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 한의대 간 꿈을 꾼 사람 [850790] · MS 2018 (수정됨) · 쪽지

2021-08-29 23: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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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완성 중요 작품 곡예사 택본.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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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완성 256page에 출제된 중요한 작품


황순원(黃順元)

 

                                                            곡예사

 

-1951년 作 -

 

대구에서도 그랬는데 부산 와서도 변호사 댁 신세를 지게 됐다.

 

서울서 먼저 가족들을 내려보내고 뒤떨어져 부산에 와 보니, 내 직속 가족들은 대구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대구가 부산보다 물가가 싸다는 것으로 해서 크리스마스날 나는 대구로 올라갔다. 그때 아내와 애들이 들어 있는 곳이, 화재로 인해 뼈와 거죽만 남은 재판소 옆, 모 변호사 댁이었다. 굉장히 큰 저택이었다. 이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또 상당히 넓은 뜰 한구석에 놓여 있는 헛간이 내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의 방이었다.

 

대구는 부산에 비해 무던히 차거웠다. 원체가 헛간인데다 북향하여 출입구 하나 밖에 없는 방이라, 별이라곤 진종일 얼씬도 하지 않았다. 더 춥고 음산스러웠다. 애놈들은 날만 새면 손발이 얼면서도 밖으로만 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다행으로 알았다. 피난민의 신세에 그래도 어느 분의 안면으로 이런 방이나마 얻어들게 된게, 여간 고마운게 아니었다.

 

우리는 이 집에서 몇 가지 주의하지 않으면 알 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이 댁 변호사 장모되는 노파의 지시에 따라, 저녁에 어슬해지면 절대로 안뜰에 들어와 물을 길어가서는 안 되고, 아침에도 자기네가 한 바가지라도 먼저 길은 뒤에야 물에 손을 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여하한 빨래건 빨래 종류는 일체 금지라는 것이다. 안뜰에는 수도도 있고, 우물도 있었다. 아침만은 일 없었다. 우리는 점심을 뺀 두 끼의 식생활인지라, 느지막하게 안 댁에서 조반이 끝난 뒤에 점심 겸 조반을 해치우면 그만이었으니까. 빨래도 그랬다. 한목 모았다가 물을 길어 내다 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그저 밤중에 미처 물을 떠다 두지 못한 난 같은 때, 어른도 어른이지만 애들 가운데 누가 목이 마르다든가 할 것 같으면 그거 달래기에 가슴이 타야 하는게 안 됐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룻밤 물 몇 모금 못먹었다고 어떻게 되는게 아니었다.

 

변소만 해도 이 노파가 안뜰 변소에는 들어와 더렵혀서 안 된다고 따로 지시가 있어, 이미 아내의 손으로 이쪽 뜰 한구석 다방솔 뒤에 거적잎 변소가 만들어져 있었다. 대낮에 어른들이 들어가 쭈그리고 앉기는 좀 뭣했으나 그맛쯤 하는 수 없었다.

 

두고 보니 이 댁 살림은 이 장모 노파의 손에서 우러나는 것 같았다. 아내가 식모한테 들은 말에 의하면 이 노파는 소생이라고 현재 변호사 부인인 딸 하나 뿐으로, 이 딸이 이 댁 변호사 부인이 되자 따라 들어와 온갖 살림살이를 주무른다는 것이다. 애들 방도 따로 있지만, 큰 옥돌방 하나를 이 노파가 독차지 하고 있어, 아침에 이 방부터 조반상을 본 뒤에야 비로소 다른 식구들이 아침을 먹는다는 것이다.

