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번☆ [56176] · MS 2004 · 쪽지

2008-04-12 14: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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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고꼴지 대학가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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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자만


8월말의 모의고사는 정말 잘봤다. 정말 잘 찍었었다. 반에서 소문이 났다. 100점이 올라갔다고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머 그런거다. 열심히 하는데 점수가 안올랐던 아이들
내가 맨날 자습 시작하자마자 피방에 가는걸 아는 아이들은 좌절을 했다.

고3때 담임선생님께 정말 죄송하다. 자습 일지에는 거기 있었다고 기록이 되는데
나는 피방에 있거나 놀러갔으니...열심히 했어야하는데 ㅜ.ㅜ 반평균을 몇점을 깎아먹는놈이..
내가 꿈으로만 생각하던 고대 경영이나 고대 국제학부는 꿈이 아니었다.현실이었다.
그것은 자만이었다. 이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쳤었다.
모의고사는 모의고사 일뿐이었다. 차라리 그 모의고사를 최저점을 맞았으면 공부를 더했을것이다.

책한번을 안잡았다. 게임하고 놀고 잤다.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올해 입시는 나의것이라는 자신감만 있었고 쌓았던 실력은 다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9월 수능 모의평가.

언어 74 4등급 수리 49 4등급 영어 98 1등급
사탐 국사 42/한국지리 41/근현대사 45/경제 39 5/4/3/3(종합이 없음..)
총점 378

전국 백분위 추정이 불가능 했다. 어이가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사실 8월거는 개뽀록이었다. 8월은 사탐빨이 주효했었고 언어랑 수학이 좀 미친듯이 잘 풀렸을 뿐이었다. 거기다 학원에서 보는 모의고사라 시간을 5분에서 10분정도씩 더 쓸수 있기도 했다. 알바가 안걷어 가고 그냥 밖에 답안지를 내라고 했으니까..시간덕분에 한 30점은 더 올랐다. 게다가 8월 사탐은 전범위가 아니었지만 9월 사탐은 전범위라는게 또 주효했다. 그래서 점수결과는 대몰락이 당연했다.
그런데 나는 이번시험은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공부를 조금씩 했다.

그런데 이번엔 점점 수능이 다가와서 인지 공부가 손에 안잡혔다.
9월당시 나는 4점깨 부시기라는 수학 문제집을 풀었는데
도저히 내수준의 문제집이 아니었다. 그리고 언어영역 문제집은 많이 풀었으나
점점 90분안에 풀지 못할 정도로 언어 문제 푸는 속도가 느려졌다.
9월 모의때는 뒤의 지문 2개를 못 풀고 찍었다. 그다음의 모의고사들도 패턴은 마찬가지였다.
사탐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니 걱정이 많았다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수학을 업그레이드를 시켜야하는데 학원선생은 의지할수가 없었다. 내가 해야했다.
그러나 난감했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정석은 돌릴수 없었다. 공부를 하든 말든 그만일것 같았다.
피같은 자습시간에 그냥 피시방에 가서 시간을 때웠다. 올해 갈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으나
말 그대로 자신감 이상은 높았다. 8월 모의고사에서 딱 받은 판정 고경, 고국제 갈수 있다 였다.

공부는 안했다. 기숙학원에서의 수련은 점점 말짱 꽝이 되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10월의 모의고사는 더 과간 이었다. 수리가 계속 3등급이 나와줬다.
언어는 5등급에서 4등급을 왔다 갔다 거렸다. 영어를 다맞거나 하나 틀려도..
사탐이 거의 다 4등급이니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나는 반평균을 깎아먹는 존재였다.
그러나 자신감은 있었다. 그래도 갈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해쳐 나가는게
나의길이라 생각했다. 다이어리를 보면서 나는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 전국 10프로 밖을 찍고 있지만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2004.9.16/KICE     /378
2004.10.13/서울시 /375
2004.10.31/중앙    /402  전국 10%
2004.11.02/종로    /379  전국 27%

마지막 모의고사를 괜히 봤다. 점수가 뚝 떨어졌다.
버스정류장에서 학원에서 차를 기다리면서
그 모의고사를 채점하고 나서 얼마나 허무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허무함은 하루만에 없어지고 수능이 가까워지자 자신감이 더해졌다.
보통 수능이 가까워지거나 큰시험이 가까워지면 초조해져서 본실력보다
시험을 망치는 케이스가 많았다. 그건 수기에서 이미 몇십차례 보던 내용들이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일단 아쉽더라도 지금 실력으로 최선을 다하고 할수있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나는 모의고사는 모의고사일뿐 수능에서 대반전을 일으킬수 있다고 믿었다.

