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384234] · 쪽지

2011-09-19 12: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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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국군 복장으로 잠입하여 4시간 안에 서울 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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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가을 10월 23일 우리는 (정지용,이창근,김대중,박상문,김천환,김종우)김포하성면 후평리의 시추를 끝내고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문제는 우리만 느끼는 땅굴이지 남들에게 증명되는 땅굴은 없었다. 
다시 말하면, 외부인에게 증명되어 제 3자가 보아도 남침땅굴임을 확연하게 나타내 줄수 없었던 것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시암리를 관통하여 후평리 수참리 고촌면 향산리 누산리로 향하는 땅굴의 소리를 들었고 분명 기계로 작업한다는 것을 청음을 통하여 알아 냈다. 

김포반도에서의 시추와 청음은 고촌면 향산리에서 끝을 냈다. 
고촌면 향산리는 시추후 청음을 하고 있는데 삼겹살을 구워먹고 술한잔하고 텐트에서 자고 있는데, 외부의 확성기에서 깨끗한 갱차음을 청취하는데 성공했다. 

갱차음은 우리를 흥분시켰고, 갱차는 멀리 지나 갔고 그 이튿날새벽에서나 다시 돌아 오는 갱차음이 청음됐다. 

우리는 이미 김포반도를 지나쳤다고 판단하기 충분했고 이를 96미터 시추후 청음이 되었기에 그누구도 절개를 할수가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우리는 낮은 곳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고 군과의 논리투쟁만 전개가 될 뿐이 였다. 

점점 우리들의 결속에 한계가 있었으며, 조직을 이어갈 자금과 다우징 탐사자들의 서로 자신의 기술력을 인정하는 헤게모니 싸움으로 분열됐다. 

군과는 "장거리땅굴은 없다,있다는 논리로 다툼이 있었고, 기술자들은 이곳에 땅굴이 있다 없다며 서로 다툼"으로 우리의 리더 였던 지용이형은 그누구편도 들어 줄수가 없었던 것이고 두리뭉실하게 불안정한 상태로 유지아닌 유지를 하게 된 것이였으며, 군탐지과 요원인 심서기관은 갱차음을 청취했다는 김대중씨와 김종우씨를  서로 교모하게 다투게하는 교란을 시켰다. 

예를 들면, 김대중씨가 김종우씨보다 탐사를 잘하는것 같다 나중에 우리와 같이 탐사를 해보자는등, 스카웃 제의 같은 것이였다 당시의 담지과장은 김영대 대령이였으며 이미 동기들은 군단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 나는 지용이형과 같이 남침땅굴을 하지 않겠다고 난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 전적인 이유는 벌써 증명도 되지않는 땅굴 찾기에 미래를 보며 논공행상성 행위들과 각서 그리고 군탐지과가 "후평리 시추"를 해주겠으니 아무런 증명이 되지 않으면 다시는 남침땅굴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한것이다. 

땅굴신고에 각서 다시는 땅굴 신고를 하지 말라는 개인적 공권을 포기하고 국민의 신고의무, 신고 받은 국가의 청원의무를 각서로 하다니... . 

그리고 국가 기관이 각서를 쓰라고 그래야 신고 받은 곳을 시추해 확인 하겠다니... . 

내머리로는 상식선에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난 거절과 동시에 나혼자 찾겠다고 박상문씨와 김천환씨를 모시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연천군 전동리와 백학 그리고 화이트교 북방삼거리에서 시추를 하고 청음을 했다. 

귀순자 김남준씨와 이영우씨는 김포반도에 이미 일제시대때 넘어온 아연탄광이 있었으며 북의 화곡광산동에서 시작된 땅굴이 1976년도에 모두 광부를 철수 시키고 노동당 연락부 대남공작팀이 접수했고 굴착을 시작했다고 증언해주었다. 

그 방향은 대전 계룡대까지 직선으로 TBM자동굴착기로 판다는 제보를 했다. 

"현재 남굴사에서 땅굴안에 수맥처리 방법이나 궤도차 케이블 차량이 다니는 비디오는 1995년 본인이 일본 조총련 월북담당 김모부장에게 직접 받은 것이다. 
그 안에 내용을 보면 하루에 5000미터를 굴진하자는 포스터가 보인다. 

어디까지 팠을까? 

1999년 여름에 윤태원씨의 소개로 최승대씨를 알게 되었다. 
그 분은 화성땅굴 근처인 "지화리"에서 7개의 시추를 30미터 간격으로 물을 찾기위해 뚫었는데 시추후 4개공구에서 찬바람이 올라와 깜짝 놀랐다고 했고 나는 그 분과 즉시 연천현장을 뒤로 하고 지화리로 가서 현장을 확인 했다. 

그리고 조용히 윤태원씨와 이종창신부님을 모시고 탐사를 했다. 
탐시결과는 놀랍게도 4미터가 넘었고 두개가 나란하게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난 지용이형에게 연락하고 나와 관계가 소원했던 최민용씨를 모시고 현장을 가보시라고 설득했다. 

이틀후, 지용형은 우리가 고대했던 장거리 땅굴을 찾았다. 드디어 장거리 땅굴을 찾아냈고 최적의 위치도 발견했다고 좋아 했다. 

