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부를 해야 하나요?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1839212
1
이번에는 거의 6주만에 안드로메다 Q&A 게시판에 답변을 달 수 있었어요.
그 이유는 득남을 했기 때문입니다.
2
의과대학에서 실습을 하며 자연분만을 하는 모습도 여러 번 보고, 제왕절개 수술에도 참여해 보았지만, 내 아내가 어머니가 되고, 내가 아빠로서 옆에서 분만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은 매 1초를 언제라도 다시 상기할 수 있을 만큼 기억에 남는 기적과도 같은 경험이었어요.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도 아마 10년 정도 후에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각보다 출산은 훨씬 더 고통스럽고 긴 과정이고, 출산 이후 수유를 하는 것도 심지어는 출산 그 자체 만큼이나 아프고 힘든 과정이었어요. 이건 의과대학을 졸업한 저도 바로 옆에서 간접 경험을 하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입니다.
3
아이와 산모의 하루 하루를 24시간 내내 곁에서 함께할 수 있게 된 건 정말 축복이에요.
나는 다음 일정이나 상사(경우에 따라 교수 혹은 레지던트)의 긴급 호출, 월급 통장 잔고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문제들에 시달리지 않고 따사로운 5월의 햇볕을 즐기며 한없이 놀라운 기적 같은 내 아이의 표정 하나하나를 필름에 담습니다.
4
나는 서울 의대를 졸업했고 아내는 홍대 미대(회화과=서양화과)를 졸업했어요. 결혼 이후에도 매일 네다섯 시간은 빼놓지 않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눕니다. 가끔은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하기도 해요: "만약 우리가 서울 의대나 홍대 미대에 합격하지 못했더라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누리고 우리가 즐기고 있는 것들을 즐길 수 있었을까?"
대화의 결론은 보통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로 귀결됩니다.
물론 많은 학부모(그리고 특히 재수생, 반수생)들의 바람과는 달리 명문대에 합격한다는 것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희소가치를 부여해 주지는 않아요.
명문대에 합격한 이후에도 많은 고민과 노력, 그리고 절묘한 운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만 명문대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많은 고민과 노력, 그리고 절묘한 운이 있었더라도 얻지 못했을 것 같은 그 무언가를 종종 느끼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공감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이렇게 얘기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죠: "아, 부모님과 선생님이 공부하라고 할 때 공부했던 게 정말 다행이다."
5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더라도 실력과 노력으로 좋은 대학교에 진학한 많은 사람들을 추월해 앞서나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좋은 대학교에 합격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그러지 못했다면 평생동안 아마 천 번 이상은 마주치게 되었을, "실력과 노력으로 많은 사람을 추월하신 분이 왜 하필 좋은 대학에는 합격하지 못하셨습니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나는 다른 의대를 잠깐 다녔기 때문에 이를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불필요한 검증 과정을 생략받으며 삶의 효율을 높이고, 삶의 여러 국면에서 강력한 자신감과 자기 확신을 갖게 함으로써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하는 믿음직한 무기가 됩니다.
6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재수학원에 다닐 때는 마치 학벌이 이 세상의 전부인 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막상 명문대에 합격하고 나면 이렇게 얘기하죠: "좋은 대학 와봐야 별 거 없다. 예쁜 여자친구도 안 생기고, 대학 제대로 못 갔어도 돈 많았던 옆집 친구가 더 잘 나간다."
어떤 명문대학생들은 자신이 명문대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답을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학벌주의는 이 나라의 정말 고질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실력과 노력이지 출신 학교가 아니다."
사실 명문대에 입학하고 학점 스트레스에, 취업 전선의 선배들의 현실적인(우울한) 이야기들에 시달리고 있으면 정말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전의 나는 주변에서 정말 공부를 잘 하는, 미래를 촉망받는 인재였는데, 지금은 그런 인재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캠퍼스를 떠나서 다시 사회로 돌아오면 조금만 발품을 팔 준비가 되어 있고, 타인과의 화학반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아, 정말 학벌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었구나.'