평소에 하던대로 게임 하루에 5시간에 카오스라는 유즈맵 게임에 미쳤었다.
잠은 마니자니 과연 대반전을 일으킬수 있을지 내 마음속에 요동쳤다.
그래도 정말 재수는 하기 싫었다. 실패가 뻔했다.
수능을 일주일 남기고 그래도 공부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작심삼일
마지막 4일동안은 풀기도 싫고 만지기도 싫어졌다.
오히려 부정이 탈것 같았다. 나를 믿었다. 공부는 별로 안했지만
3년간 축적했고 그동안 조금씩 쌓아온 기본기들을 믿었다.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느덧 11월 17일이 되었다.


10) 05 수능 그리고 입학

수능날..
별로 두렵지 않았다.
보통 두렵다고 잠도 못자고 밤새는 사람들이 있다.

수능 전날 참 잘잤다.
내일의 대박을 꿈꾸며....
자신이 있었다.

반전을 노렸다.


언어 쉬웠다.
수리 쉬웠다.
영어 쉬웠다.
사탐 쉬웠다.
제2외국어 다맞는게 당연하다.
....
쉬운줄 알았다.




과 친구들 사이에서 문자가 돌았다. 결과는 대충 알려졌다.
사실 채점하기 전에 피시방에서 채점하던 친한친구가 479가 떴다.
당연히 나도 잘봤으니 그 점수대가 뜨겠지 이렇게 생각햇다.
언어는 감은 좋았다.
91점.. 나름대로 선방이었으나 한지문에서 7점이나 나간게 아쉬웠다.
그런데... 수학의 수많은 계산실수...
90점대로 예상했던 수학은 미끄러졌다.
그리고 나는 사탐이 에러였다.
공부를 안한 당연한 대가이다.

언어 91 2등급 수학 73 3등급 영어 98 1등급
국사 39 5등급 한지 42 5등급 근현 48 1등급 경제 45 3등급
총점 434

5등급대를 찍어주던 언어는 반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수학은 계산실수가 너무 많았다.
갑자기 눈이 아파서 안경을 벗고 눈으로 푼게 실수 였다.
손으로 풀지 않았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사탐은 원래 대비가 안됐었고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05수능은 점수 인플레가 심했다.
500점과 498이 너무 많았다.
490이 전교 20등 후반이었으니 할 말 다 한 거다.
그것도 내 사탐조합이 아니라 표점 최고 사탐조합으로 490이..
어려운 사탐조합 덕에 전국수석이 모교에서 나왔다. 그런데 역시 이건 나랑 별개다.. 난 그걸 피해서 이 조합을 선택했는데...

원서를 써야했다.
오르비질을 열심히 했다.

전국 백분위 6.5~7.4%

인 서울은 가능했으나
갈만한 곳은 없었다.
나의 이상은 고대 였는데.
아쉽게도 못 가게 됐다.
재수를 해야 했다.
재수는 하기 싫었다.
나는 수능을 대비 한다는게 싫었다.
놀고 싶었다.
그동안 오르비에서 축적해논 데이타를 분석했다.
그리고 쓸 대학을 결정했다.

가군은 고대 경영이 배치표상으로 고평가 되고
작년에 빡샜기에
올해 왠지 펑크의 기운이 돌았다.
지원자들이 이상하게 다 강했다.
내점수로 감히 가군은 고경을 질렀다. 논술대박을 노리는 거다.
나군은 외대 국제학부를 썼다.
그냥 나의 점수를 특화 할수 있는 과였다.
영어가 2.5배니 할 말 다 한거다.
다군은 머 점수 맞춰서 썼다.
논술대박을 노렸으나 사실은 거의 포기하고
논술학원은 다니지도 않았다.

1승 1무 1패

고경이 펑크는 났다.
그러나 뒤집을수는 없었다.
대기 197번..논술에서 나름대로 호투했다. 내뒤에 200명이니 할 말 다 한거다.
하지만 딱 볼때 많이 가야 80번이었다.
고대에 대한 꿈을 접었다.
그리고 면접에서 재수 좋게
종교에 대한 견해를 설명 할 수 있는 지문이 나와
이슬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털어놓고
좋은 이미지를 심어 영어면접에서 뒤집기가 가능했던
외대로 진학했다.
최초합격 되었다.
그래도 올해 대학을 갈수 있다는게 기뻤다.
그렇게 05년도 입시는 끝났다.
그리고 친지들의 많은 축하가 뒤따랐다.


