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번☆ [56176] · MS 2004 · 쪽지

2006-07-14 02:38:23
조회수 24,946

외고 꼴지 대학가기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1439925

올해 3~4월 1달정도 오르비 수기에 올려놨던 내용인데

그때는 글이 정리가 안되고 불필요한 어릴적 기억이 많은것 같아서 삭제를 했고

지금까지 연재되던 다른 분들의 수기들이 다 끝나고 나서

어릴적 부분을 없앤 최종본으로 감히 올려봅니다.

저는 샤 대학은 가지 못했지만 대폭적인 점수상승을 이룩할수 있었고

제 수기를 보시면서 수험생들께서 용기를 가지며 자기만의 새로운 공부법에 한달음 다가가길 빕니다.

p.s)이 수기는 아주 깁니다. 읽으시려면 시간을 가지고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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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prologue


모의수능 ,내신. 어느하나도 잘 하는게 없었다.

내신은 나중에 알고보니 전교 430명중에서 석차백분위로 따졌을 때 전교꼴지.

모의수능은 반인원 36명에서 반평균을 몇점이나 깎아먹는 반꼴지

이상만 높았고 실력은 없었다.

고 2때 본 내가 가장 깊게 읽엇던 책중의 하나, 서울대 3인의 수기,

이 수기가 내 운명을 바꿔놓았을까?

제일 첫부분에 나오는 선배님. 사부로의 수기는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서울대를 1,2학년때는 감히 꿈꿨었다.

그리고 3학년 때는 이 말도 안되는 내신을 뒤엎고

서울대에 가보자고도 많이 생각하면서 공부햇다
.
그러나 당시 500점 만점에 400을 못넘는 점수로는

완전 뒤집기가 일어나지 않는 한 내가 갈수 있는 대학은 없었다.

나의 꿈은 대단햇다.

그러나...나는 게을렀다. 놀기를 너무 좋아했다.

게임에 미치고 만화에 미치고 그냥 노는게 좋았다.

이상만 높았다. 갈수 있는 대학은 없었다.

그 파란책이 비록 내 실력에 맞지 않게 목표를 끝도 없이 높이긴 했지만

책이 줬던 행운은 오르비란 사이트를 알게된 것

그리고 4년 동안 오르비에서 축적했던

인문계의 모든 대학과 과에 대한 정보 그리고 과의 배치 위치

그리고 그과에 대한 올해의 입시추세 및 컷 추정 예상 능력

그것이 내가 오르비에서 얻어낼수 있었고 축적하여 입시에 쓸수있었던 선물이었다.

그것 덕분에 같은 수험생이더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수 있었던 것일까?



2) M외고에서의 시작



한국에서 초등학교 내내 자라다가 아버지의 직장일 때문에

아프리카의 이집트라는 나라에서 2년동안 살았었다.

나같은 경우는 현지 사립 학교를 일년 그리고 영국인 학교 1년을 다녔는데

한국 교육과정은 하나도 따로 하지 않은 채

내가 다녔던 학교의 교육과정을 따라가느라

귀국하고 나니 모든 중학교 과정은 생소했다.

처음에는 아는게 없었다. 당연히 알리가 없다.

영어 하나를 빼놓고는 국어는 교과서 수준 따라가기도 벅차고

수학은 외국의 수학이 계산만 잘해도 A+ 맞을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중1 중2 수학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중3 수학을 푼다는건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나같은 경우는 외국에서의 체류자 치고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편이

절대 아니었다. 못 했으면 못했지... 5년이상 영어권 거주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고등학교 내의 교실 붕괴, 그리고 고등학교 수업환경이 좋지 않다고

언론에서 여러가지로 보도했기에 나는 보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특히 배정받기로 예상되는 곳이 맘에 안들었기에

우리지구 근처의 외고를 지망하게 됐다.

내가 목표로 하고자 했던 곳엔 난 감히 특기자 전형은 노려 볼수가 없었다.

너무 잘하는 애들이 많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결국 특기자 전형이 아닌 일반전형으로 외고를 노려보기로 마음 먹었다.

중학교 2학년을 한국에서 마치지 않을 경우

3학년 내신성적을 두배로 반영하는 입시 시스템 때문에

가뜩이나 내신 ㅚ수들이 많이 모여있는 목동의 M중학교에서

석차 백분 35.x프로(등수는 반에서 한 10등정도)가 떠서 내신 -6점

내신 최저점을 안고 우리지구 외고 입시를 보게 됐다.

(당시 외고 입시는 200점 만점으로 100점이 내신 100점이 필기 시험이다.)

당시 학교 담임 빼고 모든사람, 학원 담임, 학교 선생 학원선생들이

나의 100프로 불합격을 예상한 가운데,

열심히 외고 입시 수학을 준비하고 언어 영역을 열심히 중학교 과정을 풀어놔서

처음 시작할땐 거의 0점에 수렴했던 언어와 수리 영역을 거의 다맞고

외국어는 한문제도 실수를 하지 않아서

가까스로 내신 핸디캡을 극복하고 외고 입학을 성공했다.

당시 우리 지역 합격자 100명정도 중에서 내가 내신 최저점 합격자로 알고 있다.

내가 입학하게 된 고등학교는 집에서 그래도 가까운 축에 속한 서울의 M외고였다.

(동기들 수기보고 버럭 말길.
나는 있는 그대로를 남기면서 이런 케이스도 있다느걸 알려주는것 뿐)

처음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렇게 ㅚ수들이 많은 줄 몰랐다. 대단한 학교였다.

들어가기 전해의 2002년 당시의 입시자료

S대 70명 K대 140명 Y대 150명 진학 그외 의대 상당수

순간 매일 나도 SKY를 가는가 했다. SKY는 당연히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모의고사도 당연히 내가 이학교에 들어온이상 잘볼거라 생각했다.

근데 그건 캐..삽질이었다.

입학후. 첫모의고사... 나의 실력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첫 모의고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잘 볼수 있다고 오기만 강했다.

최고 취약점이었던 수학을 조금 보완하고자 노력했지만 고질병은 어쩔수 없었다.

나는 수학에 대한 기초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한국어를 기반으로 하는 언어라는 영역이..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할줄 몰랏다.

대충 첫모의고사를 공개하자면 언어가 120점 만점에 80점정도 수리가 80점 만점에

65점정도 외국어만 80 그리고 사회/과학탐구가 120만점에 90점정도 나왓다.

310점 후반? 음 나치고는 잘봤다 다른애들도 그 정도일거라 생각했다.

믿을수 없었지만... 몇 일 후에 나온 성적표에서의 반등수는 36/36이엇다....

아직은 오기가 부풀었다. 잘할수 있다고 생각햇다.

나는 영어를 특기자 처럼 잘하는게 아니다.

그래서 영어 특기자로 전향할 마음은 전혀 없었으며

내신에 따라 수시냐 정시냐를 생각해야했다.

그런데... 일을 터뜨려버렸다. 1학년 중간은..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중간고사 성적은 참혹했다.

나의 기초가 없던 수학은..어이없게 50점대를 찍어주고 문학은 70점대 ;;

정말 미,양,가가 수두룩한..열등생의 성적표였다.

우리학교 애들은 정말 공부를 잘했다. 내신은 한달전에 시작한다...

그래서 두주 전에 시작한 기초가 없던 나는 도저히 당할수가 없었다.

성적표가 나온날 뒤에서 내 친구들이 이런대화를 하더라

\"야 우리반 졸라 잘한다... 반등수 장난아닌데?\"

\"와 근데 너 혹시 동물은 있냐?\"

\"동물이 머냐? 혹시 설마 미 이하냐, 야 너 그런것도 있냐?\"

\"아니 그냥 물어본거야 설마 사람이 동물도 있겠냐?\"

내 성적표를 펼쳐보니 동물이 가득하다;;

음메에~~ 집에가도 있다. 헉스..;;

내 내신성적 정말 gg다. 사람이 받을수 있는 내신이 아니다.

