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산 [183208] · MS 2007 · 쪽지

2011-06-09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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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준엽 고려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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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대학에서 선생님들과 술 자리를 하면서, 서울대 총장이 바뀔 때 이런 이야기가 오간 것을 기억합니다.


  "사립대는 돈을 끌어와야 하는 자리니 그렇다치고, 국립대라면 그야말로 총장다운 총장을 세워야 하지 않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키워내면서도, 국가로부터 별로 지원을 못 받는 사립대는 총장이 나서서 돈을 끌어와야 하는 구조입니다. 그렇다고 외국의 사립대학처럼 기여입학제도 허용하지 않고 있으니, 등록금에 크게 의존하고 기업에 손을 벌려야 합니다. 하긴 학생 등록금도 외국 대학에 비하면 여전히 싼 편입니다.


  사립대 총장의 가장 큰 덕목은 바깥에서 돈을 끌어와 학교를 발전시키는 일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금을 퍼붓는 만큼 좋은 대학이 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은, 최근 아시아권 1, 2위로 급부상한 홍콩의 대학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여, 지금도 사립대 총장 자리는, 지성의 사표라기보다는 바깥으로 돌며 돈 끌어들이는,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하겠는데, 이기수 총장의 발언은 전후좌우 사정을 아무리 감안하더라도 고대 총장답지 않은 다소 '경솔'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 비판은 고대 졸업생들 사이에서 훨씬 더 강력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봅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연일 이야기 거리가 될 정도니까.


   사립대 총장은 참 어려운 자리입니다. 특히, 고려대의 경우, 대학의 색깔이 유별나다 보니 처신에 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고대 총장이라는 자리가, 그렇다면 어떤 자리인가?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는 않지만 80년대 초반에 그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자리'라는 답을 쥐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잠깐 언급한 김준엽 총장 재직시에 대학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사립대 총장답게, 재직시절 돈을 끌어와 법대와 정경대 건물을뚝딱 지었습니다. 어느 교직원 출신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서, 월급을 동결해도 아무도 이의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약속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일반 학생이었던 저는 김준엽 총장을 가까이에서 경험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과 관련하여 세 가지 강력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기억에 따르면, 고려대 총장이라는 자리는 모름지기 이러해야 합니다.



  김준엽 선생 : 1982~1985년 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1983년 가을, 연세대와의 정기전이 갑자기 취소되었습니다. 연고전 혹은 고연전은 당시 가장 많은 학생을 '합법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행사였습니다. 학내에서는 십수명만 모여 스크럼을 짜도 경찰에게 단 2~3분만에 제압되곤 하는 그 시절, 수만명이 모여 학교 바깥 거리로 쏟아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행사였으니, 반정부 데모로 연결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것을 학생들보다 더 잘 아는 전두환 정부는, 반정부 분위기가 절정에 오른 1983년 정기전을 취소하게 합니다. 지금은 믿을 수 없는 일이겠으나 당시 정부는,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반발은 당연히 심했습니다. 본관 앞에서 데모를 하다가(사복경찰(일명 짭새)이 교내에 있었어도 반정부 데모가 아니니 막지는 않았습니다), 급기야 학생회관으로 밀려들어가 철야농성에 돌입했습니다.


  26년이나 지난 이야기이니, 쪽팔리지만 다 밝히자면, 저는 당시 가을 시화전을 준비하다가 술을 먹고 서클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어라?, 학생회관 출입문이 완전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출입문을 봉쇄한 바리케이트는 실내에서 책상과 의자, 쓰레기통 등으로 학생들이 쌓아올린 것이었습니다. 불과 2주 전쯤에 서울대의 한 건물에서 농성 데모를 하다가 200여명이 줄줄이 달려간 것을 감안하여 철통같이 쌓아올렸습니다.


  5백명 정도는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기차 놀이를 하는데, 1층부터 4층까지 계단으로 계속 이어졌으니까. 학생회관 내에서, 실외에서는 하지 못했던 반정부 구호도 감히 외쳐보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장기자랑도 하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농민가와 해방가 들을 목이 터져라 부르기는 했지만(저는 실제로 목이 완전히 쉬어서 다음날 말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경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30분마다 한 번씩 학생회관 정면에 설치된 대형 확성기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농성을 해제하라"는 경찰의 협박이 아니라, 김준엽 총장의 목소리였습니다.


  김준엽 총장은 30분마다 한번씩 똑같은 이야기를 짧게 했습니다.


  "학생 제군들, 몸을 다치지 마라. 다치거나 아픈 학생이 있다면 바깥으로 내보내라. 지금 이곳에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다."


  농성을 풀라든가. 반정부 구호는 외치지 말라든가 하는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던 우리는 김준엽 총장이 바깥에서 밤을 새워 경찰을 막아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준엽 총장이 안계셨더라면 경찰이 달려들어 바리케이트를 다 부수고 학생들을 모두 연행해갔을 것입니다. 그때 대한민국 경찰은 그 정도의 화력은 지녔었고, 그 화력을 고대 학생회관에 쏟아부어도 신문 1단 기사 정도로 처리될 때였습니다.


  밤새 바깥에 앉아 학생들을 지키던 김준엽 총장이, 경찰과 어떻게 협상을 벌였는지 모르겠으나 다음날 오전 철야농성을 하던 우리는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최초로 무사히 끝난 철야농성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철야농성에 참여했던 저는, 그때 하던 무용담을 얼떨결에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김준엽 총장 덕분입니다.


  김준엽 총장은 1985년 2월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총장직에서 물러나 학교를 떠납니다. 전두환 정권이 학생운동의 방파제를 부수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1984년 가을에 부활한 총학생회를 궤멸시키기 위해 전두환 정권은 총학생회장 등을 제적시키라고 종용했으나 김준엽 총장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대학들은 모두 고대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그러다가 학생을 자르지 않은 김준엽 총장이 잘렸고, 다른 대학 총장들은 자기 학생들을 잘랐습니다.