11)반수생 추가


그러나 지금까지 수기를 읽으신 분이면
나의 꿈은 수기 쓰기였단걸 알고 있을거다.
그런데 만약에 05때 합격해서 끝났다면
물론 수기는 없었다.
ㅚ수분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야매 수험생은
운좋게 대학에 합격하고도
높은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냥 학교를 다니려고 했다.
솔직히 내 수능점수로 갈수 있는 학교는 아니었다.
면접 뒤집기였다.
영어로 수업하고
제2외국어 제 3외국어수업도 다양하고
외국인 교수가 우리를 담당 한다는게 좋았다.
그러나 나의 이상은 높았다.
그런데 공부하기는 귀찮았다
결국 현실과 타협하여 그냥 다니기로 했다.

대학생활 재밌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매일 같이 지내면서
그냥 사는게 즐거웠다.
그러나 내 생각이 바뀐건 고등학교 동기들의 모임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고대의 S모 연애인을 인터뷰 한적이 있었다.
그 전부터 내 목표가 고대였지만
확실히 고대를 가려는 마음이 더욱 확실시 되었다.
S모연애인은 삼수 끝에 고대를 온 사람이다.
지금의 유명 연애인도 그런 힘든 시절이 있었다.
S모연애인과의 인터뷰 덕분에 나는 더욱더 고대에 목숨 걸게 되었었다.
그래서 언제나 친구들에게 나는 고경 아니면 고대 국제학부를 간다고 했었다.

정말 친구들은 대학을 잘 갔다.
이과가 대부분 비교내신을 안주고
수능을 망해서 최상위권 5명 정도를 빼고는 전멸했지만
우리학교의 실적은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친한친구가 서울대를 갔다.
그리고 매일놀던 친구들은 고대에 있었다.
아니면 연대로 나눠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SKY를 노리고 재수나 반수를 했다.
나는 내가 지금 내 이상과 얼마나 괴리감이 있는 상태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솔직히 올해 대학에 붙은걸 감지덕지 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포기하면 내 목표는 어떻게 되는 건지 생각했다.

사실 나는 친구들에게
내가 현재 이렇게 안 좋은 수능 모의를 받아도
내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언제나 말했던 인간이고
친구들은 그걸 보고
저기 저렇게 점수 잘 나오는애도 불안해하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자신감이 있냐
정말 알수 없는 자신감이다
하고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수능이 끝나고는 말뿐인 인간이 되었다.
말뿐이기는 싫었다.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내 꿈을 이루고 싶었다.
인생의 완전한 목표는 아니지만..
지금 다니고 있는 좋은과 좋은대학..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3월 말경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마지막 5일간은 수업 안 듣고
도서관에 들어가서
노트북으로 닥치고 카트만 했다.
그냥 수업 듣기도 싫고
카트하면서 생각이나 정리하자고 생각했다.
그래 거의 학업은 포기한거나 다름없었다.
여러 국제학부 동기들의 문자가 왔다.
뭐하느라 수업 안오냐고
집에 있다고 했다.
나는 사실 도서관에서 카트만 하고 있었다.
재수를 하면 실패하면 어떻게 할것인가?
다시 복학을 하거나 삼수를 해야한다.
왠지 나의 의지력과 공부 집중력으론
재수를 하더라도 책상에 앉아서 생각만 하다가
문제는 별로 안풀고 게임이나 하러 피시방으로 가거나 애들이랑 놀러갈거 같았다.
생각을 많이 해야했다.
반수 성공 확률은 통상 거의 15프로이다.
실패할 확률이 몇배나 높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반대도 생각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하는것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3월 30일 카트를 하다가 .. 결심히 섰다. 노트북을 덮었다. 이렇게 놀 수는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3월 31일부터 재수학원을 알아봤다. 어머니한테는 학교 간다고 아침에 나와서
맨 처음 강북종로 부터 가봤다.
솔직히 두려움은 있었다.
나같이 놀기 좋아하고
내신이 안드로메다인 녀석
그리고 아직도 1년 공부해도 기초가 부족한 녀석이
어떻게 목표를 이룰수 있을까 그냥 하더라도 닥치고 복학 아니면 삼수 예정아닌가.
그러나 일단 가는거였다.
등록금이 아까웠다.
그러나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했다.
같은과 사람들한테 미안했다.
나 때문에 들어올수 있었던 한사람이 없어지는 거니까.