1학기가 끝나고 성적표를 보며 할말이 없었다.

머 당연한결지만 내가 쉬엄쉬엄 밤을 안새고 졸리면 자고

그냥 천천히 대비도 안하고 시험공부를 한 탓도 있고

우리학교애들이 원래 중학교때부터 내신이라는

시스템에 익숙한 ㅚ수들이라는 점도 있었다.

또 나는 아직 중학교때의 공부패턴을 버리지 못하고 집중을 잘 못했다.

책상에 앉으면 딴생각이 나기 마련이고 3시간 공부했는데

공부량은 실제로는 30분어치정도 밖에 안됐다.

그것도 그렇지만 정말 같은과 같은학교 애들이 너무 잘했다.

고질병인 수학, 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언어  

내신대비할때 외우다가 어려워서 벽에 부딧히는 사탐과 과탐...

공부가 정말 어려웠다.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에 도피하듯 학교에서 가는 해외연수를 갔다왔다.

내가 미쳤었지... 격차는 더 벌려졌다....;;;;;; 도저히 따라갈수가 없었다...

정말 나는 열등생이었다...;; 담임선생님한테 호통을 받아도 정말 할말이 없는

모의고사때나 내신때나 반평균을 깎아먹는 열등생이었다...;;

그나마 잘하는 영어도 갈수록 해외거주자가 많아졌기 때문에..

수시를 노려볼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깜깜햇다. 자퇴도 생각했다.

근데 자퇴하면 공부 잘할수 있겠나?

그 당시 학교를 자퇴하는 사람들은 서울대를 목표로 하되

내신은 안 나오고 수능은 잘 나오는 애들이었다.

나는 수능도 내신도 바닥을 깔아주고 있으니 케이스가 다르다.

게다가 학교를 자퇴하면 절대 자기컨트롤을 못할것 같았다. 학교는 재미있었다.

정말 내가 성적상으로는 정말 안 좋고 내신 핸디캡이 엄청나지만..

차라리 이학교에 다니는게 나을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 선택은 현명했다.

부모님들은 점점 화가 나셨다. 그리고 나에게 야단치는 일도 잦아지셨다.

나는 그런 부모님들때문에 그냥 독서실에 간다고 나오기 쉽상이었다.

그러나 독서실은 잠을자는 곳이었고..그저 말그대로 공부가 아닌 독서,

아니면 만화책 읽기로 시반을 허비했기에 귀한시간을 잃어버린 나는..

점점 격차를 따라갈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1학년이 끝나갔다.


3) 고1 겨울나기


겨울은 그렇게 찾아왔다.

격차를 벌릴수 없었던 1학년

정말 무의미하게 겨울방학도 학원은 다녔지만...

학교에 따라 배정된 학원반은... 내겐 너무 수준이 높았고...

다시한번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따라잡을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했다.

대책이 없었다. 수학은 정말 기본부터 차근차근.. 감각이 전혀 없는 언어는...

정말 진짜 기초부터 거북이처럼 차근차근...

이제 문과를 택하게 된 나는 그나마 과탐에 비해 나았던 사회탐구를 선택하며

초딩때의 의사의 꿈을 버리면서 조금이나마.. 나은 출발을 하게 되었다.

겨울방핚때 정말 많은 언어학원을 찾았다.한 언어학원을 3개를 옮겼다.

그런데 난감한건..

2학년에 올라가므로 2학년에 맞춰서 가르치므로 쉬운반에 들어가면...

쉬운것 같은데..

언어문제 풀어보면 정말 점수는 50점대까지 나오고;;

어려운반은..너무 어려워서 못듣겠고 정말 고생했다.

언어영역은 정.말... 어려웠다...

어떻게 친구들이 답을 잘할수 있나 정말 궁금했다.

중학교때 부터 축적되 온 노하우가 그들의 고득점의 비결이었다.

공부를 잘했던 사람이 당연히 계속 잘한다. 당연한거다.

1학년때 단 한번...모의고사 언어영역에서 100점을 넘어 본적이있다.

굉장히 쉬운 모의고사였는데 108점이었다. 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좋아햇다.

그러나.... 반평균이 113이었다... 언어 반 백분위가 4프로였다.. -_-..

내 뒤에 한명 있다는 소리다..;;

학교평균도 113이었다. 보고 바로 쓰러졌다... -_-;;gg 이럴수가;;;;;

수학은 사촌누나가 중학교 선생이 되는데 가르쳐줄만 하겠지 하고

엄마가 과외를 요청했다. 누나의 교습법은 훌륭했다.

하지만 그 학생은 정말 구제 불능이었다.

외고 준비할때 정석을 풀기는 풀었다...

그런데...정말 기초가 안되있는것 처럼 누나의 진도에 맞춰서 하는데도

너무 어려웠다....예제도 못풀었다... 허구한날 질려서 잡담이었다.

그래도 고2때 할만큼 끝내긴 끝냈다.

이제 수1이란 책을 조금 배우다 보니 겨울방학이 끝났다...

그래도 누나는 수1을 다 끝내 주긴 끝내줬다.

그리고.. 나는 다른 과외 선생님을 알아봐야했다...

나는 너무 게을렀다. 수학의 계산과정이 싫었고 공식들이 너무 싫었다.

수학의 반복해서 풀기가 너무 짜증났다.

정석을 한번 돌렸으나 기초는 아직 부족했다.

과외선생님의 주입에 의존하는 수학공부는 계속 반복되었다.

이런 과외선생님에 대한 의존은 고3 끝날때까지 계속된다.

과외선생님은 매년 바꼈지만 공부패턴은 똑같았다.


4) 운명의 장난, 운이 없는건가?


이제 2학년이 시작됐다.

역시나... 고2는 이제 문과로서 기본을 다져가면서

앞으로 수험생을 대비하는 파트기에.. 더 공부는 어려워졌다.

=+=.... 자퇴를 왜안했나 싶을정도로...수업이 어려웠다..

그래도 다른건 할만햇는데..

언어는 들을때는 모르니까.... -_-

수학은 정말.... 선생님께서도 어렵게 가르치시지만..

정말 모를것 같았다... 그런 악순환이 계속된채 그렇게 4월이 다가왔다...

운명의 장난이었다.

그날이 만우절이었을거다. 정말 거짓말같았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뇌수막하출혈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학교를 하루쉬고..아버지가 계시는 진주까지 비행기를 급히 타고 갔다.

그때까지는 괜찮으셨다.

비록 말은 못하시고 눈을 감고 계셨지만 나머지는 정상이셨다.

어머니는 그곳에 계속 남아계셨다.

그렇게 2일이 흐르고 어머니는 다시 올라오셨다...

왠걸.. 3일후 아버지 견강이 더 악화됐다고 연락이 왔다...

급하게 와보니 아버지 상태가 저번과는 다르지 않았는데...

뇌압이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점심에는 멀쩡하셨다.

그래서 안심하고 입원실 밖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그날 아버지는 뇌사 판정을 받으셨고 그 다음날 아침 돌아가셨다.

뇌사 판정을 의사에게 듣는 순간... 욱하고 치밀었다...

이 멍청한 의사는 도대체 환자를 어떻게 방치하고

이 지방병원이 시설이 어떻길래 고난이도의 수술을 할수가 없어서

서울에서는 병원만 가면 산다는 뇌수막하출혈에 아버지가 결국은 뇌사를 하셨을까

억울하고 화가 났다.

정말 마음을 가다듬고.. 의사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확률상 뇌사 상태면 살아나는 경우도 가끔씩 있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말은..거의 가망이 없다는 소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그날 새벽 나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정말 한없이 울었다.