 

이 노파의 취미는 같은 노파들끼리 오늘은 이집 내일은 저집 모여서 골패를 노는 것과, 날

 

을 받아 가지고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일이라고 했다. 이 노파가 끈을 곱게 장식한 감장 조바위를 쓰고, 비단옷 차림으로 외출하는 것을 한두번 아니게 목격할 수 있었는데, 육순 가까운 나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맵시에 자태도 똑 발랐다. 이 댁에 드나드는 노파들도 다 비슷비슷한 차림차림에 인생의 어두운 그늘이라곤 별로 깃들어 보지 않은 얼굴 빛이요 몸매들이었다. 인생이란 하다 못해 요맛 정도로라도 안일하게 늙어가야 할 종류의 것인지도 몰랐다.

 

한 열흘 남짓 지나서였다.

 

하루 아침 일어나 보니, 우리 여덟 살잡이 선아의 신발 한 짝이 간 데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온 식구가 넓은 뜰을 편답했다. 없다. 누가 집어갔다면 많은 신발 가운데 하필 그 애의 것만, 그것도 한 짝만 집어 갈리 만무하다. 결국 이 댁 셰퍼드란 놈이 어디 멀리 물어다 팽개쳤으리라는 결론을 내리는 수 밖에 없었다.

 

없는 돈이나 겨울철에 맨발로 두는 수 없어, 아내가 거리에 나가 신발을 사 들고 돌아오더니 이런 말을 한다. 신발 한 짝 없어지는 건 흔히 자기 집에 앓는 식구가 있는 사람의 짓이라는 것이다. 앓는 사람의 나이와 같은 사람의 신발 한 짝을 가져다 어찌 어찌 하면, 그 앓는 사람의 병이 신발 주인에게로 옮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내는, 이 댁에 우리의 선아만한 애가 하나 며칠 전부터 무얼로 앓아 누웠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래서 신발 한 짝이 없어진거나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불안스럽고도 노엽고 슬프기까지한 아내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아내에게 못지않게 불안스럽고도 무엇에 노여운 감정이 가슴 속에 움직임을 어찌 할 수 없었다. 그게 아무 근거없는 미신의 짓이라 하자, 그리고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자식이라 하자, 자기네 애가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법이다. 더욱이 우리의 선아는 네 애 중에 그 중 약한 해다. 이렇게 피난가지 나와 병이라도 들리면 구완할 길이 그야말로 막연한 것이다.

 

남몰래 불안스러운 며칠이 지났다. 이 댁 애가 나아서 일어났다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도 우리 선아는 앓아 눕지 않았다. 역시 그때 그 신발 한 짝은 이 댁 셰퍼드란 놈이 물어다 팽개친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럼 날을 받아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노파가 사는 이댁에서, 그같은 몰인정한 짓이야 꿈엔들 할까보냐

 

그리고 이삼일 뒤의 일이었다.

 

밖에서 들어오니, 아내가 어둡고 추운 방에 혼자 앉았다가 대뜸 근심스런 어조로, 좀 전에 이 댁 노파가 나와 이 방을 비워 달라더라고 한다. 이유는 이제 구공탄을 들이는데 이 방(실은 헛간)을 사용하여야 하겠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로 아내가 식모한테서 들은 말은 이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아까 낮에 예의 노파 한 패가 몰려 왔었는데, 그 중 한 노파가 이쪽 뜰 구석 다방솔 뒤에 감추인 거적잎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런 때는 늙어서 눈 안 어둡는 것도 탈이었다. 그게

 

무엇인가 싶어 가까이 가 들여다 보고는 홱 고개를 돌리며, 애 퇴 외! 대체 이런데다 이렇게 뒷간을 만들다니 될 말인가. 그 달음으로 이 댁 노파에게, 정원에다 그런 변소를 내다니 아우님도 환장을 했는기요? 여기서 주인 노파도 한바탕, 거지떼란 할 수 없다느니, 사람이 사람 모양만 했다구 사람이냐고 사람의 행실을 해야 사람이 아니냐느니, 자기네 집이 피난민 수용소가 아닌 바에 당장 내보내고 말아야겠다느니, 야단법석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내한테 나와 방을 비워줘야겠다는 영을 내린 것이었는데, 그래도 이 노파가 우리한테 나와서는 거기다 뒷간을 만들었으니 나가달라는 말은 못하고, 이제 구공탄을 들이게 됐으니 방을 비워줘야겠다고 한 것이었다. 실은 이 점이 이 노파로 하여금 자신이 말한 인간은 인간다운 행실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 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노파 자신이 우리들에게 안뜰 변소를 사용치 못하게 하고, 거기다 거적잎을 치게끔 분부를 해 놓았으니, 진드기 아닌 우리가 오줌 똥 안 눌 수는 없고, 실로 면목이 없는 행실이니 거기 대소변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잊지 않은 점에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우리가 들어 있는 곳이 실은 사람이 살 방이 아니라, 구공탄이나 들일 헛간이라는 걸 밝혀준 점에서.