  "총장님 물러나지 마시라"는 데모가 1985년 3월에 있었는데, 그렇게 큰 규모는 저로서도 처음 보았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학교의 모든 건물이 텅 비었고 수위실 강아지까지 주인 따라 데모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데모대는 교문을 밀고나가, 이른바 짱돌만으로 경찰을 학교 양 옆 2km까지는 밀어냈습니다. 친구 김훤주가 어디서 구한 야구 방망이를 들고, 마치 이순신이 지휘하는 것처럼 '독려'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번째 기억은 1990년대 초반에 생긴 것입니다.


  부산으로 출장을 가기 위해 오른 열차 안에서 김준엽 총장을 뵈었습니다. 인사를 드렸더니, 악수를 청하며 "자네는 학번이 어떻게 되는가?"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 학번이라면, 내가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말라고 데모를 했겠군. 고맙네"라고 하셨습니다. "총장 물러나라는 데모는 무척 많았지. 그런데 물러나지 말라는 데모는 내가 처음이야"라며 무척 즐거워 하셨습니다.


  김준엽 총장 이후 지금까지 어떤 분들이 어떻게 그 자리를 거쳐갔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김준엽 선생을 총장으로 '경험'한 당시의 학생들에게는 '대학 총장이란모름지기  이런 자리'라는 개념이 만들어져 있을 것입니다. 총장에서 물러난 이후, 국무총리로, 당 대표로 정치권에서 수없이 러브콜을 보냈는데도 거기에 한번도 응하지 않은 채 평생 곧은 학자로 살고 계십니다.


   모름지기 고려대 총장 자리는 이러한 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사회 분위기를 무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회 분위기를 좋은 방향으로 곧게 리드하는 자리, 대학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는 자리. 

  바로 그 자리에 있는 분이, 사회 분위기를 헤아리지 못하거나 알고도 무시하거나 하여 구설에 오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참 곤혹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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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 선생의
대학 총장 시절 일화들이 눈길을 끈다.

1) 하루는 학교 서무과에 노인 한 분이 방문해 "실례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서무과 직원에게 뭘 부탁하려고 했다. 서무과 여직원이 달갑잖은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지만 지금 신임 김준엽 총장 취임식이 있어 저희가 정신이 없어요"라고 응답했다. 그 때 그 노인이 "그러시군요, 제가 그 김준엽입니다"라고 대답하는 통에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총장 취임을 그렇게 하신 양반이다.

2) 1983년 가을, 고려대생 수백 명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생회관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바리
게이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해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렵고 배고픈 밤이 깊어 가는데 30분마다 김준엽 총장이 확성기로 외쳤다. "다치거나 아픈 학생 있으면 내보내라.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어 바로 병원에 데려갈 것이니 걱정 말고 내보내라. 학생 제군들 몸을 다치지 마라."

학생들은 총장이 자기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감격하며 밤을 지샜고, 역시 밖에서 밤을 지샌 김 총장은 경찰과 교섭을 벌여 다음날 아침 학생 5백 여 명이 학생회관에서 자진 철수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전두환 정권 시절 연행자 없이 끝난 유일한 시위농성이었다.

3) 이듬해인 1984년 가을,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이라는 관변어용 학생회를 없애고 총학생회를 부활시켰다. 이에 대응해 정권은 학생회 간부들을 제적시키라고 종용했으나 김 총장이 버티며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대학들은 고려대를 지켜보며 눈치만 살폈다. 이후 11월에는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농성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때도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박에 끝내 학생들을 지키며 버티다 정권의 미움을 샀다. 이 때 학생들 처리 문제를 밤 늦도록 논의하다
교수들이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제적이면 학생으로선 사망선고이고 제자들의 죽음의 위기 앞에서 밥이 넘어가냐'며 호통치고 끝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4)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학생이 아니라 김 총장을 자르기로 하고 압박을 가했다. 1985년 2월 졸업식 축사를 끝으로 김 총장은 강압에 의해 학교를 떠났다. 다른 학교에선 학생들이 잘리고 고려대에선 총장이 잘리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것. 개학하자마자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당시의 시위 모습은 대개 학생들이 쫓겨 다니는 것인데 이때는 경찰이 학생들에게 떠밀려 다닐 정도였다.

"총장을 돌려 달라"는 대학생 가두시위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시위는 '교직원들도 참가했고, 수위 아저씨도 나섰고, 수위 아저씨가 키우던 강아지도 주인 따라 뛰어다녔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질만큼 대대적인 시위였다. 그 이후 그 때의 학생들을 만나면 '고마웠네'라며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그렇게 총장 노릇을 했는데 국무총리 자리는 총장보다도 밑이야, 높은 총장 자리하다 어떻게 아래 자리로 내려가나"라며 껄껄 웃었다 한다.

정권이나 정부에, 또 학교재단 측에게는 오만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했지만 교수와 학생들을 송구스러울 만큼 존중해 준 총장으로 사람들은 기억한다. 교수에게 자문을 구할 것이 있으면 교수 연구실로 총장이 직접 찾아가곤 했을 정도다.

걸어간 족적 그대로가 이 나라의 역사인 선생은 "정말 보통 대가를 치른 게 아니야,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겪은 거지. 그래도 목숨 걸고 투쟁하길 잘했어. 그러지 않았으면 어떻게 자유·정의·진리라는 말을 제자들 앞에서 할 수 있었겠어" 라고 회고하며 "실력을 갖추고 지조를 지켜야 한다"고 후학들에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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