정말 억울했다.

일주일 전까지 정상이고 공부열심히 하라고 독서실도 가면서 자다가

피방으로 향한 아들을 맛난것 까지 사주신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것도 지방에 계셔서 병원 수술도 제대로 못받으시고 돌아가시다니

졸지에 18세에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장례식을 준비해야되었다...

친척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가족을 위로했다.

정말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제 뇌사 판정 받고나서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안흘리려고 노력햇는데

펑펑울고 오늘도 울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회사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게 되셨다.

우리가 이집트에 가있었을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한국에 가셔서 장례식을 치르셨었다.

나는 장례식은 그렇게 나이드신 분들이 치르는 줄 알았다.

상주는 정말 힘들었다.수많은 손님들 그리고 위로해주시는 분들이 있었으나

정말 가슴이 찟어졌다. 상복을 입고 예를 치르고... 지쳐갔다.

그래도 친지분들이 좋은 분들이라 힘을 낼수 있었다.

그렇게 장례를 꼬박 5일을 했다.

마지막날 내가 첫삽을 푸고 묘지를 완성하기까지 바라보는게

그렇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게 그렇게 긴 공허한 시간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절을 올리고 시골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버지 무덤앞에서

나는 다짐을 했다.

못난 아들.. 열등생이지만.. 꼭 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지금은 인서울도 못하는 실력이다만.

일단 내가 할수 있는게 공부니까 공부를 해서 대학을 제대로 가겠다고........



5) 정신을 차렸지만 어느덧 D카운트 다운의 시작


다행히 내가 막노동을 해야하며 학교를 그만둬야하는

상상속의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돈을 벌어야하거나 어머니께서 돈을 벌으러 나가셔야하는

그런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아버지가 없는 자식이기에 마음가짐도 달라야했다.

근 1달동안은...정말 별로 웃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냥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면서 중간고사 기간을 보냈고

성적은 1학년때나 다를게 없었다. 정말 좋은 담임선생님과 친구들..

그러나... 힘들었다. 세월이 지나자.. 이제 점차 내마음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반아이들과의 성적격차는 더 벌려지고 있었다.

괜히 꼴지가 아니다... 계속이다 -_-... 마음은 안정을 찾았으나...

학원은 다니되 의지가 점점 없어졌다.

대학 왜 가냐 싶었다. 게임에 미쳤고.. 공부하기 정말 싫었다.

인생이 허무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게 즐거울뿐 그 뿐이었다.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극단적으로 살았지만.. 그래도 밖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학교내에서도 나랑 자주보는 다른과 녀석들 조차

내가 왜 몇일동안 결석을 한 이유를 모르며 내가 활발히 내색을 안했기에

이녀석이 정말 힘든건지 전혀 몰랐다.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이제 수능 대비를 해야했다.

그러나 나는 1학년 후반 부터 다녔던 텝스 서울대 대비반을 전형이 바뀐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영어 향상을 핑계로 계속 다니고 있었다.

솔직히 그 전형이 있었어도 내가 서울대를 가는건 정말 힘들었다.

나는 그런 영어 특기자가 아니니까..

그래도 실력향상을 위해 여름방학까지만 다녔다.

다만... 인생의 전환점을 찾지 못한 나는 그 중요한 학원을 거의 매번 빼먹었다.

게임하는게 그냥 편안했고 공부가 싫었다...

다시 자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수학과외를 매달 받으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했으나 하기가 싫었고

그냥 희지부지 하다가 언어와 영어 그리고 사탐학원만 다니게 되었다.

이때 사탐을 처음 시작했는데.. 국사/한국지리/경제를 들었지만...

아직은 무리였다.

그냥 나중엔 어차피 들어도 잊어먹는거 수업시간에 졸때가 많았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끝나고 고2 2학기 중간 기말을 봤다.

머 결과는 뻔했고 모의고사는 결과도 뻔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내신도 평균을 몇점 깎아먹고 수능모의도 마찬가지..길이 없어보였다..

격차는 아직도 크다.

언어영역은 이제 조금 감이 잡혀오는듯 했지만 머랄까 이상했다.

점수는 1학년때랑 비슷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는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모의고사마다 새로웠다.

그러기에 더욱 혼란은 가중됐다.

최소 사탐을 2과목을 선택해야 하는데 학교에서 배운 국사 한국지리 경제중

자신있거나 한번이라도 제대로 훑어본 과목이 없었다.

수리영역은 어떻게 운좋게 찍어서 3등급후반이나 4등급을 찍을뿐 아는게 없었다.

그리고 나는 워크래프트라는 게임에 너무 미쳤었다.

그냥 워크래프트 국내리그 해외리그에 미쳤었다.

매일매일 방송만 보고 전략 연구하느라 정신없었다.

주말은 그냥 게임하는 날들이었다. 너무 공부를 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의 도피처가 필요했던것 같다.

그냥 이대로 게이머가 되어서 잘되면 프로게이머 해볼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도 생각했다. 어느덧 04 수능은 끝났고 D카운트 다운은 시작됏다.



6) 악순환의 계속 고3 같지 않은 고3


이렇게 가다간 완전 꼴통이 될뿐만 아니라 인서울은 꿈도 못꿀것 같았다.

솔직히 2학년까지의 내신으로는 갈수 있는대학은 없었다.

평점 2점 초반인데 어딜가나. 정시도 불가능이었다. 거의 정말적이었다.

다행히 우리학교학생에게는 외국어고교 동일계 지원

그러니까 인문계에 한해서만 수능점수에 비례하는 비교내신이 부여되었다.

행운이었다.

솔직히 비교내신이 없으면 우리학교 학생들은 내신이 중간에서 조금 밑이면

대학진학에 어려움이 따를 핸디캡이 적용되었다.

그러기에 문과보다 많은 이과는.. 정말 힘들었다. 비교내신이 없기에...

나는 고2겨울방학에 역전 드라마를 위해 종로학원 종합반을 등록했다.

그러나..선택 미스였다.. 재미가 너무 없었다.

반애들은 끼리끼리 놀고 밥먹을 사람은 없고 정말 심심했다.

원래 사람은 외로운 동물이다.

왜 가까운 학원에 친구들이랑 같이가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같이 갈수 없었다.나랑 그들의 성적격차는 현재 엄청났다.

그러기에 나는 그들과는 다른과정을 거쳐야했다.

그게 친구들과 고2때 종합반을 안다닌 가장 큰 이유다.

그러나 야심차게 혼자갔던 학원을 월~금요일날 가는 종합반을...가는건 잠시..

10일정도? 성실히 다니다..정말 회의감을 느꼈다. 한 35일 코스였는데

그뒤 20일은 8교시중 4교시듣고 4교시는 안듣고 나오고 나중에는 아예 안갔다.

수학수업이 너무 어려웠다. 영어는 안듣는게 나았다.

언어는 듣기 좋고 맘에 들었다.

그러나...나는 게임의 폐인이었나 보다.. 매일 5시간 이상 게임을했다.

수험생이 아니라..게이머였다.

어머니도 슬슬 걱정을 하셨다. 너 학원 성실히 안다니는것 같다고

음... 수능에대한 자신감은 나는 충만했다. 그래서 더 놀고 싶었다.

하지만 기초가 없었다. 1,2학년때 확실한 공사가 없었다.

이제 고3이 시작되면서 그 대가가 어떤건지 보게된다.

말 그대로 나는 기초가 없었다. 기초공사가 튼실해야 위로 갈수 있는것이다.

나는 씨내필이었다.

씨내필이 머냐..  x발 / 내신 / 필요없다.