4월 1일
거짓말처럼
나는 KNDS를 등록한다.


12) 나태했던 KNDS에서의 3개월간의 생활



4월에 반수를 시작하는 반수생은 없다. 6월 정도에 시작 하는게 태반이다 그러기에 나의 05수능 언수외 점수는 KNDS의 무시험 컷라인인 385를 겨우 넘는 정도였으나 대기자의 ds명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학원을 들어갈수 있었다.
나의 신분은 반수를 가장한 재수생이었다.
돌아갈 곳이 있었다 보험이란게 있었다.
그래서 반수 초반엔 정말 공부를 안했다.
뭔가 해내야했다. 그래서 극 초반엔 올해는 꼭 이룬다는 다짐을 하였다.
공부를 할 생각이 없었던 망나니 였지만 올해는 꼭 목표를 이루겠다고 생각했다.
들어간 몇일동안은 학원애들(이지만 고등학교 같은반 친구들)과 놀면서도 그래도 열심히 했다.
수업은 어려웠다. 특히 수학은 안드로메다;;;
무슨 외계어를 듣는것도 아니고 이해가 전혀안됐다. 그래도
수업 열심히 듣고 그래도 자습을 나름대로 했다. 그러나 기본기가 없었던
내가 그후에 본 첫 모의고사는 거의 패닉 수준이었다.

언어 74 4등급 수학 55 4등급 영어 98 1등급
국사 43 4등급 한지 40 5등급 경제 34 5등급 경제 40 5등급
총점 385 전국 21%

아무리 수능끝나고 공부를 안했다고 하지만 이건 거의 패닉이었다.
성적표를 들고나서 한숨이 나왔다. 이거 잘못생각한거 아닌가.
올해 내가 나온곳이나 지원할수 있는가... KNDS의 수학은 너무 어려웠다.
명강사들의 집합소라지만... -_- 진짜 너무 어려웠다.
100점들을 위한 수업이었다. 정말 전혀 모를것 같았다.
언어영역.. 열심히는 들었다.
그런데 원래 언어라는게 듣는다고 되는게 아니다. 그래서 도는줄 알았다.
사탐... 그래도 사탐은 열심히 들었는데 국사는 정말....너무 양이 많았다.
그나마 현역때 조금 공부한건 다 날아갔다. 없다....-_-gg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했다. 국사 교과서도 어디갔다
.....
국사 자료 있는건 교재랑 누드교과서, 누드교과서 국사를 기본서로한건 나의 실수였다.
그래도 다른 사탐은 꾸준히 연마됐다.
영어는 공부한적이 없다. 15년간 익힌걸 믿었다.
그리고 반수동안 영어공부를 한적은 없다.. 모의고사 3교시 외국어영역시간이
반수때의 외국어 공부시간의 전부이다..;;
그런데 과연 야매 수험생이 반수를 가장한 재수를 한다고
공부를 했을까? 아니다....
며칠은 그래도 잘했다.그러나 점점 수업시간은 모르겟고 결국 수학은 자는시간이 됐다.
자습은 안했다.-_- 그냥 친구들과 게임하거나 놀러가거나 술 마시러 갔다.
카오스 대회도 KNDS에 있던 고등학교 친구들과 전국대회 8강에 올랐는데.. 그 정도로 너무 놀았다.
3시 40분부터 자습이었는데 매일 몇 시간을 놀았는지 모르겠다.
보는 모의고사는 족족 패배했다. 그중에서 대성월례는 압권이었다.

언어 9등급 수학 6등급 영어 1등급
사탐 종합 7등급(전부다 20점대)
전국 88%

.. 그냥 보고 OTL이었다.
대성 내에서 전국 백분위가 88%였다. 그래서 전국 모의고사 식으로 하면 그래도 35프로대까지는 갈거라고 생각한다.
6월 모의고사는 그래도 좀 나았다. 그런데 수험생들이 주의할점
교육청 모의평가 등급과 백분위 그리고 6월 수능모의의 등급과 백분위는
조금은 믿어도 되지만 아직은 믿을만한건 아니라는걸 명심할점이다.
차라리 사설모의고사 백분위가 추측하기 더 낫다. 왜냐?
교육청은 현역만 보고 6월 수능모의는 아직 다수의 고3들이 진도를 때지 못한 상태기 때문이다.