 

이쯤 되어, 이 변호사 댁 허산에서 쫓겨난 우리 초라하기 짝이 없는 황순원 가족 부대는 대구 시내를 전전하기 수삼차, 드디어 삼월 하순께는 부산으로 흘러 내려오게까지 되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부산 와서 방을 장만하게까지는 처제가 있는 집에 당분간 신세를 질 예정이었다. 저번에 내가 부산까지 내려왔을 때 이 처제가 있는 방이 그 중 여유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집이 또 모 변호사 댁이었다. 경남중학 뒤에 있었다. 역시 상당히 큰 화양식 저택으로 이 댁 다다미 여섯 장 방에 처제네가 들어 있었다. 이 방은 반침이 없는데다, 한 옆에서 낡은 반다지 하나와 낡은 테이블 하나가 들여 놓여 있어, 다다미 넉 장 반 푼수 밖에 안되는 방이었으나, 애 셋인 처제네 네 식구가 살고도 그닥 무리할 것 없이 우리 여섯 식구가 들어배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부산에 와 보니, 이 방에는 이미 다른 가구가 하나 들어있었다. 애 둘을 가진 부인네였다 남편되는 이는 모 사단 법무관으로 일선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본시 이 가구에게는 따로이 방 하나를 제공하기로 되었던 것이, 그 방은 손님 방으로 써야 겠다고 해서 처제네 방으로 모인 것이었다. 같이 애들과 여인들뿐인 가구인데다(내 동서 되는 사람은 이공과계의 기술자 양성 교육을 받으러 도미했다가 6.25사변으로 해서 못 나오고 지금은 동경에 와 있는 것이다.) 처제가 그 안면을 빌어 이 댁 방을 얻게 된 분과, 바로 이 한 방 부인네가 같은 법무 계통의 분이라, 도리어 서로 어렵지 않고 외롭지 않아 괜찮을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에 바람이 불어왔다. 주인 댁에서 별안간 이 방을 비워 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이 방에 식모를 두어야겠다는 것. 그런데 묘한 것은 이 댁에서 비워 달란 그 날짜가 뒤에 알고 보니, 처제가 이 방을 얻을 때 그 안면을 빈 분이 다른 데로 인사 이동이 있은 날짜 그 날인 것이었다. 처제랑이 며칠 뒤에야 안, 이 인사 이동을 법조계의 이름 있는 이 댁 변호사가 아직 공표도 있기 전에 알았다고 해서, 무어 그리 괴이한 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저 무제는 바로 그 날로 방을 비워 달랬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그 날짜들이 서로 우연히 합치된 것으로 보는게 온당할 것 같다. 그맛한 분이 처제가 안면을 빈 분의 인사 이동으로 말미암은 앞으로의 자기 직업적인 이해타산만을 생각하여 조금하고도 노골적인 그런 행동으로 나왔다고는 볼 수 없는 까닭에. 우리가 부산 와 닿기 전에 처제가 있는 방에는 이런 말썽이 생겨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렇다고 우리가 여관을 찾아갈 수도 없는 형편인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생각다 못해 우리는 분산해서 숙박하기로 결정을 했다. 나는 다다미 아홉 장 방에 세 가구(그 도합 식구가 무려 열아홉 명)가 들어 있는 부모가 계신 남포동으로 가 어떻게든지 끼워 자기로 하고, 큰 애 둘은 한간 방에 여섯 식구가 들어 있는 외갓집으로 보내고, 끝의 두애와 아내는 하는 수 없이 그냥 처제네 방으로 갔다.