라는걸 표어로 삼고 문과에서는 외국어고교 동일계 비교내신으로 내신핸디캡이 없

는 고대를 노리거나 이과에서는 포공을 노리는 그런그룹이 있었다.;;(이걸 쓰다니

난 한마디로. 미쳤다 -_-;;;;;)

우리 씨내필들은 모의고사 점수로 내신의 언밸런스를 커버하고자 했다.

실제로 씨내필의 선두주자는 모의고사는 480으로 반에서 3등권까지 맞지만

내신은 gg인 이상현상까지 보여줬다.

내신 왜 공부하냐 수능이 최고다가 우리의 모토였다.

x발 씨내필은 내신공부할시간 심지어 시험기간에도 수능에 올인이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내신공부도 안하고

수능공부도 노느라 별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일단 중학교와 고등학교때 기초공사를 잘해논 다른 씨내필들과

나는 확연히 달랐다.

일단 시작부터 불안했던것이다. 거의 백지나 다름없으니까

(씨내필도 기초공사가 없는편이긴 하다 내신을 버렸다는건

1,2학년 공부도 안했다는 소리니까)

첫 모의고사가 가까워졌다. 선생님들께서는 첫 모의고사가 수능까지 간다고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하셨다. 그래 신경을 써야지..그러나...

앞에 말한것 같이 반평균 깎아먹고 기초도 없는인간이

그냥 신경을 쓴다고 되는 일이아니다.

이번엔 양심적으로 시험기간에도 밤샌적은 없거니와

한번도 책을 펴보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 내가.

모의고사를 대비하여 정말 겨울방학때 손놓았던 공부를 조금씩 햇다.

하루에한 4~5시간. 수학을 중점적으로 풀었다.

언어는 음.. 언어는 내가 3학년때는 쿠쿠피아라는 사이트로 수업을 들었다.

워낙 실력이 없으니 학원가도 소용없고 모든강의를 들을수 있는 세트가 있는

좋은 사이트를 찾아 언어를 공부하는게 내 목표였다.

하루에 1시간정도 들었는데 학교에서 집에도착하면 11시 거기다가

강의 들으면 12시 이랬다. 고3 때의 내시간표는 대충 이랬다.

6시 기상
6:30~7:00  스쿨버스에서 잠
7시~12시 학교수업 대게 자거나 수업시간에 수학품
12시~13시 점심 논다.
13시~17시 수업시간 대게 역시 자거나 수학을 푼다. 그러나 뒷수업에 탐구가 많아서
               열심히 듣는경우가 더 많았다. 수학보단 사탐을 더 공부
17시~18시 자습.. 그냥 머든 푼다.
18시~19시 저녁
19시~22시 자습을 학교에서 해야하지만 도망 피리방 -_-
22시~23시 집에가는길
23시~그이후 대게 24시까지 언어 동영상 시청

잠을 하루에 한 10시간을 잤다. 정말 속편한 수험생이었다.
어차피 망한내신 그시간에 졸린잠을 보충하거나 수학을 풀었다. 근데 이때는 수업시간에 풀면은 한시
간에 2문제 풀까 말까였다. 정말 나의 수학기본기는 없었다.
선생님들께 정말 죄송하다. 수업은 안듣지 평균은 깎아먹지 그래도 내가 정말 희한한게자신감이 넘쳤다.
올해의 목표를 고대 경영이나 국제학부로 삼았고 갈수 있다고 생각했다. 2학년때의 모의고사는 이제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3월 모의고사를 보았다.
결과는 처참했다. 참고로 나는 고3때부터 모든 점수기록을 다이어리에 저장했다. 그리고 결과가 여기 있다. 이제부터 나의 점수 표본이 다이어리에 있는데로 올라갈것이다.
이것이 이 수기를 보는 여러분에게 보기 편하고 이 성적표를 토대로 내가 다이어리에 적어논 공부 수
정방식을 수기에 적을것이다. 일단 3월 모의고사는 이렇다.

언어 67/80% 수리 62/93% 외국어 100/100%
한지 48/근현 43/경제 43/국사 38 사탐 백분위 90
총점 401  

전국 6.5프로로 나왔다. 평균을 더럽게 깎아먹었다. 그런데 사탐에서 의외로 선전했다. 수리도 2등급으로 고정됐다.12월에 보았던 모의고사 보다 30점 정도 오른점수이다.
하지만 난이도가 더 쉬웠다.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할점. 교육청 모의고사의 백분위를 믿어서는 안된다. 후의 사설 모의고사 그리고 KICE 수능 모의를 쳐보고 뼈저리게 느낀거다.
내가 이제 확실히 어느 영역이 펑크인지는 알았다. 그래서 보강해야할 영역에 대한 집중이 필요햇다. 특히 소홀히한 언어를 강화해야했다. 어머니에게 학원 아예 안다니고 내가 한다고 말씀을 드렸었다.
그때의 자신감과 포부를 이어 나가야했다. 나는 할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이상만 넘고 자신감만 넘쳤다. 게을렀다. 나는 너무 잠이 많았다. 아까도 말했듯 하루에 10시간 정도 잤다.
그리고 12시간 이상 잘때도 있었다. 그냥 수험생이 아니었다.게다가 하루에 자습땡땡이치고 게임하고 토일요일은 수학학원을 빼고는 거의 공부안하고 게임만하거나 자니..
공부할시간이 절대적으로 없는건 당연한일. 워크래프트 아이디가 어느덧 고2수능끝나고 새로 만든게.. 게임수가 1000판이 넘어갓다. 게임은 나의 도피의 공간이었다.
4월 5월 6월 내신기간에도 수능을 공부했다. 그래 내신을 포기했으면 수능공부라도 열심히 했어야한다. 그러나 사람의 습성이란게 버리기 어렵다. 너무 놀았고 공부는 정말 안했다. 다른애들 공부로 매일을 버닝하고 있을때 그냥 잤다.  

2004.3.26/서울시   /401 전국 6.5%
2004.4.20/경기도   /352 전국 15%
2004.5.25/중앙      /364 전국 13%
2004.6.01/KICE     /371 전국 14%
2004.6.24/중앙      /324 전국 27%

계속적으로 하향곡선을 쳤다. 특히 6월의 수능 모의평가는 나에게 주는 충격이 컷다. 난 그전날까지도 450은 넘겠다고 생각햇다. 너무 자신감과 목표만 컸다.
예상보다 떨어진점수... 언수 4등급 외국어만 1등급 사탐 5/3/2/2 이걸 누가 외고생 성적표라고 하겟는가.. 담임선생님도 걱정이 많으셨다. 그래 열심히 해보자..이렇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그러나 독서실에 있을때면 오르비질하고 게임에 미치고 수험생인데도 하고싶은데로 사니 공부를 할리가 없을수 밖에..7월에 나온 성적표는 가관이었다.나는 원래 아무리 성적이 나빠도 채점은 한다.
그리고 6월의 그날 한숨만 나왔다. 그후로는 정말 공부를 안했다.수능 모의평가를 잡친것도 있지만 이건 더 심했다. 완전 슬럼프에 빠진것 같았다. 아니 원래 잘한적도 없지만 그거보다 더 심했다.
정말 빡세게 게임과 모든 놀것과 안녕하고 워크와 카오스는 이제 그만 해야했다. 공부에만 전념해야했다.
게다가 난 기본이 없기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방법을 택해야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반친구들이 절대 삽질이라고 하지말라고 했던 그들과는 전혀 다른 여름방학특훈을 나는 하였다. 뒤집기를 노리는거였다.


