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벌레래요 [1069334] · MS 2021 · 쪽지

2022-08-11 22:09:46
조회수 414

명예로운 결말보단 후회없는 결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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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의 도입부는 다음과 같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내가 인간실격이란 작품을 알게 된 것도 이 도입부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이 도입부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이 단 두문장에 내 인생이 투영되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서 한번도 노력하며 살아온 적이 없었다.

남들보다 조금 조숙했을지도 모르는 머리와 호기심 하나로 어릴 때부터 똑똑하다,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단순 "성적"이 잘 나오는 것은 현저히 다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른들의 칭찬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아, 나는 "공부"를 잘 해나가고 있는 거구나.

이 달콤한 불로소득의 처참한 결말을 이때는 알지 못했던걸까.



중학교 시절까진 전교에서 1~2등을 다투기도 했었다.

떨어지는 사회성으로 가끔씩 엉뚱한 행동을 벌일지라도 어른들은 내가 단지 성적이 잘나온다는 이유 만으로 나를 올바른 모범생으로 취급해주었다.

어느새 나는 배우기 위한 공부조차 아닌 그저 공부를 잘하는 내 자신을 위한 가식을 부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게 되었다.



고1이 되고 처음 받아든 성적표는 처참했다.

고등학교의 수학은 그저 교과서+유형 문제집 만으로도 상위권이 가능한 중학교 수학 따위와는 결이 달랐다.

그럼에도 나는 경각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과목은 1~2등급이니까, 수학만 올리면 되겠지.

그럼에도 그를 위한 공부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절망의 고2가 찾아왔다.

1학년 때 까지만이라도 1~2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던 성적표에는 이제 4~6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아직 나에게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했고, 많은 기회가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현재 고3.

그나마 희소식은 꿈마저 잃어버렸던 나에게 정치학 교수라는 새 꿈이 생겼다는 것.

그러나 꿈을 찾았음에도 나에게는 이미 자신이 대학원이라도 다니는 마냥 먼 미래의 걱정만이 태산이었지, 정작 발등 위의 불똥인 대입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

현실을 이제서야 직시하게 되었다.

최후의 기회라고 여겼던 여름방학마저 덧없는 인터넷과 커뮤질로 허공에 날려버린 이후에야 깨닫게 되었다니.

아까도 말하였지만 좋은 성적과 좋은 공부는 비례하지 않는다.

나는 어쩌면 평소 내가 무시하였던 하위권 학생들보다도 더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을까.



오늘, 평생 잡지 않았던 펜을 이제서야 잡아들었다.

단 한시간 정도의 단순한 인강시청을 위한 집중마저 나에게는 큰 난관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부끄러워하겠는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렇게 달성한 오늘의 공부량은 고작 3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뜻깊은 첫 발이었다.



내가 12년간 허송세월로 보낸 시간의 업보는 결국 98일 뒤 나에게 되돌아올것임을 나는 안다.

98일 동안 전력을 다해 학습을 해도 모자를 판에 이 시점에서 기초적인 공부습관부터 잡는 것은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영영 노력하지 않고 적당히 본 수능과 적당히 맞춰간 대학에서 내 12년의 명예로운 결말을 내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98일 하고도 1년을 더 써서라도 후회없는 결말을 맞이하고 싶다.

나의 지난 10년은 항상 바뀌지 않는 자신에 대한 나의 염세적인 냉소로만 가득 들어차있었다.

하지만 이제서야 깨달은 것은 그 바뀌지 않는 자신을 만든 것은 공허한 냉소만을 매일매일 읊조린 나 하나하나가 모인 결과였다는 것이다.

괴로워도 좋다.

절망할지라도 좋다.

절망도 희망도 없는 고요 속의 질식을 택할 바에야 무수한 절망속에서라도 한번만큼은 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껴보고 싶다.

명예로운 결말보단 후회없는 결말을.

내 "삶"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2022. 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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