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램국어 [476057] · MS 2013 (수정됨) · 쪽지

2025-12-08 18: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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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피램을 왜 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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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이었다.


5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롯데의 준플옵 5차전(박세웅-조정훈이 탈탈 털려서 발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무려 20만원을 주고 암표를 사서 목이 터져라 최강(?) 롯데를 외쳤건만 돌아오는 건 늘 그렇듯 가을야구 광탈이었다.


이 경기 전후, 내 인생은 오로지 롯데-아스날-오버워치뿐이었다. (부끄럽지만 우리 과 역사상 최초로 20학점 올F를 달성한 학기였다. 왜 이렇게 살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침 7시쯤 잠들어서 오후 5시쯤 일어났고, 대충 밥 먹고 피시방으로 가서 아침까지 오버워치를 했다. 아스날 경기가 있는 날이면 피시방에서 라면 먹으며 스트레스를 받았다.(이때 아스날은 경기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그 시절 늘 내 눈앞에 펼쳐져 있던 화면.
출처 : https://blog.naver.com/hjjg1218/221231207105


어쨌든, 이렇게 살다가 준플옵 5차전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왔더니 피시방 갈 돈이 없었다.

관성적으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서 용돈 좀 달라고 하려는데, 갑자기 엄청난 현타가 몰려왔다.

비싼 등록금 내면서 강사해보겠답시고 학점관리도 안하면서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 말이다.


그래도 여느 날처럼 피시방으로 늦은 출근을 했는데, 그날따라 오버워치가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냥 오르비에 들어갔다. 정말 열심히 활동하는 수많은 강사분들과 네임드들이 보였다.

다시 한번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홀린 듯이 글을 하나 쓰기 시작했다.


https://orbi.kr/00013552914



그래도 나름 과외도 많이 했었고, 수능 국어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었기에 앉은자리에서 글이 쭉쭉 나왔다.

옆에 있던 동기는 '그 지문들이 다 머릿속에 있는 거냐'며, 대단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뭔가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오르비 국어 양대산맥이었던 심찬우T와 김강민T(당시 활동명 랍비T)에게 쪽지를 보냈다.

아 생각해보니 당시 심찬우T는 왠지 엄청 까칠할 것 같은 이미지여서... 그러니까 좀 무서워서 안 보냈던 것 같다.(찬우쌤 사랑해요)

김강민T에게 보냈던 쪽지 내용을 대충 떠올려보면 다음과 같다.


피램 : 님 저 국어강사 지망생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음. 돈 안 받을 테니까 나한테 뭐라도 좀 시켜주고 가르쳐주셈

김강민T : 오 피램 알지알지 밥이나 한끼 ㄱㄱ

(물론 실제로는 엄청 공손하게 보냈다...)


밥을 먹고 김강민T의 조교로 일하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내년에 휴학하고 진짜 제대로 해보자. 안 되면 강사 바로 포기한다.




그렇게 맞이한 2018년, 정말 열심히 했다.

오르비/포만한/수만휘 등 가리지 않고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네임드가 되었다.

메가스터디 러셀에서 '웬만한 강사보다 열심히 하는 조교'라는 소문이 날 만큼 조교 활동도 열심히 했다.

감사하게도 '그룹 과외'를 할 만큼 많은 학생이 날 찾았다.

나는 순식간에 '학점은 안 좋은데 대기업 직장인 월급을 버는 선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룹 과외를 하려고 보니 수업할 교재가 마땅치 않았다.

당시에는 '자체 교재'를 가지고 수업한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나도 당연히 시중 교재를 가지고 수업을 하려고 했다.

아니 그런데, 시중 교재를 보는데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교재의 퀄리티가 낮다 이런 게 아니라, '생각의 결과'만을 보여 줄 뿐 '생각의 과정'을 보여 주는 교재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단 나누기도 할 줄 모를 만큼 컴맹이던 내가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수능 국어의 접근법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써내려갔다.

한 지문 한 지문, 지금의 피램처럼(물론 훨씬 수준 낮지만) 생각의 '과정'을 보여 주는 해설을 썼다.

아침 7시에 잠드는 일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새벽까지 나를 품어주던 공간은 퀘퀘한 피시방이 아닌 반짝반짝 빛나던 중지 열람실이었다.


한 지문씩 완성될 때마다 커뮤니티에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내가 생각한 그대로, 시중에는 이런 해설지가 없었다.

지문까지 친절하게 해설되어 있는 내 해설지는 그야말로 인기만발이었고,

이런 소리도 들어본다.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이걸 책으로 만들어서 내면 무조건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잘 될 줄은 몰랐지만, 최소한 나의 강사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냥 오르비북스에 메일을 보냈다. 내 메인 무대는 오르비였기에 고민의 여지도 없었다.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갔고, 책을 만드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피램 국어가 세상에 나오고,



대박이 났다.

회사에서도 계속 메일이 왔다.

대표님이 고맙다며 청담동에 있는 미슐랭 쓰리스타 밍글스를 사주셨다.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했더니 학생들이 좋아한다. 돈이 벌린다.

실로 엄청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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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피램 국어의 탄생썰이다.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보여 주는 것에 메말라 있던 학생들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빨리 학생들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자료/교재/강의를 만들어서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에 매일매일이 설렜던 2018년~2019년이었다.


시간이 흘러 2025년의 끝을 맞이하는 지금, 그동안의 나에게는 그때의 설렘이 남아 있었는가.

맞다고 하는 건 자기 기만이다. 학생들의 댓글보다 매출표에 찍힌 숫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속물이 되어 버린지 오래라는 걸 절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생각의 위기:기회' 등 피램 국어 시리즈의 확장을 기획하면서 무언가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도대체 뭘까 생각하면서 피램 국어의 처음을 되짚어 보았더니, 하루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더 많이 도움되는 글을 오르비에 쓰고 싶어하던 젊은 피램의 그 설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더 이상 이전처럼 그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될지도 모르겠다.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좋은 컨텐츠, 훌륭한 경쟁자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도 그런 생각은 조금 버려놓고, 지금 피어오르는 이 설렘을 놓지 말아야겠다.

철없고 순진하다는 이야기를 듣겠지만, 다시 학생들에게 좋은 걸 주고 싶어서 안달난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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