7) 점수 뒤집기


6월 KICE 수능 모의평가가 끝나고 나서 내가 대개 한짓은 내 내신점수로 서울대 법대를 들어갈수 있는지의 추측이었다. 오르비를 토대로 한 점수들 정말 ㅚ수 점수가 많았다. 이걸로 서울대 점수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파악했다. 그결과 내내신을 극복하려면 서울대 법대가 465점으로 컷이 잡아졌을때
약 493~497점을 맞아야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건 그냥 전국 수석 급이다. 불가능하다. 6월말의 324점을 찍을때 나의 전국 백분위는 27프로였다. 게다가 나는 우리학교창립이래에 말도 안되는 내신을 가진 정시 준비생이 등장할거라는걸 확신했다. (우리학교에서는 내신을 버리는 애들은 영어특기자전형 준비자나 재외국빈 전형준비자들아다.) 지금 패턴대로 간다면 서울대 시스템 상으로는 5점이나 깎이는 열등생의 등장은 물보듯 뻔했다. 나는 전국 27프로에 인서울은 커녕 지방의 명문대도 불가능했지만 나의 목표는 고대였고 나의 꿈은 서울대를 기적처럼 들어가기 였다. 꿈이 너무 높았다. 내가 특훈을 위해 선택한 곳은 기숙학원이었다.

기숙학원을 간다고 하니 친구들 대부분이 기숙학원을 왜가냐 망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내가 얼마나 못하는지는 내가 점수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알리가 없었다. 당연하다. 학교의 명예에 금이 갈정도의 열등생이 점수를 밝힐리 없지 않은가. 나는 남들이 안해본 짓에 도전한다. 하루에 공부를 2시간도 안하던 야매 수험생이 하고싶은것을 다 못하고 오로지 공부만 하는 기숙학원으로 떠났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기숙학원이었다. 시설 정말 안좋았다. 특히 취침시설.. 그래도 공부할만했다. 6시 기상에 2시 취침 원래 취침시간은 12시 였으나 매일같이 야자를 했다. 갑자기 미쳤었다. 내가 잠이 좀 많았지만 하루에 6~7시간정도 밖엔 안잤다. 미친듯이 공부만 했다. 지금까지 공부하는 방법은 다 헛된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공부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코피한번 평생 난적 없이 공부를 했으니 코피 한번 나보자 하는 심정으로 집중해서 공부했다.

수업은 영어 빼고는 다들었다. 퇴소가 10일 남은 때부터는 사탐 빼고는 다 안듣고 혼자 자습을했다.
수업을 듣는 의미가 별로 없었다. 기숙학원을 어머니가 보낸게 아니라 나의 의지로 결정을 했고
거기온 애들의 대부분은 부모의 압력에 끌려온것이기에 별로 공부할 마음도 없었고 몇일 다니다 결국은 나간 애들도 많았다. 나는 내 목표를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옳해 가고 싶었다. 내가 재수를 한다면 결과는 뻔해보였다.계속 놀다가 9월쯤 가서 쥐쥐때리고  비교내신 받아 삼수로 서울대 노리자 이 생각을 할거라고 확신을 했다. 올해 가야했다.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다. 위기는 사람을 더 강하게 하나보다. 책상에서는 앉으면 다섯시간 앉아도 한시간도 집중할수 없었던 일주일 전과는 달리.
한번도 풀어본적이 없는 EBS언어영역과 수학 언어 3권과 수학 2권 다풀었다. 수학은 정석을 예제만 공통수학 수1 한번 다 풀어보고 오답노트를 만들면서 틀렸던 것을 계속 점검하였다. 가져왓던 학습지를 체크하였다. 영어시간을 안듣고 수학만 풀기에 1시간에 2문제도 풀던 내가 점점 속도가 붙었다. 언어영역도 닥치는대로 했다. 그결과 30쪽도 못풀었던 자이스토리 비문학과 문학...  다풀어버렸다.
한번도 다안봤던 사탐 기본서들도 다봤다. 국사는 교과서를 한번 독파 완료했고 한국지리 근현대사는 기본서인 누드교과서 독파 가져왔던 학습지 문제집 전권 독파 경제는 누드교과서 한번 다 읽고 문제집 가져온걸 다 풀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나고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게임과 만화를 봣지만 하루에 5시간정도 공부를 해줬다. 수학을 매일 풀어주고 언어를 매일 강의를 들어주고 사탐을 조금씩봤다. 기숙학원 가기 전까진 나는 수학오답노트를 만들기는 만들되 수학 틀린문제 오리고 답지 오리고 이런 성의 없는 식이었다. 그러나 기숙학원에서 자습하면서 수학에 올인할때는 문제는 오리되 답은 내가 직접손으로 썼다. 고3초반까지 나는 눈으로 푸는데 익숙하였다. 그래서 기본이 모자라는건 둘째치고 계산실수가 너무 많았다. 시간이 모잘라서 찍어서 푸는 문제도 많았고 그러나 수학은 손으로 푸는 거였다. 계속 해보니 점점 빠라졌다. 그러나 아직 못푸는 문제가 너무 많았고 공통수학부분은 아직도 너무 약하고 수1도 그나마 보완한거지 한달공부로 보완된거 같지는 않았다. 도착 일주일후 시험을 봤다 이상하게 잘풀리고... 모르는건 찍었는데 정말 많이 찍었다. 기적이란게 있었다. 채점하고 나서 어이가 없었다..

언어 91 1등급 수리 81 2등급 영어 100 1등급
사탐 국사 44/한국지리 50/근현대사 50/경제 47 사탐 1등급
총점 463 전국 백분위 0.7
정말 잘찍었나 보다. 두달만에 140점이 올라버렸다. 캐뽀록이었다.


8) 자만 그리고 05 수능의 실패


8월말의 모의고사는 정말 잘봤다. 정말 잘찍었었다. 반에서 소문이 났다. 100점이 올라갔다고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머 그런거다. 열심히 하는데 점수가 안올랐던 아이들 내가 맨날 자습 시작하자마자 피방에 가는걸 아는 아이들은 좌절을 했다.고3때 담임선생님께 정말 죄송하다. 자습 일지에는 거기 있었다고 기록이 되는데 나는 피방에 있거나 놀러갔으니...열심히 했어야하는데 ㅜ.ㅜ 반평균을 몇점을 깎아먹는놈이.. 내가 꿈으로만 생각하던 과들이 꿈 아니었다.현실이었다. 그것은 자만이었다. 이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미쳤었다. 모의고사는 모의고사 일뿐이었다. 차라리 그 모의고사를 최저점을 맞았으면 공부를 더했을것이다. 책한번을 안잡았다. 게임하고 놀고 잤다.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올해 입시는 나의것이라는 자신감만 있었고 쌓았던 실력은 다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9월 수능 모의평가.

언어 74 4등급 수리 49 4등급 영어 98 1등급
사탐 국사 42/한국지리 41/그현대사 45/경제 39 5/4/3/3(종합이 없음..) 총점 378
전국 백분위 추정이 불가능 했다.