 

매일 같이 아내한테서 직접 또는 이모네 집에 들렀다 오는 큰 애들을 통해, 주인 댁에서 방을 비워내라는 독촉이 심하다는 걸 들었다. 대구에서 듣기에는 부산에 왔던 피난민이 무척 빠졌다는 말이어서, 부산 오면 어떻게든지 방 하나쯤은 얻을 수 있으려니 했다. 와 보니 사실 사람은 내가 처음 이곳 들었을 적보다 현저히 빠졌다. 그러나 방은 없었다. 아내와 나는 여기 저기 꽤 여러 군데 다리를 놓아 보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쫄리다 못해 한 방 부인네가 먼저 범일동엔가 있다는 자기 시삼촌한테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이 변호사 댁에서는 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인데 벌컥 물이 열리더니, 거기 이댁 변호사 영감이 나타난 것이었다. 무섭게 부릅뜬 눈이었다. 그리고 성난 음성으로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당신네들도 인간인기요? 오늘 아침으로 당장 나가소. 여관으로라도 나가소. 사람이란 염치가 있어야지 않소. 만일 오늘로 아니 나가면 법으로 해결을 짓겠소.

 

처제와 아내 편에서도 가만 있을 수만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상으로나 여관으로는 못 나가겠다고 했다. 이 댁 큰 딸 둘이 응원을 오고, 부인과 큰 아들가지 충돌했다. 서울 모 법과대학에 적을 두고 있다는 이 댁 큰 아들은 폭력행위까지 나오는 것을, 그래도 나이 먹은 법률가가 법적으로 따져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듯, 젊은 법률가를 떼어가지고 가더라는 것이다.

 

나는 남포동 예의 열아홉 식구가 들어 있는 방 한 구석에서, 아내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변호사 영감이 우리들더러 인간이 아니라는 건 벌써 대구서 그 노파한테 낙인을 찍힌 바니 별반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가 또 법적으로 해결을 짓겠다는 것도, 그가 법률가라 응당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단지 여관으로라도 나가라는 데는 곤란하다. 여관에 들 수 있는 형편이라면 우리가 왜 이러고 있을 것인가. 다음에 염치가 없다는 대목도 그렇다. 피난민의 신세니 가다 오다 염치 없는 일도 있긴 하겠지만, 이 댁에 대해서 그렇게 몰염치한 짓만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동안 처제가 있는 방에는 금액을 내고 있은 셈이요, 어제만 해도 한 방 부인네가 시삼촌 댁으로 옮아간 뒤, 우리는 이 댁 부인에게 우리가 가진 옷가지를 마저 돈으로 바꿔 가지고라도 보증금을 들여놓겠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때 부인의 대답은 자기

 

네는 돈이 아쉬워서 그러는게 아니고 그 방이 필요해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그방을 식모를 줘야겠다는 것이다. 아내가 다시 그러면 그 식모가 들어와 잘 자리를 내어 줄터이니 같이 들어와 자게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다. 방을 구하기까지 좀 참아 달라는 수 밖에 없었다. 식모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 주인 댁에서, 식모 식모하는 여인은 여인 자신이 처제와 아내에게 한 말에 의하면, 주인 댁과 과히 멀지도 않은 친척으로 이번에 딸네 집에 왔다가 들러서, 밀린 빨래도 해주고 바느질도 해주느라고 머물러 있다는 것이며, 본래 이 집에 식모라고 붙어 있지를 못한다는 것과, 결국 식모 노릇 하는게 늙은 할머닌데, 지금 잠깐 시골 작은 아들네 집에 다니러 갔다는 것, 그리고는 이 방만해도 언젠가 왔을 때도 헛간 비슷이 늘 비어 잇더라는 것이다. 이 댁 늙은 할머니가 식모 노릇을 한다는 건 이미 몇 달 같이 살아온 처제가 아는 일이었다. 하여튼 우리가 염치 없다는 건 우리가 방을 속히 얻는 재주가 없다는 데서 오는 것 뿐이었다.