6월 수능 모의평가
언어 77 3등급 수리 73 2등급 외궈 92 1등급(OTL 드디어 안하니 점수가 떨어진다.)
국사 27 4등급 한지 38 3등급 근현 31 4등급 경제 38 5등급

총점 376 백분위 추정 불가..

2005.4.14 /대성    /384 전국 21%
2005.5.26/대성월례/305 전국 88%
2005.6.1 /KICE      /376 추정불가


6월 모의고사를 보고 친구들 모임을 가고 나서 열심히 생각했다.
반전이 필요했다. 이건 아니었다. KNDS가 최고의 학원이지만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머랄까 수련이 필요했다. 반수인데 이렇게 못하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13)기숙학원에서의 수련



6월 모의고사 후 5일의 휴일과 다름없는 날이 있었다. 그리고 6월 6일.
아무래도 KNDS 같은  좋은 학원을 때려치우려면
계기가 필요했다. 집을 나갔다. 그리고 3일간 돌아오지 않았다. 폰을 꺼놓고 찜질방에서 자거나 피시방에 있었다. 첫번째는 원없이 게임을 하면서 게임을 이제 접고 싶었고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기도 했고 두 번째는 강력한 계기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9일이었던가 다시 돌아왔다. 어머니의 야단은 장난이 아니셨다. 그날 나는 학원을 안가겠다고 말했다. 거기 남아있는 교재도 이제 쓰지 않을꺼고 거기 남는다고 수학을 챌수 없을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독학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학은 쉬운게 아니었다. 그리고 수학을 풀때 가르쳐줄 선생님이 없었다.
결국 하다가 지쳐갔고 집에서 독학하는 거였는데 집에서는 하는거라 밖에서 헛짓을 할 틈도 없었다. 그래서 공부를 할만했다. 그러나 지쳐갔고 잠을 잤다. 결국 기숙학원에 가기로 결심을했다. 고3때의 반전 반전을 일으켜준 그곳 강화도에 새로 생긴 기숙학원을 찾았다.

5달동안 1000만원이라는 엄청난 학원비를 날려야했지만
어머니께 엄청난 금액을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믿어달라고 했다.
매일 놈팽이처럼 놀고 공부도 안했지만 이제 기회는 한번 뿐이었다.
대학등록금도 버리고 왔는데 질수는 없었다.
강화도에있는 기숙학원에 도착한건 6월 23일이었다.
그때부터 미친듯이 공부를 시작했다. 시설이 참 좋았다.
4인 1실 화장실도 있고 독서실도 엄청 크고
캠퍼스는 광활하고 엄청나게 비싼 값을 했다. 앞으로의 5개월동안을 버틸만 했다.

고등학교 재수친구들에게 KNDS때려치우고 기숙학원을 들어갈 때 우려가 좀 있었다.
거의 대부분 \'기숙학원을 들어가면 더 망한다는 거였다.\'
그래 한번 해보자.. 대반전을 이뤄내 주마.

기숙학원에서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혼자서 공부해야했고 정말 열심히 해야했다.
기숙학원 도착해보니 열심히 공부하는 애들도 게중 있었고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편이었다.
tv와 인터넷 그리고 컴퓨터가 없다는건 굉장했다.
그러나 갖은 편법은 존재했다.
원래 넉넉한 집안 애들이라 많은 수의 아이들이 PMP혹은 노트북을들고와서
그냥 여가시간을 즐겼다. 독서실에 내려오지는 않고 자습시간에도 그냥 방에 쳐박혀서
노는녀석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공부해야한다.
처음에 그런 부류의 인간이 내 독서실 옆자리라 좀 난감했다.
하지만 그쪽에서 알아서 그냥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공부는 가속도가 붙는다.
난 책상에 포스트잇으로 많은 글귀를 붙였다.
내가 책상에 붙인 글귀중에 가장 맘에드는건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가장 빠른것이다\' 라는것이었다.
사실 3월에 시작하는 현역과 2월에 시작하는 재수생
나는 아주 늦은 출발선상에 있었다. 실질적으로 7월에 출발 하는거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대 좌절하면 안 된다. 혼란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일단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그것 역시 수많은 수기의 내용속에서 얻은 거다.

독서실은 자습 2교시(8시 반~10시)후에는 점점 비어갔는데 그래서 더 좋았다.
초반에는 12시이후의 야자에 사람이 많았으나
나중에 가면 12시이후 내려오는 녀석들은 반수이상이 휴대폰으로 시켜놓은
피자나 통닭을 가방으로 자기방까지 수송하려는 녀석들이다 -_-..