어이가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사실 8월거는 개뽀록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번시험은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공부를 조금씩 했다.
그런데 이번엔 점점 수능이 다가와서 인지 공부가 손에 안잡혔다.
9월당시 나는 4점깨부시기라는 수학 문제집을 풀었는데
도저히 내수준의 문제집이 아니었다. 그리고 언어영역 문제집은 많이 풀었으나
점점 90분안에 풀지 못할정도로 언어 문제 푸는 속도가 느려졌다.
9월 모의때는 뒤의 지문 2개를 못풀고 찍었다. 그다음의 모의고사들도 패턴은 마찬가지였다.
사탐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니 걱정이 많았다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수학을 업그레이드를 시켜야하는데 학원선생은 의지할수가 없었다. 내가 해야했다.
그러나 난감했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정석은 돌릴수 없었다. 공부를 하든 말든 그만일것 같았다.
피같은 자습시간에 그냥 피시방에 가서 시간을 때웠다. 올해 갈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으나
말그대로 자신감 이상은 높았다. 8월 모의고사에서 딱 받은 판정 고경 갈수 있다 였다.
공부는 안했다. 기숙학원에서의 수련은 점점 말짱꽝이 되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10월의 모의고사는 더 과간이었다. 수리가 계속 3등급이 나와줬다.
언어는 5등급에서 4등급을 왔다 갔다 거렸다. 영어를 다맞거나 하나 틀려도..
사탐이 거의다 4등급이니 할말이 없었다. 정말 나는 반평균을 깎아먹는 존재였다.
그러나 자신감은 있었다. 그래도 갈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해쳐나가는게
나의길이라 생각했다. 다이어리를 보면서 나는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 전국 10프로 밖을 찍고 있지만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2004.9.16/KICE     /378
2004.10.13/서울시 /375
2004.10.31/중앙    /402  전국 10%
2004.11.02/종로    /379  전국 27%

마지막 모의고사를 괜히 봤다. 점수가 뚝 떨어졌다.
버스정류장에서 학원에서 차를 기다리면서
그 모의고사를 채점하고 나서 얼마나 허무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허무함은 하루만에 없어지고 수능이 가까워지자 자신감이 더해졌다.
보통 수능이 가까워지거나 큰시험이 가까워지면 초조해져서 본실력보다
시험을 망치는 케이스가 많았다. 그건 수기에서 이미 몇십차례 보던 내용들이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일단 아쉽더라도 지금 실력으로 최선을 다하고 할수있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나는 모의고사는 모의고사일뿐 수능에서 대반전을 일으킬수 있다고 믿었다.
평소에 하던대로 게임 하루에 5시간에 카오스라는 유즈맵 게임에 미쳤었다.
잠은 마니자니 과연 대반전을 일으킬수 있을지 내 마음속에 요동쳤다.
그래도 정말 재수는 하기 싫었다. 실패가 뻔했다.
수능을 일주일 남기고 그래도 공부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작심삼일
마지막 4일동안은 풀기도 싫고 만지기도 싫어졌다.
오히려 부정이 탈것 같았다. 나를 믿었다. 공부는 별로 안했지만
3년간 축적했고 그동안 조금씩 쌓아온 기본기들을 믿었다.
할수 있다고 믿었다. 어느덧 11월 17일이 되었다.
수능날.. 별로 두렵지 않았다.
보통 두렵다고 잠도 못자고 밤새는 사람들이 있다.
수능 전날 참 잘잤다. 내일의 대박을 꿈꾸며....
자신이 있었다. 반전을 노렸다.
언어 쉬웠다. 수리 쉬웠다.영어 쉬웠다.사탐 쉬웠다. 제2외국어 다맞는게 당연하다.
....
쉬운줄 알았다.
과 친구들 사이에서 문자가 돌았다. 결과는 대충 알려졌다.
05수능은 점수 인플레가 심했다.이렇게 쉽게 나올줄은 몰랐다.
사실 채점하기 전에 피시방에서 채점하던 친한친구가 479가 떴다.
당연히 나도 잘봤으니 그 점수대가 뜨겠지 이렇게 생각햇다.
언어는 감은 좋았다. 91점.. 나름대로 선방이었으나 한지문에서 7점이나 나간게 아쉬웠다.
그런데... 수학의 수많은 계산실수... 90점대로 예상했던 수학은 미끄러졌다.
그리고 나는 사탐이 에러였다. 공부를 안한 당연한 대가이다.

언어 91 93% 수학 73 87% 영어 98 100%
국사 39 5등급 한지 42 5등급 근현 48 1등급 경제 45 3등급
총점 434

5등급대를 찍어주던 언어는 반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수학은 계산실수가 너무 많았다.
갑자기 눈이 아파서 안경을 벗고 눈으로 푼게 실수 였다. 손으로 풀지 않았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사탐은 원래 대비가 안됐었고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원서를 써야했다. 오르비질을 열심히 했다.
전국 백분위 6.5~7.4%
인서울은 가능했으나 갈만한 곳은 없었다. 나의 이상은 고대 였는데.아쉽게도 못가게 됐다.
재수를 해야했다. 재수는 하기 싫었다. 나는 수능을 대비한다는게 싫었다. 놀고 싶었다.
그동안 오르비에서 축적해논 데이타를 분석했다.
그리고 쓸대학을 결정했다. 가군은 고대 경영이 배치표상으로 고평가 되고
작년에 빡샜기에 올해 왠지 펑크의 기운이 돌았다. 지원자들이 이상하게 다 강했다.
내점수로 감히 가군은 고경을 질렀다. 논술대박을 노리는 거다.
나군은 외대 국제학부를 썼다. 그냥 나의 점수를 특화할수 있는 과였다.
영어가 2.5배니 할말 다한거다. 다군은 머 점수 맞춰서 썼다.
논술대박을 노렸으나 사실은 거의 포기하고 논술학원은 다니지도 않았다.
1승 1무 1패
고경이 펑크는 났다. 그러나 뒤집을수는 없었다. 대기 197번..논술에서 나름대로 호투했다. 내뒤에 200명이니 할말 다한거다. 하지만 딱 볼때 많이가야 80번이었다.
고대에대한 꿈을 접었다. 그리고 면접에서 재수좋게 종교에 대한 견해를 설명할수 있는 지문이 나와
이슬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털어놓고 좋은 이미지를 심어 영어면접에서 뒤집기가 가능했던
외대로 진학했다. 최초합격 되었다.
그래도 재때 대학을 갈수 있다는게 기뻤다. 그렇게 05년도 입시는 끝났다.


