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일레븐7 [776504] · MS 2017 · 쪽지

2018-11-16 19: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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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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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이는 공부 잘하는 애."

"OO이는 똑똑하지~"

"어머님은 아드님이 공부 잘해서 참 좋으시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들어오던 익숙한 말이다.


맨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 유치원 시절부터 구몬 학습지도 열심히 하고, 

학원, 그룹 과외 등 또래 친구들과 비슷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사교육을 받으며

흔히 말하는 평범하고 소심한 모범생이었던 나는 단 한번도 그것들을 빠지지 않고 착실하게 다녔다. 


나름 나쁘지 않은 내 재능과 착실함 때문이었던건지

교내 대회에서 수상도 많이 하고, 친구들 사이에선 항상 공부 잘하는 애로 지내왔던 12년 학교생활동안 

내 생활기록부엔 " 조용하다. 모범적이다. 성적이 우수하다. 공부 잘하는 애." 라는 문구가 공장에서 찍어낸 듯 쌓여 왔다.


근데 사실 어렸을 때의 나는 입시에 대한 큰 관심이 없었다.

단지 기계처럼 학교와 학원을 다녔고, 숙제를 했고, 시험을 쳤다. 

돌이켜보면 그땐 정말 힘들고 우울했지만, 그냥 참고 했다. 그게 맞는 거니까.

아무 생각이 없었다. 

고등학교땐 그렇게 극상위권도 아니었다. 가끔 교내 수학경시대회 같은 곳에서 상은 받았지만

내신, 모의고사 모두 2점대 중반. 하지만 여전히 OO이는 공부 잘하는 애.


첫번째 수능을 봤다.


고3 수능땐 역대 최악의 점수를 받았다.

수시는 6상향으로 지르고 광탈.

인서울 끝자락도 힘든 상황. 

재수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결국 하게 됐다.


학원도 착실하게 다녔다.

가장 높은 반에 들어가서, 가끔 빌보드에도 오르면서, 

학원 친구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나는 공부 잘하는 애인채로 지냈다.


두번째 수능을 봤다.


그 해의 가장 최악의 점수가 나왔다.

첫번째 수능보다 약간 더 높은 점수가 나왔다.

9월엔 성적표에 1밖에 안 찍혔었는데. 미친듯이 아쉬웠다.

9월 성적때문에 수시 지원도 안했었다.

정시로, 서울에 있는, 이름은 몇번 들어본 대학을 가게 됐다.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괜찮아. 거기 가서 열심히 하면 되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공부 잘하는 애'


어느새 이 말은 내 '정체성'이 돼 버렸다.

'나는 공부 잘하는 앤데. 내가 이 대학을 간다고? 난 무조건 SKY나 의대정도는 가줘야 하는데.'

20년간 쌓여온 내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수능 다음날 아침부터 나는 각종 커뮤니티에서 무휴학반수를 검색해보고 있었다.


동기들이 피시방을 갈때 난 도서관에서 비문학 분석을 했고, 

당구장을 갈땐 난 카페에서 수학 기출을 풀었다.

6평을 보고,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부모님께 수능 공부를 다시 해보고 싶다고 했다.


7월부터 독재를 들어갔다.

미친듯이 했고, 살면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할수 있다.

이 4달동안 한 공부량이, 살면서 재수때까지 한 공부량보다 많은 것 같다. 

친구들, 가족들은 응원했다. OO이는 잘할거야. 성공할거야.

난 생각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난 분명 성공하게 돼있어.


세번째 수능을 봤다.


느낌이 좋았다. 작년 9월과 비슷하게 본 것 같았다.

채점을 했다. 두번째 수능보다 약간 더 높은 점수가 나왔다.

지쳤다. 질렸다. 토가 나올것 같았다.


나는 그냥 이상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남들이 학벌에 스트레스 받을 때, 취업난에 시달릴때, 직장생활에 시달릴 때 

난 좀 더 편하게, 쉽게 살고 싶었고 대접받으며 살고 싶었다.

하늘의 별을 따고 싶었다. 난 그럴 능력이 있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첫단추를 좀 무리를 해서라도 잘 꿰기만 한다면, 제발 그 첫단추만 잘 꿰면, 그때부턴 모든게 승승장구 할 것만 같았다.



그게 잘 계획대로 안되더라.


수능은 내 운명이 아닌 것 같다고 이번에 판단 내렸다. 

운명이 내 편이 아니었던건지, 그저 내 재능과 노력이 부족했던건지는 지금은 모르겠다. 시간이 조금 지나봐야 알 것 같다.


다만 이제 미련은 정말 없다. 어느 대학을 가던 열심히 살거고 만족하면서 살거다. 

내 스스로 '공부 잘하는 애' 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옭아매지 않기로 했다.


여기 계신분들 중에 수능을 다시 준비하시는 분들도, 이번에 입시판을 떠나는 분들도 모두 계시겠지만

다들 힘내시고, 응원합니다. 그리고 전국의 98년생 화이팅.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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