아침 7시에 기상해서 새벽 3시에잤다.
그리고 중간에 졸리면 조금잤다.
4~6시간 정도 잤을거다. 게임이 없으니 정말 공부를 많이했다.
기숙학원은 5일 만에 적응이됐다. 시설도 좋아서 내 집 같았다.
선생님들도 괜찮았다. 특히 시스템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건
영어수업에서 빠지고 나서 그냥 수학만 특훈하다가
수학선생님께서 거의 학원 내에 상주하시기때문에
정말 많은 문제를 물어 볼 수 있다는것이다.
그 선생님 덕분에 정말 많은 문제를 다시 알수 있었다.
기본부터 착실히 설명해주셨다.
그 선생님께서 써준 풀이를 다시 내손으로 오답 노트에 적었다.
하루에 한 10문제 정도 질문했던거 같다.
그 많은 양의 문제를 나한테 풀어주시며 정말 고생하셨다.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지금도 정말 정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그럴거다.
머 강화 J학원의 학생이면 K선생님을 잘 찾아가서 수학 많이 문의하길 바란다.
열정적이시고 친절하신 분이라 얼마든지 답변해 주시니까.
그분 덕분에 나중에 수학을 올릴수 있게 된다.

보통 기숙학원에 가면 답답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래 답답은 하다.
캠퍼스가 광활하고 탈선행위도 좀 할수 있고 밀실이나..
원래 속박된 느낌이란게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피자나 통닭도 조그만 옆동네를 통해 몰래 시켜먹을수 있고. 밥도 괜찮았다.
간식도 많고 답답할때면 기숙학원 캠퍼스 투어를 하면 됐다.
교관들은 노는아이들에게는 엄격하였으나 나같이 매일 공부를 하는 아이들에 대한 제제는 전혀 하지 않았고 편하게 살게 해주셨다.
땡땡이 치는 놈들은 매일 점호시간마다 맞았지만..

휴가는 한달에 한번 2박 3일이다.
그날엔 밖에 나가서 회포를 풀었다.
명절날에도 거의 마찬가지
기숙학원에서 집까지 가는데 1시간 반이 걸리니 집에 가고 오는것은 힘들다.
그러기에 왠만하면 휴가를 안 갔다.
기숙학원은 5개월동안 나의 집이었다.
그리고 정말 내가 생각해도 지금까지 그렇게 공부한적도 없었다. 쉰날은 없었다.
에너자이저도 아니고 텅빈 독서실에 않아
새벽 3시까지 공부했다 인간승리라고 생각됐다.
KNDS 다닐때 하루에 한시간 공부한 적도 없는인간이
이렇게 변할까. 위기는 사람을 초인으로 만드는가 보다.
매일매일 다이어리는 공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나는 어떤공부든 시작 전 무슨 문제집 무슨 과목 이렇게 쓰고 시작했다.)

나는 다이어리를 아침/점심/저녁 이렇게 나눠서 30/30/40
이렇게 공부한 점수를 줬는데 거의 평균이 95이상이었다. 흡족했다.
한해를 공부를 하자면 다이어리가 중요한 것 같다.
2년 동안 월초에는 나의 계획과 목표 그리고 공부 방향을 썼고 월말에는 그것을 반성했다.
고3때는 월초는 허황된 무리한 계획의 연속이이고
월말에는 반성만 2장이 넘어갔지만 반수 초반이 아닌 중반 부터는
월초는 할 수 있는 계획이 되었고 월말은 잘하고 있으니 잘해나가자는 반성이 대부분이었다.
귀찮을수도 있다. 솔직히 어느과목 어느문제집 몇시간 공부 이런거 쓰고
기상 취침까지 정확히 써내는 나의 다이어리 시스템은 조금 번거로웠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서 나중에 어떻게 공부했는지도 알수 있고
다이어리를 쓰면서 앞으로를 계획 그리고 슬럼프일 경우 전환도 될수 있으니까..

기숙학원에서는 수업을 평일에는 아침 8시부터 5시까지 주말에는 정오12시까지 했다.
나머지는 머 자습시간이다.
나는 시간이 없었고 또 반수생이라 반 애들에게 위화감을 줬다..
그렇기에 그냥 정말 왕따가 되어 혼자가 되어 공부했다.
친해지면 좀.. 소모되는 시간이 많을 듯 했다. 그냥 벽을 쌓았다.
외로웠다. 친한애들은 같은 방 애들 뿐 정말 아는 사람없고
밥을 혼자 먹을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초래한짓이고  이겨내야했다. 정말 올해는 가야했다.