 

아내는 눈물이 글썽한 슬픈 얼굴에, 그러나 무슨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이, 오늘 저녁부터는 우리 식구가 다 그리로 모이자고 한다. 이왕 일이 그렇게 된 바에는 방을 얻을 때까지 모여 있자는 것이다. 문득 나는 그래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법과대학생의 일이 떠올랐다. 여자한테 폭력을 가하려던 그가, 나를 보고 가만 있을 리 만무하다. 그 이십 대의 청년을 사십 가까운 약골의 내가 어떻게 대항할 수 있으리요. 그러나 한 편 아무리 못난 사내기로서니 그래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처자는 처자대로 그런 자리에 남겨둔 채 혼자 지레 겁을 집어먹고 앉았다는 것도 생각할 문제였다. 물론 아내가 한데 모이자는 것은 나더러 무어 그 청년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를 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닐 것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했다면 도리어 나더러 모이자는 말도 내지 않았을 아내다. 그저 아내는 생각한 것이다. 지금 내가 자고 있는 이 곳이 나로 해서 늙은 부모가 거의 앉아 새우다 시피 하시니, 이왕 타협이 안 된 건 안 된대로 벌어질 일이 벌어지고 만 뒤라, 방을 얻기까지 모여 있자는 것이다. 나는 저녁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학교로 나갔다. 서울서 봉직하고 있던 학교가 몇날 전부터 보수 공원에서 격일 수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 날이 그 수업날의 하루였다. 먼저 부산 내려온 동료들한테 집 이야길 부탁해 보았다. 점잖지 못한 일인 줄 알면서도 상급생 몇 한테도 말해 보았다. 오후에는 차도 안 팔아 주는 다방에 앉아 아는 친구를 붙들고 구차한 말을 해 보았다.

 

저녁 때가 가까워서 부둣가로 나갔다. 거기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목노상에서 대폿술을 한 잔 마시기 위함이었다. 술 사발부터 내었다. 보니, 방파제 너머 저 쪽에 범선 두세 척이 가는지 오는지 떠있다. 야, 바다란 아무 때 봐도 좋다. 가까운 눈 앞에 갈매기란 놈들이 껑충인다. 야, 멋들어졌다.

 

그러나 실은 이 바다와 갈매기에게 마음이 젖어드는 심사는 아니었다. 무슨 생선 가시와도 같은 것이 내 가슴속 한구석에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이제 내가 그 변호사 댁엘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법과대학생과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청년은 내가 한번도 본 일이 없으나, 변호사 영감만은 이번 와서 낮에 한두번 그 댁엘 드나들며, 정원에 앉아 나무를 매만져 주고 있는 걸 본 일이 있다. 오십이 잘 지나 보이는데 아직 젊은이다운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갈라 붙인, 체구가 굵은 사내였다. 그 아들이 이 아버지를 닮았으면 상당한 체구와 체력을 소유한 청년임에 틀림 없다. 어쩐지 켕기는 마음이었다.

 

단숨에 또 술 사발을 내었다. 나도 스물 안팎까지는 수태 싸움을 해온 사람인 것이다. 내 얼굴에는 그 기념물이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 코피도 수 없이 흘려보았고 남의 코피도 적잖이 내주었다. 남의 이빨을 두개나 꺾어 놓고 내 머리 꼭대기에 뜸 뜬 자리 같은 흉터도 받아 보았다. 사실 말이지 한창 적에는 하나 대 하나에는 누구한테 지지 않아 왔다. 그게 서른이 지나면서부터 싸움이라면 극력 피해만 왔다. 그게 또 사십 가까운 오늘에는 싸움이라면 겁부터 앞서는 것이다.

