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의도 무스비 [645056] · MS 2016 (수정됨) · 쪽지

2017-12-22 17:10:56
조회수 12,095

(긴글) 너무,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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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 발표하는 모습을 보니 작년 이 날의 모습이 생각나네요.





한 번 작년 이 시기의 기억을 되살려 , 정말 솔직하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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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수능. 나는 그 날 아침까지도 수능을 잘 볼 것이라고 믿었었다. 


6, 9월에서 보여준 좋은 성적이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그날 6시, 한 사람의 성적이 바뀌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에와서 채점한 결과 21114? 그렇게 나왔던 것 같다.


사실 수능 당일은 괜찮을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성적은 이렇지만 그래도, 서울대 지균도 있고, 카이스트도 있고..

학종이 날 구제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다음날 학교에 갔다. 누구는 잘 봤다더라 누구는 찍어서 1등급 나올것 같다더라 누구는 진짜 망했대..

나도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수능을 못봤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특히, 화2 4등급..



그렇게 표정을 숨기며, 잘본 것도 아니고 못본 것도 아니다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듣던 중

카이스트에서 문자가 왔다.

1차 합격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마치 최종합격이라도 된 것처럼 좋아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래도 살아날 곳이 있구나


그렇게 며칠 지나며, 카이스트 면접도 보고 오고, 서울대 면접도 보고왔다.


그 약간의 시간동안


수능을 망쳤다는 사실에, 마치 내가 살아온 모든 게 부정당하는 느낌에 괴로워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대학만 잘가면 그만 아니야? 하는..  도둑놈심보로 합리화 하기도 했다.


중간에 부장선생님이 한 번, 혹시 서울대 지균 최저를 못 맞추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설마? 하면서 무시했다.


사실 상상하기 싫었다. 아니, 상상할 수 없었다.


서울대 떨어지고, 만약 정시로 가면 대체 어디를 가야되는거지? 이 성적으로?


처음 받아본 성적이니 어디를 가야할 지도 몰랐다. 수능 보기 전, 연고대 반영비도 몰랐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성적 발표 전날. 무심코 들어온 오르비 공지글에



FAIT : 국어 1컷 92, 2컷 86


???????


학교갔다가 친구와 같이 집을 오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친구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계속 핸드폰만 볼 수 밖에 없었다. 말이 안된다. 그럴 리가 없다. 아냐. 아직 성적표도 안 나왔는데 어떻게 알아.


이런 저런 시나리오를 수없이 생각하고 글을 썼다.

표준 점수 증발이 있을거다부터 시작해서, 도수분포표 보면서 이 부분은 말이 안될것 같다.. 같은 것까지


모든 시나리오를 생각해봤다. 절대, 절대 2컷 86이면 안된다.


내가 85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3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어떻게 표정을 보셨는지. 느낌이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엄마가 먼저 말을 걸었다.


'OO아.. 우리 최저 맞춘거 맞지? 가채점 실수한 것 없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말을 꺼냈다.


'엄마, 사실은..'


그 날 정말 많이 울었다.


정말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 원하는 학과. 그걸 위해서 3년동안 공부했던 건데.. 

하필, 수없이 많이 봤던 시험 중,

최저를 못 맞춘 단 한 시험이 수능이라고? 그것도 1점?


서울대를 떨어지는 상상은 해봤다. 근데, 최저를 못 맞춰서 떨어지는 상상은 한번도 해본 적 없었다.


결국 나는, 3년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나의 모습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그날 밤 수없이 많은 꿈을 꾸었다. 국어 가채점과 다르게 한 문제 더 맞는 꿈부터, Fait가 잘못되는 꿈까지..

내가 생각한 모든 시나리오가 꿈에서는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다.


다음날, 혹시 모를, 일말의 희망을 갖고 등교했다.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계셨다. 나를 보자마자 밖으로 불러내셨다.


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말도 하지 않으셨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무슨 이야기 하시려는지 알 것 같아요."


또 한 번 긴 침묵이 흘렀다.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해주시길 바랐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 우리 카이스트 기다려 보자.'


교실에 들어가면서 울음이 날 뻔했지만 참았다. 의대 최저도 아니고, 겨우 서울대 최저를 못맞췄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물어봤지만, 거짓말을 했다. 맞췄다고.. 금방 들통날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이제 남은건 카이스트 하나밖에 없었다. 정말, 이거마저 떨어지면 어떡하나 싶었다. 재수가 눈앞에있구나, 생각했다.


발표까지 남은 한 주 정도는 이런말 저런말에 일희일비했다. 수능을 망하고 수시까지 망해서 재수하는 사람 소식 들으며 저게 내 미래인가 싶기도 했고 수능을 망하고 수시는 잘 돼서 대학 잘 간 것을 보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또 가져보고


정말 지옥과 천국을 수도없이 왔다갔다했다. 정신이 한없이 피폐해졌다.