그리고 명문대 출신이라는 학벌이 주는 여러 이득을 본의 아니게 누리면서 이런 여유있는 생각도 가끔은 하게 되지요: "다음 세대에는, 10년 간의 노력으로 90년을 평가 받는, 이런 불공평한 학벌주의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7
나의 할아버지는 교육을 받지 못한 농부였고, 아버지는 까까머리 중학생 때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여 공장에서 일하며 아사(餓死)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혼자 힘으로 대학을 졸업해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덕택에 나는 아주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평균은 되는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집안 사정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고도 명문대학에 가지 못하는 (아버지와 같은) 불상사는 겪지 않았습니다.
내가 '부의 대물림'이나 '학력의 대물림'이 부분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아버지의 사례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선상에서 출발을 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면 가장 밑바닥에서 평균까지 올라오며 자신이 누리지 못하고 축적한 희소가치를 자식의 교육에 투자하고 싶어하였던 아버지의 희생을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요.
나는 16살 때부터 내가 나태하게 살면 그건 내 자식과 내 손자의 삶의 범위를 제약하고 말 것이라는 부담을 안고 내 삶을 계획하고, 공부했습니다.
8
우리 아이가 꼭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명문대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에 만족합니다.
나는 물을 끔찍히 무서워 해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면 매초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만, 우리 아이는 백일이 지나면 유아 수영 교실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수영을 배울 것입니다.
3년 후에는 오늘 밤에 야근을 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지 않고, 아이와 옷을 맞춰 입고서 여름에는 키에 맞춰 자른 골프 클럽을 손에 쥐어주고 잔디를 거닐고, 겨울에는 스노우 보드 타고 뜨끈하게 온천에서 같이 목욕을 할 것이고
네 살이 되면 피아노도 가르쳐야겠지요.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려면 그녀에게 프로포즈 할 때 필요할테니까...
9
내가 얻은 많은 것들은 필요한 시점에 거짓말처럼 나타나준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능했어요.
그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나이대도 아니었고, 나와 비슷한 지역에 살지도 않았고, 나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도 않은 경우도 많았어요. 심지어는 내가 이런 사람이 나타나줬으면 하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모든 운들은 내가 16살 때부터 쏟아 부은 노력들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합격증을 손에 쥐고 나서부터 시작되었죠.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열심히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노력을 바로 지금 할 때,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요.
수능 시험 전날까지 내가 해준 이야기를 잊지 마세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30년 후에 여러분의 아이에게 여러분이 지금 해야만 했던 것을 다그치고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의 거의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그러하고 있듯이.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사실 롤리타는 14
아빠도 없고 엄마와도 사이가 좋지 않은 어린 여자애가 양아빠에게 부모의 사랑을...
득남 축하드려요. 좋은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고3인데. 사실 요즘에 뭔가 뒤숭숭해서 공부가 잘 안됬습니다.
아.. 이 글을 보니까
다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이유이자 목적이 생겼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라끌옹님.
축하드립니다.
득남 축하드려요 ~ 애기가 귀엽네요 ㅋㅋ
득남 축하드려요 - 너무너무 이쁜 아드님이네요 :) 엄마아빠를 쏙 빼닮은 것 같네요!
저는 지방에서 독학재수하고 있는 재수생입니다.
글을 다 읽었는데 눈물이 흐르네요.
제가 중학생 때? 라끌님 수기집을 처음 읽었었는데
이젠 벌써 아이까지 얻으시고 ... 세월이 참 빠르네요.
구구 절절 가슴에 와닿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
득남 축하드립니다
덧붙여서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__)
고2입니다..
글이 참 좋습니다.
자신감과 자기 확신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시기인것 같네요.
앞으로 더 좋은글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광복님.. 참 멋있어.
아이 귀여워라 '-' 축하드려요~ 득남이라고 하시니 사실 충격이네요.