 

술 사발을 또 들이켰다. 그러나 상대편이 먼저 도전해 오면 가만 움츠리고 앉았을 수만도 없지 않은가. 정당방위란게 있다. 법학을 하는 자니 이 정당방위로 나가리라. 그래 도전해 오면 받아 주자. 한번 오래간만에 옛날 실력을 발휘해 주리라. 싸움이란 체력만으로 하는게 아니다. 여기서 나는 거나하니 취해 오는 술 기운을 빌어, 그 자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그 자가 저렇게 나오면 나는 또 저렇게 하고 이미 다 잊어버린 지난 날의 싸움 솜씨를 들추어 가지고, 얼마든지 상대 편을 거꾸러뜨리는 장면을 떠올리며 혼자 흥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주머니를 털기까지 황혼에 덮이는 부둣가를 떠날 줄을 몰랐다.

 

이날 밤은 아무 일 없었다. 이튿날도 그 다음 날도 아무 일 없었다. 그 동안 식모라던 여인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 댁 할머니가 시골서 돌아왔다. 파뿌리 머리에 허리까지 굽은 아주 파파노인이었다. 이 할머니가 부엌동자며, 안방 복도 걸레 치기며, 심지어는 안방 변소까지 맡아 소제를 하는 것이다.

 

한번은 처제와 아내가 수군거리기에 무엇이냐고 했더니, 이 댁 할머니자 저번 시골 내려가기 전에 몸이 편찮아 약을 지어다 쓴 일이 있는데 그 약 값을 이번에 와 보니 아직 갚지 않고 있어, 할 수 없이 집안 사람 몰래 간장 두 병을 퍼가지고 들어와 사라더라는 것이다. 나는 문득 이런 것도 법에 비추어 도둑질한 물건을 사 죄가 되는지 어쩐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리로 옮겨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저녁, 아내와 나는 의논한 결과, 어쩌면 주인 댁에서 타협을 받아 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아내가 한 달 방세를 가지고 가서 다시 사정을 해 보기로 했다. 그래, 가지고 갈 방세의 금액이 문제였는데, 이만원 삼만원으로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고, 사만원으로 할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오만원으로 결정을 했다. 방세 오만원씩 물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들리는 말에 다다마 한 장에 만원씩이란 말도 있꼬, 정하고 있던 방세를 올릴 참으로 방을 비워내라는 수가 비일비재란 말이 있는데다, 더욱이 우리는 변호사영감의 말대로 법적으로 해결을 지어서 노상에다 여관으로 쫓겨나가는 날이면 큰 일이라, 이런 방세나마 내고 타협을 얻는 후, 마음놓고 나가 열심히 장사를 해 살아나갈 변통을 하는게 나을 성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벌써 장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내는 남은 옷가지를 갖고 국제시장으로 나가고, 큰 애 둘은 서면에가서 부댓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오만원도 아내의 장삿돈에서 떼낸 돈이었다.

 

 

