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Debussy [870531] · MS 2019 · 쪽지

2022-05-17 06: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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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생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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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 노(怒)하였오. 어젯밤 태서관(泰西舘) 별장(別莊)의 일! 그것은 결코 내 본의는 아니었오. 나는 그 요구를 하려 정희를 그곳까지 데리고 갔던 것은 아니오. 내 불민(不憫)을 용서하여 주기 바라오. 그러나 정희가 뜻밖에도 그렇게까지 다소곳한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것으로 저윽히 자위를 삼겠오. 


정희를 하루라도 바삐 나 혼자만의 것을 만들어 달라는 정희의 열렬한 말을 물론 나는 잊어버리지는 않겠소. 그러나 지금 형편으로는 '안해'라는 저 추물을 처치하기가 정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오. 


오늘(三月三日) 오후 여덟 시 정각에 금화장(金華莊) 주택지 그때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어제 일을 사과도 하고 싶고 달이 밝을 듯하니 송림을 거닙시다. 거닐면서 우리 두 사람만의 생활에 대한 설계도 의논하여 봅시다. 


3월 3일 아침 S' 

 
 

내게 속달을 띄우고 나서 곧 뒤이어 받은 속달이다. 


모든 것은 끝났다. 어젯밤에 정희는—

 

그 낯으로 오늘 정희는 내게 이상 선생님께 드리는 속달을 띄우고 그 낯으로 또 나를 만났다. 공포(恐怖)에 가까운 번신술이다. 이 황홀한 전율을즐기기 위하여 정희는 무고(無辜)의 이상(李箱)을 징발(徵發)했다. 나는 속고 또 속고 또 또 속고 또 또 또 속았다. 


나는 물론 그 자리에 혼도하여 버렸다. 나는 죽었다. 나는 황천을 헤매었다. 명부(冥府)에는 달이 밝다. 나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태허(太虛)에 소리 있어 가로되, 너는 몇 살이뇨? 만 25세와 11개월이올시다. 요사(夭死)로구나. 아니올시다. 노사(老死)올시다. 


눈을 다시 떴을 때에 거기 정희는 없다. 물론 여덟 시가 지난 뒤였다. 정희는 그리 갔다. 이리하여 나의 종생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기는 끝나지 않는다. 왜? 


정희는 지금도 어느 빌딩 걸상 우에서 뜌로워스의 끈을 풀르는 중이요 지금도 어느 태서관 별장 방석을 베고 뜌로워스의 끈을 풀르는 중이요, 지금도 어느 송림 속 잔디 벗어 놓은 외투 우에서 뜌로워스의 끈을 성(盛)히 풀르는 중이니까다. 


이것은 물론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재앙이다. 


나는 이를 간다. 


나는 걸핏하면 까무러친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철천의 원한에서 슬그머니 좀 비껴서고 싶다. 내 마음의 따뜻한 평화 따위가 다 그리워졌다. 


즉 나는 시체다. 시체는 생존하여 계신 만물의 영장을 향하여 질투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이리라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정희, 간혹 정희의 훗훗한 호흡이 내 묘비에 와 슬쩍 부딛는 수가 있다. 그런 때 내 시체는 홍당무처럼 확끈 달으면서 구천을 꿰뚫어 슬피 호곡한다. 


그동안에 정희는 여러 번 제(내 때꼽째기도 묻은) 이부자리를 찬란한 일광(日光) 아래 널어 말렸을 것이다. 누루(累累)한 이 내 혼수(昏睡) 덕으로 부디 이 내 시체에서도 생전의 슬픈 기록이 창공 높이 훨훨 날아가나 버렸으면— 


나는 지금 이런 불쌍한 생각도 한다. 그럼— 


— 만 26세와 3개월을 맞이하는 이상(李箱) 선생님이여! 허수아비여! 


자네는 노옹(老翁)일세. 무릎이 귀를 넘는 해골(骸骨)일세. 아니, 아니. 


자네는 자네의 먼 조상(祖上)일세. 이상(以上) 


十一月二十日 동경(東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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