제였을 것이다. 지문을 읽지 않고 선택지만 봐도 곧바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초보적 물리문제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 한 채. 이 문제를 처음 제안한 출제위원은 둘 중의 하나이다.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거나, 알면서도 좋은 문제라고 다른 출제위원들에게 사기를 쳤거나. 기타 검토위원들은 무슨 역할을 했는지 모르겠고. 언론에겐 그냥 너무 어려운 과학문제라서 아우성이라는 기사거리였을 뿐. 나 같은 과학자들에겐? 그냥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과학 문제가 국어 비문학에 등장하면 그것으로 족한가?





이화여자대학교 물리학과 부교수 김찬주







2019학년도 수능 국어 31번 문제


1. ‘국어’의 읽기는 한국어로 쓰인 문학작품을 독해할 목적으로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로 된 모든 종류의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해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에는 물리만이 아니라 생물학, 의학, 경제학, 법학, 예술, 아니 더 나아가 사용설명서, 이메일, 통지서와 같은 것들이 모두 포함된다.



2. 물리적인 내용을 글로 풀어 쓰면 종종 글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글로 설명하면 물리학자도 이해하기 힘들 거다. 그래서 물리는 수학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이번 31번 문제도 수식을 이용하면 한 치의 의구심 없이 짧고 명징하게 표현할 수 있다. 수학을 알아야하는 이유다.



3. 수능시험에 이런 문제를 내는 것은 안 된다고 한다. 주어진 시간 내에 문제를 다 풀려면 지문의 길이가 어때야하고, 표현의 복잡성이 어때야하고 등등.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에서는 줄타기로 관료를 뽑는다. 이들은 끊임없이 논쟁했을 거다. 줄이 너무 굵어서 문제라느니, 줄의 늘어나는 정도가 몸무게에 따라 다르니 줄의 종류를 바꿔야한다느니 하고 말이다. 하지만 걸리버도 물었듯이 문제의 핵심은 왜 줄타기로 관료를 뽑느냐는 것이다. 



4. 우리는 건국 이래 지금까지 대학입학시험이라는 괴물과 전쟁을 치뤄왔다. 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는 한국인만 이해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제도 하에서 이런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수능이라는 시험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공정성이라고 한다. 60만 명이 한꺼번에 치루는 시험에서 모두에게 공정한 시험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공정성은 제도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의 신뢰로 확보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희대학교 이과대학 물리학과 교수 김상욱









출처는 김찬주 부교수님 / 김상욱 교수님 페이스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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