제가 중3 때 라끄리님 수기를 읽었었는데 그러니까 3년 전에 라끄리님이 대1인 줄 착각하고 살았어요.
지금 고3... 라끄리님 수기는 읽을 때마다 죽비로 쓰이고 있어요.
'너는 라끄리님 발끝은 따라갈 수 있느냐?' 라구요..
아아.. 저도 올해에 서울대 경영 합격증을 쥘 수 있으면 여한이 없으련만...
오늘 6월 모의 성적은 제 위치를 아주 똑똑히 깨닫게 해주네요.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게 알고 있는데 성적은 안드로메다라서 슬프네요..
그치만 지금은 아무리 불안하고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라도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계속 달려나가는 게 좋겠죠..
p.s.) 라끄리님 글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라끄리님은 글을 참 잘 쓰시네요..
동감 ㅋㅋㅋ 글 참 잘쓰심..
재수생인데요.
6월모의보고 약간 좌절중이었는데.. 공부는 왜 해야하지 이런생각만들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득남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좋은글 감솨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30년 후에 여러분의 아이에게 여러분이 지금 해야만 했던 것을 다그치고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의 거의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그러하고 있듯이.
...눈물이나네요..좋은글 감사드립니당..
득남 축하드립니다~^^
우왕 축하드립니다
득남축하드려요^^
축하드려요^^ 그리고 충고와 조언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쫑아빠입니다.^^
라끄리님....헉...어느새 득남을 ^^;;;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옛날 서울대 해킹(?)으로 오르비에 작은 소동을 일으켰던 장본인입니다.
작년과 올해는 고3담임이 아니라서 조용하게 학교 생활하고 있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도 많이 흘렀네요....언제 시간되시면 경남 양산에 있는 저희 학교에도
한번 강연을 한번 부탁드리고 싶네요...^^
다시 한번 득남 축하드립니다. 늘 행복하세요.. ^^*
축하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광복님 득남 축하드립니다 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기가 예쁘네요 축하드려요^^
득ㅋ남ㅋ
득남 축하드립니다. 아이가 총기가 있네요.
득남 축하드립니다. ^^
양쪽 부모님을 닮아 예쁘고 똑똑해 보이네요.
정말 쏙~ 빼닮았네요. 너무너무 예뻐요~^^
득남축하드려요. 우와....
와 아들녀석 정말 똘똘하게 생긴듯 ㅋㅋㅋ 왠지 먼 훗날 큰거 한자리 해먹을거같애요 ㅎㅎ
그리고 좋은글 너무 감사해요 끄리님 ^^
득남 축하드립니다.
정말... 최고입니다 ^^ 열심히할께요
정말 마음에 와닿는 글입니다... 포기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시점에서 제게 용기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왜 난 이걸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까...그렇게 알고 실천하려고 노력해도 정작 내가 갖고 있는 사회의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나 자신을 돌보자' 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을 뿐...왜 난 좀 더 현실적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왜 25살막바지가 되는 해가 되어서... 그간 홀로 지내며 위안으로 삼았던 한밤새벽기타연주를 멈추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을까...
(의대 입학자들중 30대이상도 있나요 라고 물어보려고 이곳에 들어온)거추장스러운 내 질문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처절한 글과 희망적인 메시지...
처절함과 희망을 알려주어서 감사합니다.(진심으로)
마지막으로 처절함을 알기에 희망을 낳고 희망을 안고 갈 수 있는 라끄리님의 득.남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진정한 개념글인 듯 ㅎㅎ 한 수 배우고 갑니다 ^^
글 진짜 잘쓰시네요. 가르침 감사합니다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으아 공부가 최선이구나...
감사합니다. 정말 이 말밖에 드리지 못하겠네요...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도움에 되는 글입니다. 존경합니다.
09년에도 재수생이 있었구나
지금쯤은 뭐하고 계실까
저도 지금 읽으면서 그 생각했네요
와드 박아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