기본기를 익히기 위해 정말 기본부터 시작했다.
언어영역은 일단 EBS의 모든 언어 영역 문제집을 사고
그외의 기본과 종합편만 10권을 샀다. 그리고 하루에 3~4시간씩
풀었다. 계속 풀었다. 그러나 언어점수는 절대 오르지 않았다.
정말 안올랐다. EBS에서 나온 파란색 문제집은
정말 어려웠다. 5문제가 있으면 4문제를 틀렸다.
풀때마다 좌절의 좌절이었다. 나는 틀린문제는 또풀었다.
풀고풀고 또 풀었다. 그런데 언어영역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수의 문제집을 풀고 계속 풀고도풀면 문제만 외울뿐이다.
패턴을 익히고 적응력을 길러야했다. 언어영역 점수가 어떻든
10월까지는 양을 정해서 풀었다.
시간이 닥쳐온다고 넘기는 문제집을 푸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대세를 따르지 않았다. 내가 하는대로 갔다.
그냥 기본 종합만 풀었다.
그리고 파트별로 나눠진것만 풀었다.
시 현대소설 고전시가 이런식으로 말이다.
옆에 언어문제집은 쌓이고 쌓였다.
정말 많이도 풀었었다.
그리고 내 언어등급은 10월까지 계속 3~4등급 대였다.

나의 최고의 약점은 수리영역이었다.
솔직히 6월 교평 73점은 뽀록이나 다름없었고 찍은게 많았다. 하도 놀다보니 수학에 대한 기본공식 개념 조차 없었다. 평소에 모의고사를 풀어보면 50점대였고 실제로 8월에 본 모의고사는 55점을 기록해 버렸다. 수능이 140일 정도 남은 시점 내 목표를 이루려면 수학 백분위 96이상은 필수이다. 수학을 올려야했다. 수리영역을 나는 오답노트 위주로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다.

현역때의 내 실패원인을 분석했다.
그건 학원선생님에 의지한 3학년때의 내가 하는 공부가 아닌 선생님이 시켜주는 공부때문이었다.
과외 2년과 2인 수학강의 1년은 내게 그렇게 도움을 못줬다는걸 알아냈다.
그리고 괜히 정석돌리기를 너무 많이 한것도 패인이엇다.
나는 정말 정석을 많이 돌렸었다. 10번이상 돌렸다.
그러나 그 정석돌리기는 보통사람의 정석돌리기가 아닌
그 문제를 풀수있고 그 패턴을 알고있다고 하면서 넘어가는
일명 눈팅 정석돌리기 였다. 그러니 실패는 당연하다. 내 점수도 당연했다.
실력정석만 풀려다 보니 시간을 많이 빼았겼었다. 내가 하는 공부를 해야했다.

일단 풀 문제집을 찾았다.
종로학원 교재가 있었는데 그게 답도 없고 난이도가 어려워서 풀기 좋았다.
나는 공수에 대한 기본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공수 정석을 돌릴기는 찜찜하다.
정석돌리기는 시간잡아 먹기였다.
종로학원 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기초가 부족해서 문제를 풀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정석과 비슷하지만 정석의 문제가 아닌 수학의 바이블을 전부 풀었다. 예제부터 기본 연습문제까지, 이제 좀 살이 붙은 듯 햇다. 그리고 나서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정말 이 문제는 다시 내일 깨어나도 과정은 커녕 풀지도 못하겠다
각 문제집당 한 세번정도 다시 풀어본거 같다.
틀린문제만 계속 추려서 점점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답을 지우고 말이다.
해답은 꼭 각 영역 그러니까 지수 로그 이런식으로 파트를 풀고나서 보았다.
그리고 나서 정말 이건 풀어도 풀어도 오답이다 하는것은
내 오답노트에 잘라서 붙였다. 그리고 손수 손으로 풀이를 썼다.
답을 보고 나서 썻는데 풀이방식을 여러개 될수있는대로 많이썼다.
오답노트에 중요공식도 정리했다.
수리 공수 부분은 함수파트는 아예 그냥 수학의 바이블의 그 파트를
축소복사해서 넣어놨다.
내가 모르는 공수부터 수1 까먹는 부분까지 거의다 오답노트에 정리를 해놓았다.
공수 중학교 수학 다 책을 찾아서 꼭 썼다. 그리고 매일 외웠다. 그렇게 오답노트는 쌓여갔다.

