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463916] · MS 2013 · 쪽지

2018-07-10 06:16:44
조회수 8,883

시인도 틀리는 수능 문학 문제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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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 영역의 하위 평가 항목인 문학을 이야기하면 흔히 나오는 말들 중에 하나가

'수능 문학 문제는 그 시를 쓴 시인이 풀어도 문제를 다 틀린다'는 것입니다.


 이 부문에서 제일 유명한 썰(사실 제가 아는 유일한 썰이기도 합니다만)은 최승호 시인의 '아마존 수족관' 문제일텐데 이게 2004년 10월 고3 모의고사 출전입니다. (다) 시에 본인의 시가 나왔고, 그 시에 엮인 문제가 24, 26, 28번인데 최승호 시인은 다 틀렸습니다.


 

 일단 이 썰에 제 생각을 풀기 전에 이런 유형의 문제가 극도로 치닫으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 해 4월 고3 모의고사에는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라는 시가 출전됐는데, 제 생각에 황동규 시인이 이 문제를 풀고 인터뷰를 했다면 최승호 시인이 아마존 수족관을 풀었던 것보다 더 큰 이슈가 됐을 것 같습니다.


 


 '바퀴'의 원관념은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굴러간다'는 속성이 있는데, 알아서 잘 굴러갈 수 있는 '바퀴'를 왜 시적 관념으로서의 '바퀴'로 치환했는지 파악하는 것까지는 잘 간 거 같습니다. 다만 와 는 서로 '바퀴'가 결국 무엇을 함의하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네요.



 어차피 10몇 년전 구닥다리 문제라 문제를 풀고 가실 것 같지는 않아서 위 문제의 정답을 먼저 밝힙니다. 이 문제의 정답은 5번입니다.

사실 저는 이 시를 처음 보고 화자가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소외되고 힘든 처지에 있을 사람들이 바퀴로 형상화된 게 아닐까 생각을 하고 글을 봤는데, 5개 선지 중에 5번 혼자서 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보고 hoxy... 하는 마음에 정답표를 보니까 아니나다를까 정답이 딱 저거네요ㅋㅋ 뭐 아무튼..



 사실 이 문제는 정답을 내는 데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딱 에 안 맞는 이야기하는 선지를 고르면 되니까요. 어찌 보면 요즘 문학에 를 참고하여 윗글을 감상한 것으로 어쩌고저쩌고 하는 문제의 초기 버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문제를 최승호 시인의 사건에 덧붙여 첨부한 이유는, 이 시기에 문학 문제들 중에는 '출제자가 문제를 낼 때 아예 출제자의 입맛에 맞는 감상을 제시하고, 거기에 틀을 끼워맞추는 식'의 문제가 정말 많았다는 걸 보여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왜 '바퀴'는 '진실성의 전진'과 '시대적인 문제 의식'의 측면에서만 해석할 수 있는 건가요? 바퀴를 굴리는 과정에서 '보인다, 안 보인다'의 긴장이 조성되는 부분을 보고 '굴러가는 바퀴'를 '굴리고 싶어하는 화자'의 답답한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고 보면 안될까요? 아니면 정수형 효진누나 태진이형이 말했듯이, 화자가 굴리고 싶어하지만 맘처럼 잘 안되는 바퀴를 '관계'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는 없는 건가요?

이 문제에 대한 해설에서 '바퀴'에 대한 다른 해설들은 모두 단순히 '비약' 정도로만 처리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문제와도 극명하게 차이나는 부분이 바로 이겁니다. 지금의 문제는 학생들이 문제를 풀 때 '이 글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면, 어떻게 이 생각에 꼬리를 달아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만 저 때 문제를 맞추려면 '출제자인 나님께서 작품을 봤는데 딱 주제가 이거더라. 그러니까 너는 이 맥락에 안 맞는, 다른 사문난적스러운 거를 찾아봐라'를 생각해야 됩니다. 전자는 출제자가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구성하지만 후자는 출제자가 작품을 창조한 사람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구성하는 식이죠. '내가 이렇게 생각해서 쓴거니 이렇게만 받아들여줘' 같이..



 이제 위 문제와 정말 대조되는 문제로 15수능 B형 45번을 뽑아보고 싶습니다. 당시 최두석 시인의 '낡은 집'은 EBS 문제집부터 시작해서 개인 수능 강사 블로그까지 모든 사람들이 '고향집의 모습과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을 그린 시라고만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수능에서는 이 문제의 는 모든 강사들 교사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따라갔던 그 해설과는 상당히 다른 맥락에서 서술된 내용도 같이 있었죠.



당시 이 문제에 3번 4번에 선택지가 많이 쏠렸는데, 지문이 화자가 고향에서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는 부분과 고향의 쓸쓸한 분위기와 가난한 집안 형편에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이 같이 있음으로 이해한 것이었다는 걸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서 오답을 찍고 나가리된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하고 찍어서 저렇게 됐을지도 모르지만 흠흠)

어쨌든 이 문제는 결국 작품을 어떻게 감상하느냐에 따라서 그 감상에 붙여주는 꼬리의 내용도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수용자의 입장에서 쓰인 지문이었죠.






 이 맥락에서 보면 최승호 시인이 왜 자기 시에 붙은 문제를 틀릴 수밖에 없었는지 그 대답이 나옵니다. 그 문제들이 정말 철저하게 '출제자들이 만든 작품의, 출제자들의 단일한 작품 주제 의식'을 강조하는 식의 문제였거든요. 단순히 최승호 시인이 쓴 시에 문제를 다 틀렸기 때문에 문제라기 보다는, 작품의 감상을 지나치게 일률적으로만 흘러가게끔 문제를 구성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최근 문학 문제들처럼 나왔다면 최승호 시인도 본인이 쓴 시에 딸린 문제를 다 틀려먹는 치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 물질주의에 빠진 현대인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죠. 하지만 시인이 단순히 길을 다니다가 열대어들이 수족관에 있는 걸 봤는데, 자기 고향에 있지도 못하고 먼 타지에 좁은 수족관에 갇혀서 뽀글뽀글거리는 게 불쌍해서 시를 선물했다.. 뭐 이런 식의 해석도 안되는 건 아니거든요. 당시 시인이 본인의 시에 부정적 현실의 인식이 드러나 있다는 말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하는 걸 보면 더더욱.



 그렇다고 해서 지금 수능 문학 문제들이 '시인이 자기 시 문제도 못 맞추는데 무슨 소용이냐'는 논리로 무조건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기에도 무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결국 수능은 최승호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5지선다형으로 구성되는 '이성과 논리의 영역'이기에 문학 작품의 완전한 감상과 완전히 교점이 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으니까요. 5, 60만명의 감상문을 일일이 채점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도 고려하면 감상과 평가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을 수밖에요. 다만 문학 교육에서 강조하는 부분을 수능에 어떻게든 반영시키기 위해서 교육 당사자들이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실제로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부분이 조금씩 드러나고는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피평가자인 우리는 사실 저놈들이 까라면 까는 수밖에 없기도 하고..ㅎㅎ;


 

 최근에 국어 문학 이슈가 좀 있길래 저도 하나 글 써봅니다. 이제 자러갑니다 바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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