그러던 중 수시 발표 예정일 전 날, 역시 많은 대학이 조기발표했고, 서/연/고 합격자가 쏟아져 나왔다.

다들 잘 갔다. 얼마 전까지, 정말 내 친구들 연고대 많이 가길 바랐다. 이건 진심이었다. 다들 잘됐으면 했다.

수능 전에는, 설사 내가 잘 안 되더라도, 남들은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몇번 다짐도 했었다.


근데 축하해 줄 수 없었다. 어쩌면 조금은 축하해 주기 싫었던 것 같다. 축하하다가, 혹시라도 누군가 물어볼까 겁났다.

카이스트 발표나면, 진심으로 그 때 축하해주자. 생각하고 자려고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잠자는 내내, 꿈에서 난 카이스트에 총 3번 합격하고, 4번의 대학생활을 했으며, 2번은 졸업까지 했다. 정말 간절했었나 보다.


다음날, 10시에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갑자기 화면이 바뀌기 시작한다. 드디어 발표하는구나.


두근


두근


두근












OOO님. ~~~~~~~~에 최종 

합격되었습니다.



다시 눈 씻고 보았다.


끝 글자를 안읽었다.


OOO님, ~~~~~~~~~에 최종 불

합격되었습니다.



떨어졌구나.

떨어졌네.

.


.


.


....


그 날은 하루 종일 울었던 것 같다.


엄마가 그 날 처음으로 들려준, 엄마의 수능(학력고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도 이런 상처가 있었구나, 깨닫기도 했고


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점에 가서 한 숟갈 먹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내년 이맘때 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과연 그 때는 이 꼴이 아닐까?

그렇게 먼 길 돌아서 가면, 정말 내가 원하는 곳 맞긴 할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1년은 너무 먼 길 같았고, 무엇보다 그 길의 끝이 어떨지 몰랐다.




주변에선 그렇게 서울대, 의대만 간다고 뭐라하더니 잘됐네~ 같은 반응도 있었다.

그렇게 주변의 달라진 시선,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좌절감에 빠져 살던 도중, 

갑자기 미친놈처럼 닉네임에 설의를 넣기 시작했다.

그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것 같다. 재수하면, 여기 아니면 안되겠다는 그런 자존심.

설의를 간다는 것 보다, 나를 4등급이라 평가했던 평가원에 대해 복수아닌 복수를 해보고 싶었다.



이 닉네임도, 재수를 시작할 무렵, 감명깊게 본 너의이름은.과 합쳐져서 지었던 닉네임 중 하나이다.

(중간에 다른 닉네임으로 변경하긴 했지만)







그렇게 나는 재수를 시작했고, 그렇게 길 것 같던 1년이 지나, 어느덧 2018년의 수시 발표를 지켜보게 되었다.


올해는 수시를 안 가게 되었다. 또 최저를 못맞췄냐고? 

아니, 올해는 전부 맞췄고, 전부 가지 않게 되었다.



이제 정시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더 이상 미친놈은 아니게 될 것 같다.


(성적표 내림, 전과목에서 하나 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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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지금도,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그저 대학이, 세상이 각자의 진가를 못 알아봐서 안타깝게 정말 가고 싶은 대학, 붙지 못한 분들이 계실거예요.


작년에는 수능을 못봐서, 그것도 너무 못봐서.. 여기서라도 위로받고 싶어서 오래 머물렀는데

잘보든 못보든 계속 점수보고 있고, 가능성 계산해보고.. 은근히 스트레스 받는 일이더라구요.

사실 잘보면 이런 걱정 없을줄 알았는데 사람 욕심이란게 그렇네요.

음 그리고.. 저도 작년에 여기서 쪽지로, 댓글로 정말 많이 위로받고, 도움받았던 경험을 되살려 말씀드리자면

지금 시기에 너무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계속 신경쓰이고 이거 아니면 인생이 어떻게 될까 싶고
저도 다 이해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감정소모에 시간소모에 득이 되는 게 없더라구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면, 이제 그냥 기다리시면 돼요.


그리고 잘 나오신 분도 못 나오신 분도 지금 나온 결과에 너무 얽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수능 성적이 지금은 전부인거 같지만 당장 1년만 지나봐도 19수능 성적표가 나올 것이고

다들 최선을 다하셨다면, 남은 입시 잘 되실 겁니다

그리고 만약 최종 결과가 좋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사람일 모릅니다. 정말로..


지금, 이 상황이 어쩌면 더 크게 성장하라고 주시는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힘들게 달려왔는데


조금만, 조금만 편하게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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