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설대미학과 [733466] · MS 2017 (수정됨) · 쪽지

2017-04-11 00:25:08
조회수 815

D진정한 역사고수이신분들 풀어보고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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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후기의 어떤 실학자가 쓴 글의 일부이다. 여기에 반영된 사상과 관련 있는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글>

비유하건대 제물은 대체로 샘과 같은 것이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만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비단 옷을 입지 않아서 나라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면 여공이 쇠퇴하고, 쭈그러진 그릇을 싫어하지 않고 기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수공업자가 기술을 익히는 일이 없게 되면 기예가 망하게 되며, 농사가 황폐해져서 그 법을 잃게 되므로 사농공상의 사민이 모두 곤긍하여 서로 구제할 수 없게 된다.

 

<보기>

ㄱ. 화이론적 명분론을 발전시켰다.

ㄴ. 상공업 진흥을 강조하면서, 청 문물의 적극적인 수용을 주장하였다.

ㄷ.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사상적 연원을 두고 있다.

ㄹ. 주로 정계 진출의 길이 막힌 남인 실학자들에 의해 현실 개혁론으로서 제기되었다.

 

2. 다음은 OO고등학교에서 제작한 역사 신문에 실린 글의 일부이다. 이 기사에 반론을 제기할 것으로 여겨지는 당시의 정치 세력에 대해 바르게 설명한 것은?

 

[신문보도]

..... 그는 단종, 연산군과 함께 국왕의 지위에서 축출된 왕 중의 한 명이다.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거대 세력들인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절묘한 중립 외교를 펼쳤던 .그의 능력은 탁월한  것이었다. 그리고 민생 안정과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한 세제 개혁, 5대 사고의 설치, 동의보감 편찬 등의 업적을 남겼는데, 이것은 조선 역대 왕들의 업적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오랜 세월 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중요한 이유는 당시 그를 축출한 정치 세력이 장기 집권하는 상황에서 '의도적인 평가 절하'가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국가와 민생을 위한 뛰어난 업적과 함께 역사의 희생물이라는 안타까움이 어우려져 오늘날 그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것은 타당한 일면이 있다.

 

[1] 위훈 삭제, 소격서 폐지 등의 정책을 실시하엿다.

[2]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3] 청에 대한 적개심을 바탕으로 북벌운동을 추진하였다.

[4] 과전법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였다.

[5] 주로 언관직으로 진출하여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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