9) 반수생 추가


그러나 나의 꿈중에 하나가 수기쓰기였다.
그런데 만약에 05때 합격해서 끝났다면 물론 수기는 없었다. 전해줄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ㅚ수분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야매 수험생은 운좋게 대학에 합격하고도
높은이상을 버리지 않았다.처음에는 그냥 학교를 다니려고 했다.
솔직히 내 수능점수로 갈수 있는 학교는 아니었다. 면접 뒤집기였다. 영어로 수업하고
제2외국어 제 3외국어수업도 다양하고 외국인 교수가 우리를 담당한다는게 좋았다.
그러나 나의 이상은 높았다. 그런데 공부하기는 귀찮았다
결국 현실과 타협하여 그냥 다니기로 했다. 대학생활 재밌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매일 같이 지내면서 그냥 사는게 즐거웠다.
그러나 내 생각이 바뀐건 고등학교 동기들의 모임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고대의 S모 연애인을 인터뷰한적이 있었다.
그 전부터 내 목표가 고대였지만 확실히 고대를 가려는 마음이 더욱 확실시 되었다.
S모연애인은 삼수끝에 고대를 온 사람이다. 지금의 유명 연애인도 그런 힘든 시절이 있었다.
S모연애인과의 인터뷰 덕분에 나는 더욱더 고대에 목숨걸게 되었다.
정말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학을 잘 갔다. 이과가 대부분 비교내신을 안주고 수능을 망해서 최상위권 5명정도가 5대의대를 가는것을 빼고는 전멸했지만 우리학교의 실적은 정말 말이 안나올정도였다. 친한친구가 서울대를 갔다. 그리고 매일놀던 친구들은 고대에 있었다. 아니면 연대로 나눠갔다. 아니면 의대를 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SKY나 의대를 노리고 재수나 반수를 했다. 나는 내가 지금 내 이상과 얼마나 괴리감이 있는 상태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솔직히 올해 대학에 붙은걸 감지덕지 해야했다. 그러나.. 이렇게 포기하면 내 목표는 어떻게 되는건지 생각했다. 사실 나는 친구들에게 내가 현재 이렇게 안좋은 수능 모의를 받아도 내 목표를 이룰수 있다고 언제나 말했던 인간이고 친구들은 그걸보고 저기 저렇게 점수 잘나오는애도 불안해하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자신감이 있냐 정말 알수없는 자신감이다 하고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수능이 끝나고는 말뿐인 인간이 되었다. 말뿐이기는 싫었다.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내꿈을 이루고 싶었다.인생의 완전한 목표는 아니지만.. 지금 다니고 있는 좋은과 좋은대학..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3월 말경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마지막 5일간은 수업안듣고 도서관에 들어가서 노트북으로 닥치고 카트만 했다. 그냥 수업 듣기도 싫고 카트하면서 생각이나 정리하자고 생각했다. 그래 거의 학업은 포기한거나 다름없었다. 여러 국제학부 동기들의 문자가 왔다. 뭐하느라 수업 안오냐고 집에 있다고 했다. 나는 사실 도서관에서 카트만 하고 있었다.
재수를 하면 실패하면 어떻게 할것인가? 다시 복학을 하거나 삼수를 해야한다. 왠지 나의 의지력과 공부 집중력으론 재수를 하더라도 책상에 앉아서 생각만 하다가 문제는 별로 안풀고 게임이나 하러 피시방으로 가거나 애들이랑 놀러갈거 같았다. 생각을 많이 해야했다. 반수 성공 확률은 통상 거의 15프로이다. 실패할 확률이 몇배나 높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반대도 생각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하는것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할것인가....
3월 30일 카트를 하다가 .. 결심히 섰다. 노트북을 덮었다.이렇게 놀수는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3월 31일부터 재수학원을 알아봤다. 어머니한테는 학교 간다고 아침에 나와서
맨처음 강북종로 부터 가봤다. 솔직히 두려움은 있었다. 나같이 놀기 좋아하고 내신이 안드로메다인 녀석 그리고 아직도 1년 공부해도 기초가 부족한 녀석이 어떻게 목표를 이룰수 있을까 그냥 하더라도 닥치고 복학 아니면 삼수 예정아닌가. 그러나 일단 가는거였다. 등록금이 아까웠다. 그러나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했다. 같은과 사람들한테 미안했다. 나 때문에 들어올수 있었던 한사람이 없어지는 거니까. 고심끝에 4월 1일 나는 거짓말처럼 KNDS를 등록한다.

10) 나태했던 6월까지의 시절

4월에 반수를 시작하는 반수생은 없다. 6월정도에 시작하는게 태반이다 그러기에 나의 05수능 언수외 점수는 KNDS의 컷라인인 385를 겨우 넘는 정도였으나 대기자의 운명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학원을 들어갈수 있었다.
나의 신분은 반수를 가장한 재수생이었다. 돌아갈곳이 있었다 보험이란게 있었다.
그래서 반수 초반엔 정말 공부를 안했다. 극초반엔 올해는 꼭 이룬다는 다짐이있었다.
공부를 할생각이 없었던 망나니 였지만 올해는 꼭 목표를 이루겠다고 생각했다.
들어간 몇일동안은 학원애들과 놀면서도 그래도 열심히 했다.
수업은 어려웠다. 특히 수학은 안드로메다;;;
무슨 외계어를 듣는것도 아니고 이해가 전혀안됐다. 그래도
수업 열심히 듣고 그래도 자습을 나름대로 했다. 그러나 기본기가 없었던
내가 그후에 본 첫모의고사는 거의 패닉 수준이었다.

언어 74 4등급 수학 55 4등급 영어 98 1등급
국사 43 4등급 한지 40 5등급 경제 34 5등급 경제 40 5등급
총점 385 전국 21%

아무리 수능끝나고 공부를 안했다고 하지만 이건 거의 패닉이었다.
성적표를 들고나서 한숨이 나왔다. 이거 잘못생각한거 아닌가.
올해 내가 나온곳이나 지원할수 있는가... KNDS의 수학은 너무 어려웠다.
명강사들의 집합소라지만... -_- 진짜 너무 어려웠다.
100점들을 위한 수업이었다. 정말 전혀 모를것 같았다.
언어영역.. 열심히는 들었다. 그런데 원래 언어라는게 듣는다고 되는게 아니다. 그래서 도는줄 알았다.사탐... 그래도 사탐은 열심히 들었는데 국사는 정말....너무 양이 많았다.그나마 현역때 조금 공부한건 다 날아갔다. 없다....-_-gg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했다. 국사 교과서도 어디갔다.....
국사 자료 있는건 교재랑 누드교과서, 누드교과서 국사를 기본서로한건 나의 실수였다.
그래도 다른 사탐은 꾸준히 연마됐다.
영어는 공부한적이 없다. 15년간 익힌걸 믿었다. 그리고 반수동안 영어공부를 한적은 없다.. 모의고사 3교시 외국어영역시간이 반수때의 외국어 공부시간의 전부이다..;;
그런데 과연 야매 수험생이 반수를 가장한 재수를 한다고 공부를 했을까? 아니다....
며칠은 그래도 잘했다.그러나 점점 수업시간은 모르겟고 결국 수학은 자는시간이 됐다.
자습은 안했다.-_- 그냥 게임하거나 놀러가거나 술마시러 갔다.
3시 40분부터 자습이었는데 매일 몇시간을 놀았는지 모르겠다.
보는 모의고사는 족족 패배했다. 그중에서 대성월례는 압권이었다.

언어 9등급 수학 6등급 영어 1등급
사탐 종합 7등급(전부다 20점대)
총점 305 전국 88%

.. 그냥 보고 OTL이었다.
대성 내에서 전국 백분위가 88%였다. 그래서 전국 모의고사 식으로 하면 그래도 35프로대까지는
갈거라고 생각한다. 6월 모의고사는 그래도 좀 나았다. 그런데 수험생들이 주의할점
교육청 모의평가 등급과 백분위 그리고 6월 수능모의의 등급과 백분위는
조금은 믿어도 되지만 아직은 믿을만한건 아니라는걸 명심할점이다.
차라리 사설모의고사 백분위가 추측하기 더 낫다. 왜냐?
교육청은 현역만 보고 6월 수능모의는 아직 다수의 고3들이 진도를 때지 못한 상태기 때문이다.

6월 수능 모의평가
언어 77 3등급 수리 73 2등급 외궈 92 1등급(OTL 드디어 안하니 점수가 떨어진다.)
국사 27 4등급 한지 38 3등급 근현 31 4등급 경제 38 5등급
총점 376 백분위 추정 불가..

2005.4.14 /대성    /384 전국 21%
2005.5.26/대성월례/305 전국 88%
2005.6.1 /KICE      /376 추정불가

6월 모의고사를 보고 친구들 모임을 가고나서 열심히 생각했다.
반전이 필요했다. 이건 아니었다. KNDS가 최고의 학원이지만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머랄까 수련이 필요했다. 반수인데 이렇게 못하면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11) 기숙학원에서의 수련


