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대 [606835] · MS 2015 · 쪽지

2016-11-26 14:56:48
조회수 937

[돛대샘] 2018 여태껏 우리가 몰랐던 비문학 이야기_1. 숲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9796562

   안녕하세요, 돛대입니다.. 


   나목(裸木)의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나목이란 가지가 앙상한 나무를 의미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지에 붙어 몸을 움츠린 잎사귀를 본다. 한 해가 저무는 즈음 내게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떠나보내지 못하는 미련이 무엇일까 더듬어 보기도 한다. 항상 입시가 끝나고 나면 왠지 모를 허탈감이 찾아오고 이 빈 공간을 다시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막막함을 느끼곤 한다. 물리적인 시간을 다시 관념적인 시간으로 돌려 보겠다.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란 말이 있다. 정호승의 '봄길'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물리적인 공간에서는 길이 끝난 곳에 길이 없다. 하지만 우리의 관념 속에선 길이 끝난 곳에 또 다른 새로운 길이 시작될 수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이처럼 나목의 계절은 끝남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는 결정되어 있진 않지만 내가 그리는 또 다른 내일의 해를 맞이하기 위해 건설적인 시간을 꿈꿀 수 있다.


   국어 영역에서 비문학이 관건이 된 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원에선 설명회란 것이 있다. 보통 설명회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학원에 대한 홍보 활동이다. 물론 학생을 동반하고 참석한 학부모도 간혹 만날 수 있다. 보통 설명회가 끝난 직후 개별적인 상담을 요청하는 학부모도 있다. 여기서 종종 듣게 되는 얘기가 있다. "내가 이번 수능 문제를 한번 풀어 봤는데, 화작까진 별거 아니더라구요. 비문학을 읽어 보는데……" 뒤에 생략된 말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결론은 그래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더러 나는 비문학에선 잘 틀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다. 오히려 문학이나 화작문에서 실수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비문학에 강하다라는 것을 은연중에 자랑하는 말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문학이나 화작문을 올리는 것보다 비문학 점수를 올리는 게 더 어렵기 때문이다. 비문학은 언제나 그랬듯이 국어 영역의 가장 중요한 승부처다.


   우리는 수능 국어에서 비문학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둘 수 있어야 한다. 비문학이 변수인 이상 좋은 점수를 얻는 방법은 비문학이 쉽게 나오길 바라는 길밖에 없다. 수능이란 중요한 시험에서 요행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비문학이 쉽게 정복될 것 같지도 않다. 우리는 누구나 비문학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다. 먼저 자신의 배경 지식에 대한 불신이다. 수많은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독해력이 강한 학생이 비문학을 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어떤 학생이 독해력이 센 학생일까? 책을 많이 읽은 학생인가? 얘는 책은 많이 읽었는데 영 국어 성적이 나오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부모들도 있다. 문학책을 아무리 많이 읽은 학생이라도 과학 제재를 쉽게 이해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고민도 앞선 고민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문어의 속출이다. 생소한 어휘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올 때 차분히 수습하기가 쉽지 않다. 평소에 배운 게 나오고 내가 잘 아는 어휘들로 이루어진 지문을 만난다면 참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우린 이 미련에서 탈피(脫皮)해야 한다.


  그렇다고 수학과 영어를 제쳐 두고 국어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시간을 할애(割愛)해서 공을 많이 들였는데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면 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한자성어 중에 '등고자비(登高自卑)'란 말이 있다. 먼 곳을 감에는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출발해야 하고, 높은 곳에 오름에는 반드시 낮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말이다. 고민은 우릴 우왕좌왕하게 만든다. 이미 알던 답도 의심하게 만들어서 심지어 잘못된 답을 선택하게도 만든다. 우리 주변에는 곳곳에 꽃과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아, 얘가 산수유나무이구나!'에서 우리의 인식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한번 더 쳐다보게 되고 '붉은 산수유 열매'를 발견한 것을 뿌듯해 하기도 한다. 관찰과 관심이 이 나무와 우리의 연(緣)을 끈끈하게 이어주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김춘수 '꽃'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란 구절은 학습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황무지 앞에 서 있다. 내가 이름을 아는 나무도 없다. 물론 아직 내 눈 앞에 나타날 나무가 우뚝 서 있지도 않다. 하지만 미래를 꿈꿀 수는 있다. 풍성한 나무들을 만나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 나무의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의 숲에서 변수가 아닌 상수로서의 평온과 안정, 위로를 받고자 한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하고 명백하다. 글로만 이루어진 딱딱한 도시 같은 비문학에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이 숲이 이번에는 어떤 나무들로 형성되었는지 새로운 접근 방법을 통해 그 정체를 낱낱이 밝히게 될 것이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첫번째 댓글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