원래 현역때는 그냥 수학 오답노트가 오답을 자르고 답도 잘라서 만드는 그냥 눈팅용 오답노트 였다.
그러나 반수때의 오답노트는 나의 땀이 담겨있고 매일매일을 쓴 흔적이었다.

나는 이 오답노트를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4~5시간씩 투자해서
다시풀어 보았다. 쉽지 않았다. 정말 어려웠다. 말이 4~5시간이지
이틀이상 잡아먹는 때가 많았다. 그렇게 그렇게
오답을 거의 외우다 시피 공식과 패턴을 거의 외우다 시피 했다.
수학은 반복훈련과 패턴을 익히는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빠른 점수 향상 방법인듯 하다.
지수로그 이것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그냥 일단 모든 문제집을 시작하면 나는 전파트를 하루동안 다 풀수 있도록 도전했다.
이렇게 수학은 하루에 한 100문제에서 130문제정도 풀었던거 같다.
처음엔 두시간 동안 한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못풀겠는 문제는
15분이상이 될경우 이제는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기로 했다.
하루에 기본 8시간~9시간이상 수학만 했다.
쉬는시간은 없었다. 밥먹는 시간을 빼고는
수학 3등급이 나오면 대학을 갈수는 없었다.
오답노트는 그렇게 10월말경 작년에 오려서붙인 200문제
그리고 올해 내가 직접써서 만든 300문제 총 500문제가 쌓였다.

옛날 것은 다시 내가 반수할때 재가공했다.
그리고 푼 수학문제집은 10권이 넘어갔다.
그러나 수학은 양이 아니었다. 다만 수학은 언어같지 않았다.
처음엔 3등급이었다. 그런데 점점 올라갔다.

3등급
3등급
2등급
2등급
2등급
2등급

그리고 10월말경엔... 백분위 95까지 도달했다. 신기했다.
그에비해 영어는 본적이 없어서 1등급을 유지했지만 만점은 나온적이없다가
9월 수능 모의평가에서 삐끗했다. 안드로매다 였다.
처음으로 2등급을 봤다. 정말 열심히 풀었는데 감각이란게 존재한다는걸 알았다.

외국어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정말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안했다.
정확히는 수업한번 안듣고 한자도 안봤다.
그러나.. 외국어 마저 슬럼프에 빠졌다.

사탐은 열심히 교과서를 보고 기본서를 독파했다.
그리고 문제집을 다수 풀었다. 절대 다수의 문제집을 풀지 않았다.
그래도 쌓일정도로 많이는 풀었다.
어려운 난이도의 사탐이 6월 8월 출제되었기에 심도있는 사탐공부는 중요했다.
넘기는 문제집은 단 두종 EBS와 마하3만 있었다.
마하3 정말 어려웠다. =+=.....
그런데 9월과 6월 수능 모의평가 난이도에 의하면
그런 문제집을 푸는 수밖에 없었다. 사탐도 정말 어려웠다.
초반에 5등급을 계속 때리던 사탐과목들이 점점 점수가 올라갔다.
내가 공부한게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뻤다.
언어가 조금 오르면 사탐이 내리고 사탐이 오르면 언어가 내리고
외국어가 가끔씩 펑크나고 그런 모의고사 결과들이었지만

특히 언어는 그냥 3~4등급의 고정이었지만 내가 푼 문제집을 믿고
계속 좌절하지않고 쉬지않고 풀었다. 모의고사를 본날에도 좌절은 없었다.
400점을 넘어본 기억은 없다. 그러나 열심히 했다. 계속 공부했다.

2005.7.26/대성     /376  전국 18%
2005.8.26/종로     /363  전국 15%
2005.9.17/KICE    /374  
2005.9.29/종로월례/379  전국 5.4%
2005.10.20/종로   /405 전국 9%
2005.10.26/중앙  / 388 전국 10%

조금씩 상승 곡선을 타는듯햇다.
7월 부터 본 모의고사들은 정말 어려웠다.
그건 10월까지 지속됐다.  
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고대경영이나 고대 국제학부였다.
그런데 8월에 모의고사를 토대로한 모의대학 지원이 나왔는데..
외대 용인캠퍼스 경영이 떴다. 쓰러졌다. -_-.. 내가 지금 외대생인데;;
집에 도착한 성적표의 지원가능한 대학과 학과를 보고 엄마는 정말 웃겨서 쓰러지시는줄 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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