그리고, 연천현장을 놔두고 다시 준비하여 화성 지화리 땅굴을 찾자고 했다. 
난 거절했다 내가 빠질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신용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고 다시 현장을 버리고 어떤상황이든지 끝내지 않고 다른 곳을 간다는 것은 있을 수없는 것이었다. 

화성땅굴은 연천강상절개현장땅굴과 공통점이 있다. 
연천땅굴에 나온 하얀성분은 산화 실리콘이였으며, 하얀성분이 다량으로 나왔고 고무장갑을 흐물흐물하게 만드는 성분이 있었다. 

암반을 이격하여 서로 쌓아 놓고 있었고 계단식으로 막아 버렸다. 
발파를 하면 발파효과가 둔해진다. 
다시 말해 흡수를 해버린다. 

연천은 아주열악한 은박지와 딱딱한 오래된 갈대줄기, 포대를 푸는 실뭉치가 암반과 암반사이에 끼여 나왔다. 

화성은 호미와 밧데리등이 나왔다는 것이다. 

1998년 일본에서 입수한 첩보를 나는 일본과장을 지내신 김철희님께 제보해드렸다. 

인민군은 장거리 땅굴로 이미 서울근교 및 계룡산까지 (군 수뇌부들이 모여 있는) 팠으며, 새벽에 국방군 복장으로 서울 지하철을 탈취 모든 관공서와 방송국을 장악 군사 쿠테타 처럼 작전을 완료 할것이며, 4시간 안에 서울시청에 인공기가 펄럭일 것이다. 

만일 장거리 땅굴이 발각시 땅굴을 남에서 북침을 할려고 팠다고 보고 서해오도를 반환하라는 해전을 일으키고 동해에는 잠수정으로 서해와 동해를 교란하며 내륙에서 땅굴을 통하여 미군을 장악할것이라고 한마디로 국지전적  도발을 강행 한다고.... 

이 제보는 군 탐지과에1997년 문서로 국방부민원실에 했고, 천용택장관 사저에서도 직접 제보를 하였다. 

연천땅굴이 막바지에 이르렀을때 1999년 6월5일 오후 4시 24개공을 땅굴과 관통후 그 연결선에 화약을 넣고 화약 애뮬라이트 65킬로를 넣고 발파 했다. 

포크레인으로 들어가 팔려고 하니 화약 냄새에 이튿날 들어 가기로 했는데 
6월6일 서해에 인민군 배들이 도열 했고, 군사정전위에 아군에 연락도 없이 인민군 장령들이 도착에 의자에 착석했다. 


아군은 이유를 모르고 왜? 참석했는지 파악도 못했다. 
이미 1,2,3,4,땅굴 발견시 군사정전위에 인민군 장령들이 참석하여 서로 대치했던 기억들도 신문자료들도 있는데도.... 

1주일을 대치하는 동안 6월15일 제1차 연평해전이 일어 났으며, 꽃게 잡이 보호라는 엉뚱한 신문보도가 났다.... 

우리가 직접 돈을 모아 땅굴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판단 하기전에 우리는 많은 노력을 했다. 

김상철변호사님이 밝고 힘찬 나라운동의 집행위원장을 하실때, 우리는 3번을 찾아 가서 남침땅굴의 심각성을 지용이형과 나는 순서대로 강의 아닌 강의를 할때였다. 

김상철 변호사님은 미국서 만난 인민군 장성과 대화도중 놀랐다고헀다. 
마시고 있는 커피잔을 떨어트릴정도로 "이미 땅굴이 수백개가 지선으로 굴진해 있다고....
 

또한,당시 집행위원이신 이종군위원은 "신중철은 이중간첩이다" 내가 직접 귀순자 심문관을 했다. 

그 자는 수상하다. 귀순자의 용태를 보면 죽기를 각오하고 상처 투성이에 팬티 차림으로 거의 목숨을 걸고 간신히 넘어 왔는데, 신중철은 정복을 입고 왔다 전투복도 아닌 정복에 권총도 안차고 왔다. 

그렇게 정복을 입고 당당히 걸어서 휴전선을 넘어와 4땅굴의 첩보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모두가 있는 앞에서 말씀하셨다. 

4땅굴의 효용성에 대해서도 산중턱 낭떨어지에 아무런 교두보 확보가 어렵고 서로 은폐엄폐가 되는 난항지역이므로 서로가 득이 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북의 교란으로 판단 했다 모든 군의 시추작업을 교란시키고 장거리 땅굴을 못찾겠금, 4땅굴에 군 탐지과가 총력을 하겠금 말이다. 

상대적으로 연천 화성등 장거리 땅굴은 주도 면밀하게 굴착을 하면서... . 

화성에는 미제의 사건이 있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이다.
 

지용이형은 일제시대때 일본 놈들이 범인을 포박하는 사진을 보여주고, 월남에서 배트콩들이 미군을 포박한 사진들이 였다. 

난 기겁을 했다. 이른바  "교자 포박" 
팔과 다리를 묶는 모습 팬티를 입에 쑤셔넣고 항거를 포기한채 질식시키는... . 

화성 연쇄살인 피해자들의 포박상태와 너무도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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