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phaeus [770010] · MS 2017 · 쪽지

2018-02-09 16:46:00
조회수 1,404

(초장문주의)사유가 n수생에게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16033084

오랜만에 진지한 글을 한번 남겨봅니다.

친구들, 후배들의 합격 소식이 들려오고 여러모로 복잡한 시기일겁니다.

지원한 대학에 모두 떨어져서 강제로 입시에 재입수하는 분들, 또는 대학은 붙었지만 성에 차지 않아서 다시 입시에 도전하는 분들 모두에게 응원의 메세지를 주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말 이전에 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매우매우 길어질 가능성 높음. 요약따윈 없는 똥글이니 귀찮으신분들은 그냥 뒤로가기 ㄱㄱ)


저는 비평준화 지역에서 명문고교로 불리는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부모님은 수시로 대학을 가는게 좋을 것이라며 타 지역으로 이사하기를 권하셨지만 제 판단미스로 점점 선발인원이 줄어가는 정시에 투신하기로 하고 모교에 입학했었죠. 지금 생각하면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지만 그때의 저는 16년을 살았던 지역을 떠나야한다는게 모든걸 잃는 것만 같았습니다.


우수한 무리에 섞여 3년간 치열하게 살았지만 수능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기숙학원에 들어가 재수를 시작했습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매일 머리가 한움큼씩 빠지는 일상을 살았습니다. 한달정도 지나고 나니 적응이 끝났는지 공부도 페이스를 찾고 성적도 반에서 상위권을 차지할만큼 회복이 되더군요. 6월 평가원을 치고 과감하게 학원을 그만두고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작은 고시원에 들어가서 매일 6시 반에 일어나 준비하고 7시에 오픈하는 독서실에 가장 먼저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죠. 치열하게 살았지만 수능은 현역보다도 못한 결과였습니다.


오기로 삼수를 시작했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모두 명문대를 다니는데 나는 재수까지 실패하고 또 수능을 치고있다니. 삼수 초기에는 정신병처럼 저를 증오하며 보냈습니다. 다행인 것은 제가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그 덕에 힘겨운 시간들을 이겨내고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는 제 인생의 황금기는 삼수시절이라고 말할정도로요. 성적의 안정화와 제 스스로의 목표를 찾았기에 삼수 중반부터는 정말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아직도 수능 전날 너무 떨려서 부모님의 손을 잡고 울면서 기도했던게 생각나기도 합니다만 그 과정은 저를 성숙하게 했던 거름이었습니다. 


수능결과가 시원찮아 원하던 대학은 가지 못하고 차선책으로 현역 때 가고싶던 대학에 가게 되어 밤마다 울던 과거의 제가 아직도 또렷합니다. 우울한 감정으로 입학했던 탓일까요.학교에 입학한 후에 꿈에 그려왔던 이상적 학교와는 괴리감이 심해 정말 많이 방황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캠퍼스 라이프는 이게 아닌데... 


친구들은 속속 전역을 하는 시기. 군대에 가야되는 대한민국 남자의 상황, 비루한 대학생활은 저를 공황장애로 밀어 넣었습니다. 하루는 기숙사에 앉아서 중간고사 준비를 하는데 숨이 안쉬어지는 증상도 나타났어요.


도저히 이 학교를 졸업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반수를 결심했지만 제 멘탈로는 수험생활을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그냥 1년을 꽉 채우고 말았습니다. 일단 군대를 가자고 생각하고 학기말에 공군을 지원했는데 1차 광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육군을 지원하자니 친구들에게 들었던 군대라이프가 생각나서 카투사에 지원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서울로 상경해 수능을 준비했습니다. 


어차피 군대 가기 전 휴학상태라고 정신승리를 시전하며 또 수험생의 삶을 살게 된 것이죠. 정말 친한 친구 서너명을 제외하고는 내가 뭘하고 사는지 말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23살도 정말 많은 나이라고 생각했고 그 나이에 수능을 준비한다는게 너무 쪽팔렸거든요. 결과가 좋으면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보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수험생활을 견뎌냈지만 결과는 제가 다니던 대학라인에서 딱히 차이가 없었습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수능 며칠전 카투사에 합격했던 것 말고는 허무한 1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도피성 입대를 하고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에는 해외명문대부터 국내명문대까지 학벌을 갖춘 이들이 드글드글했고, 심지어 부모님의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갖춘 선후임들까지 세상엔 잘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이때 자신의 결핍을 새삼 느꼈습니다. 군생활을 잘해서 간부들과 선후임에게 인정받았고 전역식날 같이 울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던 감사한 시간이었음에도 제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열등감은 여전한 듯 합니다. (복학이라니 시벌!!!!)


전역한지 1년이 됐지만 저 스스로도 답을 찾지 못했고, 아직도 그 어딘가에 서있습니다. 열등감이란게 내가 결핍을 앓고 있는 대상을 주변인들이 가지고 있을 때 느끼는 공허한 감정이죠. N수를 결심한 여러분도 지금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은 이겁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결핍(그 대상이 학벌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이 당신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마세요. 열등감이 여러분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되도록 노력해주세요. 

국내 최고의 입시사이트에서 입시에서 실패한 아저씨 주제에 같잖은 충고를 하는게 못마땅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걸 알고 있고 욕을 먹을게 두렵습니다. 하지만 제가 실패한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어두움에 잠식되길 바라지 않는 선배의 마음입니다.


주변의 누군가가 손가락질 할 것을 지레 겁먹고 피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은 당신이 변변찮아 보이고 내가 갖지 못한 모든 것들로 인해 결핍을 앓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는게 어떨까요? 제가 우울감에 젖어들어 있을 때 절 일으켜 세운건 주변의 좋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9개월쯤 남았네요. 조금은 지루한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레이스를 하는 여러분에게는 얼마나 힘든 시간이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진심으로 여러분이 가시는 길 끝에 꽃길이 펼쳐지기를 응원합니다. 9개월의 시간이 여러분의 결핍을 해소하는 발판이 되기를 바라고, 아름다운 과정으로 기억되길... 사유 드림.





0 XDK (+3,100)

  1. 3,000

  2. 100

  • 소혜 · 685406 · 18/02/09 16:58 · MS 2016

    아조시 종나 멋이쏘

  • Alphaeus · 770010 · 18/02/09 17:45 · MS 2017

    저같은 놈도 아직 살아가고 있다는걸 말해주려고..낄낄

  • 동사서독 · 383625 · 18/02/09 17:00 · MS 2011

    이런 진지한 글을 다 올려주시고... 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 Alphaeus · 770010 · 18/02/09 17:46 · MS 2017

    창피합니다

  • 연물리씹갓채리 · 643219 · 18/02/09 18:45 · MS 2017

    너무멋진글이네요 저도 이번 재수를 현역때랑똑같은점수를 받아서 너무우울했어요ㅠㅠㅠ그래도 이겨내보려고요 화이팅!!!!!

  • Alphaeus · 770010 · 18/02/09 19:06 · MS 2017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군요..상처가 잘 아물기를 바라요. 힘!

  • 백두령 하나반 · 720698 · 18/02/09 19:43 · MS 2016

    여러분이 느끼는 결핍(그 대상이 학벌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이 당신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마세요. 열등감이 여러분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되도록 노력해주세요.
    이 구절, 제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게 될 것 같습니다. 요즘 제가 생각하는 바와 일치하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Alphaeus · 770010 · 18/02/09 20:02 · MS 2017

    자기혐오자였던 제가 지금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제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결핍을 채우기 위한 저의 발버둥이기도 했죠. 열심히 살다보면 꼭 수능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성취될 무엇인가가 생기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