6월 모의고사후 5일의 휴일과 다름없는 날이 있었다.6월 6일.
아무래도 KNDS 좋은 학원을 때려치우려면 계기가 필요했다. 집을 나갔다. 그리고 3일간 돌아오지 않았다. 폰을 꺼놓고 찜질방에서 자거나 피시방에 있었다. 그리고 9일이었던가 다시 돌아왔다. 어머니의 야단은 장난이 아니셨다. 그날 나는 학원을 안가겠다고 말했다. 거기 남아있는 교재도 이제 쓰지 않을꺼고 거기 남는다고 수학을 챌수 없을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독학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학은 쉬운게 아니었다. 그리고 수학을 풀때 가르쳐줄 선생님이 없었다.
결국 하다가 지쳐갔고 집에서 독학하는 거였는데 집에서는 하는거라 밖에서 헛짓을 할 틈도 없었다.
그래서 공부를 할만했다. 그러나 지쳐갔고 잠을 잤다. 결국 기숙학원에 가기로 결심을했다.
고3때의 반전 반전을 일으켜준 그곳 강화도에 새로생긴 기숙학원을 찾았다.
그리고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그러니까 5달동안 1000만원을 날려야했지만
어머니께 엄청난 금액을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믿어달라고 했다.
매일 놈팽이처럼 놀고 공부도 안했지만 이제 기회는 한번 뿐이었다. 대학등록금도 버리고 왔는데 질수는 없었다.  강화도에있는 기숙학원에 도착한건 6월 23일이었다.
그때부터 미친듯이 공부를 시작했다. 시설이 참 좋았다. 4인 1실 화장실도 있고 독서실도 엄청 크고
캠퍼스는 광활하고 엄청나게 비싼 값을 했다. 앞으로의 5개월동안을 버틸만 했다.
고등학교 재수친구들에게 KNDS때려치우고 기숙학원을 들어갈때
우려가 좀 있었다.  거의 대부분 \'너는 기숙학원을 들어가면 더 망한다는 거였다.\'
그래 한번 해보자.. 대반전을 이뤄내 주마. 기숙학원에서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혼자서 공부해야했고 정말 열심히 해야했다. 기숙학원 도착해보니 열심히 공부하는 애들도 게중 있었고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편이었다. tv와 인터넷 그리고 컴퓨터가 없다는건 굉장했다.
그러나 갖은 편법은 존재했다. 원래 넉넉한 집안 애들이라 많은 수의 아이들이 PMP혹은 노트북을들고와서 그냥 여가시간을 즐겼다. 독서실에 내려오지는 않고 자습시간에도 그냥 방에 쳐박혀서 노는녀석들이 많았다. 그들은 한달에 3일정도 가는 외출이외에 그냥 개인적인 외출을 즐겼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공부해야한다. 처음에 그런 부류의 인간이 내 독서실 옆자리라 좀 난감했다. 하지만 그쪽에서 알아서 그냥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공부는 가속도가 붙는다. 내가 책상에 붙인 글귀중에 가장 맘에드는건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가장 빠른것이다\' 라는것이었다. 사실 3월에 시작하는 현역과 2월에 시작하는 재수생, 나는 아주 늦은 출발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대 좌절하면 안된다. 혼란을 가져서는 안된다. 일단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그것 역시 수많은 수기의 내용속에서 얻은 거다. 독서실은 자습 2교시(8시 반~10시)후에는 점점 비어갔는데 그래서 더 좋았다. 초반에는 12시이후의 야자에 사람이 많았으나 나중에 가면 12시이후 내려오는 녀석들은 다수가 휴대폰으로 시켜놓은 피자나 통닭을 가방으로 자기방까지 수송하려는 녀석들이다 -_-
아침 7시에 기상해서 새벽 3시에잤다. 그리고 중간에 졸리면 조금잤다. 4~6시간 정도 잤을거다. 게임이 없으니 정말 공부를 많이했다. 기숙학원은 5일만에 적응이됐다. 시설도 좋아서 내집같았다.
선생님들도 괜찮았다. 특히 시스템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건 영어수업에서 빠지고 나서 그냥 수학만 특훈하다가 수학선생님께서 거의 학원내에 상주하시기때문에 정말 많은 문제를 물어볼수 있다는것이다. 그선생님 덕분에 정말 많은 문제를 다시 알수 있었다. 기본부터 착실히 설명해주셨다. 그선생님께서 써준 풀이를 다시 내손으로 오답 노트에 적었다. 하루에 한 10문제 정도 질문했던거 같다. 그 많은 양의 문제를 나한테 풀어주시며 정말 고생하셨다.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지금도 정말정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그럴거다. 머 강화 J학원의 학생이면 K선생님을 잘 찾아가서 수학 많이 문의하길 바란다. 열정적이시고 친절하신 분이라 얼마든지 답변해 주시니까. 그분 덕분에 나중에 수학을 올릴수 있게 된다. 보통 기숙학원에 가면 답답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래 답답은 하다. 캠퍼스가 광활하고 탈선행위도 좀 할수 있고 밀실이나. 원래 속박된 느낌이란게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피자나 통닭도 조그만 옆동네를 통해 몰래 시켜먹을수 있고. 밥도 괜찮읺다. 그리고 공부를 하는 아이들에 대한 제제는 별로 없고 교관선생님께서 편하게 살게 해주셨다. 땡땡이 치는 놈들은 매일 점호시간마다 맞았지만.. 휴가는 한달에 한번 2박 3일이다. 그날엔 밖에나가서 회포를 풀었다.명절날에도 거의 마찬가지 기숙학원에서 집까지 가는데 1시간 반이 걸리니 집에 가고 오는것은 힘들다. 그러기에 왠만하면 휴가를 안갔다. 기숙학원은 5개월동안 나의 집이었다. 그리고 정말 내가 생각해도 지금까지 그렇게 공부한적도 없었다. 쉰날은 없었다. 거의 독서실에 않아 새벽 3시까지 공부했다 인간승리라고 생각됐다. 하루에 반수때도 한시간 공부한적도 없는인간이 이렇게 변할까.
매일매일 다이어리는 공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나는 어떤공부든 시작전 무슨 문제집 무슨과목이렇게 쓰고 시작했다.) 나는 다이어리를 아침/점심/저녁 이렇게 나눠서 30/30/40 이렇게 공부한 점수를 줬는데 거의 평균이 95이상이었다. 흡족했다. 한해를 공부를 하자면 다이어리가 중요한것 같다.
2년동안 월초에는 나의 계획과 목표 그리고 공부방향을 썼고 월말에는 그것을 반성했다.
고3때는 월초는 허황된 무리한 계획의 연속이이고 월말에는 반성만 2장이 넘어갔지만 반수 초반이 아닌 중반 부터는 월초는 할수 있는 계획이 되었고 월말은 잘하고 있으니 잘해나가자는 반성이 대부분이었다. 귀찮을수도 있다. 솔직히 어느과목 어느문제집 몇시간 공부 이런거 쓰고 기상 취침까지 정확히 써내는 나의 다이어리 시스템은 조금 번거로웠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서 나중에 어떻게 공부했는지도 알수 있고 다이어리를 쓰면서 앞으로를 계획 그리고 슬럼프일 경우 전환도 될수 있으니까..
기숙학원에서는 수업을 평일에는 아침 8시부터 5시까지 주말에는 정오12시까지 했다. 나머지는 머 자습시간이다. 나는 시간이 없었고 또 반수생이라 반 애들에게 위화감을 줬다.. 외고출신에 외대가려는 애들도 많은데 외대 휴학 반수생... 그렇기에 그냥 정말 왕따가 되어 혼자가 되어 공부했다. 친해지면 좀.. 소모되는 시간이 많을 듯 했다. 그냥 벽을 쌓았다. 외로웠다. 친한애들은 같은 방 애들 뿐 정말 아는 사람없고 밥을 혼자 먹을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초래한짓이고  이겨내야했다. 정말 올해는 가야했다. 기본기를 익히기 위해 정말 기본부터 시작했다. 언어영역은 일단 EBS의 모든 언어 영역 문제집을 사고 그외의 기본과 종합편만 10권을 샀다. 그리고 하루에 3~4시간씩 풀었다. 계속 풀었다. 그러나 언어점수는 절대 오르지 않았다. 정말 안올랐다. EBS에서 나온 파란색 문제집은 정말 어려웠다. 5문제가 있으면 4문제를 틀렸다. 풀때마다 좌절의 좌절이었다. 나는 틀린문제는 또풀었다. 풀고풀고 또 풀었다. 그런데 언어영역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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