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날다 [257626] · MS 2008 · 쪽지

2011-02-02 21: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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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 수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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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외국어영역도 끝내 나를 배신하였다.
당시 나는 언-수-외 3과목을 모두 망친 줄만 알았다.
제시문이 길어진 데다가 정답의 근거가 되는 부분이 명확히 잡히지 않는 문제가 많았다.
특히, 빈칸 3점짜리 킬러였던 26번(Purpose, then, justifies the efforts it exacts only condittionally,
by their fruits)은 충격과 공포였다. 지문을 보아도, 선택지를 보아도 통 답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영어를 잘 하게 된 이후로 영어에서 시간이 모자라 문제를 날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만은 달랐다. 26번 지문을 두 번 읽었으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28번 2점 빈칸(여행)도 굉장히 어려웠다.
근 3년 동안 빈칸이 왜 최고난도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교만을 부릴 정도로
빈칸에서 막힌 적이 없는데, "하필이면" 언어 듣기를 5년만에 처음으로 막혀 보았듯이
외국어 빈칸을 3년만에 처음으로 막혀 본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심리적 데미지는 거의 제곱으로 먹혀들어왔다..
28번은 자신없게 답을 쓰고 넘어갔고, 결국 틀렸다.
26번 문제는 다른 문제 다 풀고 1분 20초 정도가 남았을 때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지막 1분 10초를 쓰고도 그 문제는 나에게 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워낙 언어, 수리에서 심리적 데미지를 크게 입은 탓에 전투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나보다.
부모님 원망스럽습니다.
왜 나를 이세상에 나오게 하셨나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네요. 심장마비라도 걸려서 다 잊고 싶네요...
그냥 찍기로 결심하고 다시 10초 간 선택지를 보았다.






그 순간, 5번 선택지가 아주 인상깊게 다가왔다.
'the former approximates to zero and the latter to infinity'
『former』에 해당하는 것은 time and energy, 『latter』에 해당하는 것은 resulting assets.
순간 나는 정답률이 21%로 집계된 9월 평가원 28번 빈칸 킬러의 정답이 떠올랐다.
'Success divided by pretensions equals self-esteem'
분수가 답이 되었던 독특한 신유형 문제였다.
혹시... 그 때 '성취/허세'에서 분자에 있는 성취가 늘어나고 분모에 있는 허세가 줄어들어야 한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똑같이 '결과/시간,에너지''라는 분수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 글을 낸 게 아닐까.
산출되는 결과는 최대한 많이, 투자되는 시간과 에너지는 최대한 적게 들여야 하자는 게 아닐까?
그러고보니 문제가 3점이군. 아, 혹시 너무 어려운 문제니까 출제위원들이 9월 평가원을 반영해서
비슷한 논리 구조를 출제한 건 아닐까?
아, 또 사이렌이 울리네. 모르겠다. 진짜 그런 의도로 낸 문제인가보지.. 시밤
그래, 그냥 찍자. 과감하게. 5번!







또다른 빈칸 3점이었던 29번, 분수 얘기같은 26번, 여행관련 28번.
빈칸 3개를 연달아 틀린 것 같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나 어렵게 푼 문제들이라 맞을 자신이 없었다.
실제로 내가 집에서 채점할 때 외국어영역 전체에서 28번, 29번 이 2문제를 틀렸다.
무려 3문제에서 얻어터지고 나니 이젠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그나마 마지막 남은 희망의 끈조차도 끊어져버렸다.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걸어 계단을 내려갔다.
세상이 노래지며 돌고 있었다.


