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5개한번에먹기 [248171] · MS 2008 · 쪽지

2010-12-09 01:45:27
조회수 4,561

죽어도 해피엔딩 - 1. 3할을 원하나, 30홈런을 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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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2009년과 2010년을 통틀어
단 한번도 일어난 적 없던 시간에 일어났다.
그날 아침은 몹시 추워서
아침을 대충 먹고 나온 내 귓가에 내 입김이 돌았다.

아빠와 함께 조대부고로 가는 택시 안
그 곳은 고사장 이상의 정적이 맴돌았다

대략 30분이 걸려 도착한 고사장
5분을 걸어걸어 도착한 고사장 문앞에서


나는 운신의 폭을 다하고 오겠노라 말했다.
웃으면서.








1. 3할을 원하나, 30홈런을 원하나?










자기소개 ㅜ_ㅜ할게여...
빠른 92년생으로 재수생입니다. 강남대성에서 재수하였고, 재수동+독학생동에서 활동하였습니다.
10입시 전국 원서질 최강이라고 자부하던 원서를 뒤로한채 쿨재수 선언해서
올해수능 비록 표점은 시망이지만 등급은 111 1111 기록했습니다.
수기를 쓸 정도의 괴수는 아니지만, 재수를 하면서 목표했던게 수기를 쓰는 것이였고,
나름 효율성 측면에서는 잘했다고 생각하는 터라서 수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보고 욕이 나오시더라도, 한 번만 참아주세요 ^_^




어릴 적에는 공부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6살쯤에 한자 5급인가를 따고 나서 딱히 다닌 학원이 없으니...
그리고 본디 머리를 쓰는 데 취미가 없었다. 무엇이든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성격이라...

중2 올라갈즈음 노래방과 게임에 빠지면서 신나게 놀아버린 결과
250명 갓 되던 지방 평범한 중학교에서 240등대의 성적이 나왔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간다면 힘들겠다는 평을 받았다.

평생 공부로 잘나본 적은 없었지만, 내 적성이 기술이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 그래서 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공부라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시험 5일전부터 독서실에도 가고, 수업도 들으면서 책을 보기 시작했다.
결과 중3 총괄 7%라는 놀라운 내신(나는 고등학교에 가서조차 이 기록을 깨지 못했다 ㅠ_ㅠ) 을 기록하며
인문계 고교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실력으로는 내가 고등학교에 가봐야 별 일 없다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었다.

-10가 선수학습도 하지 않은 아이가

-관계대명사가 뭐인지도 모르는 아이가

-Complete가 뭐인지도 모르는 아이가

설령 고등학교에 가봐야 좋은 성적을 거둘리 만무하다 - 는 판단이였다.


그래서 나는 이때

‘난생 처음 - 그리고 아마 마지막’ 으로 스스로공부를 실천했다.

하루에 우선순위영단어 를 400개씩 외우고

학원과 별개로 수학 10-가 문제집을 1권씩 풀면서

그래머 인 유즈 로 문법공부를 했다(아, 이건 비추...지만 ㅠ)

아, 물론 3일에 한번씩 노래방에 가기도 했다.(휴식은 필수가튼거...?)


그리고 고등학교 반배치를 보러 간 나는
전교 5등이라는 경악할 만한..-_- 성적을 거두었다.

세상에나

난 처음부터 공부를 잘하게 태어난 인간이 아닐까
난 아이큐 160이 넘는 초특급 괴수가 아닐까 하는 망상이 들던 찰나

고1 3월 교육청 모의고사를 보았고
언어영역,수리영역 그리고 외국어영역 등 수능 형식의 문제들을 처음 본 나는
(공부 안해본 사람들은 알거임! 지방이면 정말 처음 보는 경우가 있다..)
충격적 점수를 맞고 잠적











... 하긴 개뿔

난 전국성적표 상에서 언수외 표점기준 0.09%를 맞아버렸다.
(탐구는 묻지말아요...ㅠ ‘F, 질량, 염산’ 이런거 평생 처음 본 아이인데... 대략 두과목 합쳐서 80점 조금 더나온 기억입니다.
그중에 사회탐구가 60점대였나?)