학교의 어느 후미진 건물 화장실 똥칸(?)에 들어갔다.
칸막이에 기대어 섰다.
이제는 눈물이 참아지지도 않았다.
그냥 통곡을 했다
꺼이꺼이 울어야 속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이러려고 내가 자퇴를 했나, 이러려고 내가 재수를 했나, 이러려고 내가 삼수를 했나.
내 그릇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나는 역시 시작이 그랬듯 끝까지 무능하구나.
역시 나같은 건 엄마 말대로 시립대라도 감사하게 다녔어야 했어.
무슨 얼어죽을 서울시립대에서 두 글자를 빼겠다고 나섰느냐.
병-신. 집안 말아먹고 부모 등골 빼먹은 불효자식. 천하의 개쌍.놈. 그냥 나가 뒤져라. 차라리 그게 효도다.



자책에 자책이 더해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중학교 2학년 이래로 운명을 바꾸고 싶다고 달려온 내 7년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나 자신도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죽을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이 바로 지옥이었으니까.



한바탕 울고나니 이제는 미련도 다 없었다.
초점 잃은 눈으로, 그냥 사탐이라도 올1등급 받아 체면유지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쩍거리며 교실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국사책을 펴들었다. 지엽적인 부분들, 내가 잘 외워지지 않던 부분들만 표시해두었던 것들을 찬찬히 읽었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갈색 봉투를 든 선생님이 교실 앞에 와 있었다.




4교시 사회탐구 영역.
나는 윤리 선택자였기 때문에 무조건 맨 첫 과목은 윤리였다.
그런데.. 윤리 1번 문제의 제시문이 나의 상태를 너무 잘 대변해 주는 듯했다.



'이카로스는 미로를 탈출하려고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붙여 날개를 만들었다.
이카로스는 태양 가까이 날아오르면 날개가 녹을 수 있고,
너무 내려가면 바닷물에 날개가 젖어 못 쓰게 되니
적절한 높이로 날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러나 차츰 더 높이 날아오르고 싶은 마음에 태양 가까이 올라갔다.
그러자 밀랍이 녹으면서 날개가 흩어져 버렸다.'


이 제시문을 보자마자 다시 눈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바로 내가 이카로스였으니까.
한스러운 현실을 탈출하려고 공부를 잡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 재밌어서 공부를 나의 평생 업(業)으로 삼기 시작했다.
보상심리에 목표를 무작정 높게 잡고 깝쳐대다가 떨어지고 있었다.
나의 날개는 흩어져 흔적도 없었다.



그저 슬펐다. 흐르는 눈물이 감독관 샘께 보일까봐 휴지로 코를 감쌌다.
코 푸는 것 처럼 보이게 하려고.
나의 빨갛게 부은 눈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120분 내내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5교시 제2외국어 영역.
그래도 4교시 사탐까지는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시험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정도는 요점정리한 것을 다시 보고 들어갔다.
그러나 이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모든 것이 끝이었으니깐.
그렇게도 망했던 재수 때보다도 본전을 훨씬 못 뽑은 채
중경외시로 떨어질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냥 엎드려 울면서 그 긴긴 쉬는 시간을 다 보냈다.
시험이 시작되고 40분 간 한문을 다 보고나니 마음이 다시 짠해졌다.
감독관 선생님이 방송이 나올 때 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 대기시간동안 나는 다시 엎드려 울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자꾸 나오는 콧물
아무리 감추려 해도 엎드린 두 팔 사이로 삐져나오는 눈물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나의 어두운 과거.
이제 모든 것이 끝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든.
수능도 끝이고, 불쌍한 내 인생을 구제할 기회도 끝이고, 부모님께 효도할 기회도 끝이었다.
나에게 더 이상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평생 남은 80년동안 교만의 업보를 지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교문에 어머니가 나와 계셨다.
나는 어머니를 안으면서 딱 한 마디만 했다. 이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설명되기 때문이었다.





"엄마, 미안해요"










엄마는 나의 메시지를 알아채신 듯 헀다
"장하다 우리 아들, 괜찮아!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잖아?"
"응"




"그럼 그걸로 된 거야. 고생 많았다. 엄마랑 저녁 먹으러 가자"






그렇게 악몽같은 11월 18일의 밤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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