중학교와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를 와서 , 알던 선생님들이 몇분 계셨는데
( 다만 선생님들이 나를 몰랐다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심지어는 학부모 모임에서 나와 같은 중학교를 나오신 아이의 어머니가,
우리 엄마에게 나는 어디중을 나왔냐고 물어보셨다고 한다 ㅠ_ㅠ)

선생님들도 내 존재를 슬슬 기억해주기 시작하셨고,
아이들 사이에 간간이 나오던 반배치고사 컨닝의혹도 사라졌다.


하.지.만

뭐 그 이후 나의 기억에 하루 전부에서

야자를 제외하고 공부를 해 본 기억이 없었고,

잠이 엄청 많은 체질이라서 하루에 10시간 이상 잠을 자면서,

그렇게 살았기에 엄빠(엄마+아빠)는 항상 나에게 뭐라고 하셨지만(ㅠ_ㅠ)

나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공부 시간을 점점 줄였고

고1 말쯤 나는 하루에 대략 1시간정도 책을 잡고 있었다 -_-...

결국 운좋게 이루어졌던 나의 성적은 점점 떨어졌다. (그래도 전국 0.5%~0.7% 정도를 왔다갔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당)

그리고 문이과 선택에서
난 주저없이 문과를 선택했다.

그건 내.생.애 최악의 선택이였을 것이다.(아직 19년밖에 안살아봐서 의문표...)



내가 문과는 무슨

우규민 40세이브 구원왕 소리하고있네


언수외는 그닥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록 밑천없어서 지방 일반고에서조차
근본없는 1등급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계속 1등급을 유지는 했었다.

다만 탐구...
경제랑 근사는 그럭저럭 할 만했다 (디씨 정치사회갤 고마워요 ^^)

윤리.

아나 왜 내가 공자 맹자 노자 장자 한비자...아오 ㅠㅠㅠㅠ 왜 내가 이런걸외워!!!
라면서도 이거만 외우면 끝이겠지 해서 우물우물 외웠는데

서양윤리 ^^

난 이과로 전과했다. 진짜 다른 이유 없었다. 난 사회탐구를 할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윤리+한지는 물1+화1+생1+생2 이상의 포스를 가지고 있다...)

나름 이과로 와서
첫 모의고사에서 수리가 1등급을 맞으며
‘성공적인 연착륙’을 한 나는
결국 이에 대해 다시 06심수창 10승을 한것같은 근자감을 가진채

그렇게
꾸물꾸물 살다가 고 3이 되었다.
과학탐구는 꾸역꾸역 스카이에듀로 과탐 4과목 인강을 돌렸고
3월 즈음부터는 플래너를 통해 안 대성마이맥 인강을 들었다.

...라고는 하지만
내 공부에는 근본이 없었다.
거기다가 의지도 없었다.

아니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저 두가지를 안 가진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하루 10시간씩 자는 놈이 또 놀기는 좋아해서
이것저것 하고 남은 공부시간은 대략 하루에 두어시간 정도였다.

당연히
고3들어 점점 성적이 떨어졌다.

언수외 111은 당연하게 여기던 나에게
간간히 보이는 211과 112는 내 불안감을 증폭하게 했으며

무엇보다도 김재박 감독의 마지막 발악으로 한때 2위까지 올라간 엘지는

내가 야갤에서 “엘지 우승하면 재수한다 ㅅ...” 같은 드립을 치며 놀게 만들었다.
(야갤은 결국 내 재수마저 발목을 잡게 되었다 -_-...)

6월 평가원,
이 시험은 꽤 잘봤다. 단국대 치대 부근이였으니...
내가 살던 지방에서 27등 정도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진위는 모르고 학교 선생님이 이리 말하셨다.)

그 시험을 보고 난 후

난 3개월간 펜을 쥐어본 적이 없다.(이건 우리반 애가 나중에 나에게 한 말이다.)

펑펑 놀았다. 정말
인생 해 볼 수 있는 것 다 하면서
‘대학따윈 필요 없어‘ 하고 외치면서 놀았다

그렇게 그 아이는
탄젠트 미분식부터 까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흘러
난 9월 평가원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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