안방에 들어갔다. 좀만에 아내가 돌아왔다. 손에 돈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면 됐나보다 했다. 그러나 아내의 말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방을 비워 달라더라는 것이다. 영감과 큰 아들은 다다미 여덟 장방에서 자고, 큰 온돌 방에는 작은 아들과 부인이 각각 자고 있는데, 그러고는 좁아서 못 견디겠다는 말은 못하겠던지, 장발한 딸들의 말이 할머니 코 고는 소리에 도시 잠을 잘 수 없으니 기어코 그 방을 할머니 방으로 쓰게 내달라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내는 또 우리가 어떻게든 할머니 주무실 자리를 넉넉히 내어 올릴테니 그렇게 하자고 해도, 그렇게는 못하겠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인이 한다는 말이, 자기네 딸 친구가 있어 방 하나만 구해주면 금 팔목시계를 <프레젠트>하겠다는 것도 못하고 있단다는 것이다. 나는 간이 서늘해 옴을 느꼈다. 금 팔목시계라니 문제가 좀 큰 것이다. 그래, 가지고 갔던 돈은 어쨌는냐고 한즉, 좌우간 딸들 책이라도 한 권 사 보라고 놓고 오긴 했다고 한다. 이 돈만 돌아오지 않으면, 하는 것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이 돈은 도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었다. 나는 학교 나가는 날은 학교로 해서, 그렇지 않은 날은 아침에 직접 남포동 부모가 계신 곳에 가 하루를 보낸다. 이곳 피난민들은 대개 담배장사를 하느라고 해들만 남기고 모두 나간다. 부모도 그 축의 하나였다. 나는 여기서 서면 간 내 큰 애들이 돌아오길 기다려 국제시장엘 들러 애들 어머닐 만나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게 한 일과였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가 저녁에 모여 들어가니, 방안에 말 같은 처녀 둘이 와서 버티고 섰다. 이 댁 딸들인 것이다. 누가 형이고 동생인 것도 구별 안 되는, 좌우간 큰 딸은 시내 모 여학교 졸업반이라는 것이고, 작은 딸은 사학년이라는 처녀들이었다. 이들이 오늘 저녁엔 이 방에 와 자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말 같은 처녀 중의 주가 친구한테 방 하나만 구해주면 금 팔목시계를 <프레즌트>받을 수 있는 색시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이 자리를 피해야 할 걸 느꼈다.

 

그러는데 나보다 먼저 이 말 같은 처녀가 누구에게라 없이, 이삼일 내로 반드시 방을 내놓라는 말고 함께, 나에게 시선을 한번씩 던지고 나가 버렸다. 그 시선들이 멸시에 찬 눈초리였든 어쨌든 그것은 벌써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이들의 전법이 그 효과에 있어서 내게는 이들의 오빠 되는 청년이 내 따귀를 몇 대 갈기는 것보다 컸다는 것만은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아침이면 나가는 이 날은 어서 이 곳을 나가고만 싶었다. 이 날은 학교 가는 날이기도 했다.

 

풍경 달린 현관 문을 열고 나서니, 응접실 앞 거기 타는 듯이 피었다 져가는 동백나무 이편에서 변호사 영감이 거꿉어 서서, 회양목인가를 매만져주고 있다. 첫눈에도 여간 그것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태가 아니었다. 좋은 취미다. 인생이란 이렇듯 한 포기이 조목까지도 아끼고 사랑하면서 유유자적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할 종류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에 쫓기듯이 그 곳을 빠져 나왔다.

 

 

학교에서는 동료들에게 또 방 이야길 해 보았다. 상급생에게도 점잖지 못한 소릴 해 보았다. 학교가 파한 후에는 차도 안 팔아 주는 다방에 앉아, 아는 친구를 붙들고 구차한 이야길 또 했다.

 

그리고는 남포동에 와서 장사 간 애들을 기다렸다. 어둑어둑해서야 애들은 왔다. 시장의 애 엄마는 우리를 기다리다 못해 먼저 들어갔을 것 같다. 곧장 가기로 했다 남포동서 경남중학 뒤에까지 오는 동안, 아주 깜깜하게 어두웠다.

 

철판으로 된 대문을 밀어보니 안으로 잠겼다. 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대문과 마주 띄우는 우리 방이 새까맣다. 아마 애들 엄마는 아직 시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애들 이모가 일찌감치 어린 것들을 재우느라고 불을 끄고 있는 것이리라. 아내를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기로 하고, 나는 애들을 데리고 애 엄마가 돌아오려면 으레 그 곳을 거켜야 하는 개천가로 나와 쭈그리고 앉았다.

 

작은 놈이 곁에 와 붙어 앉는다. 큰 놈도 와 앉는다. 좀처럼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다. 곁에 앉은 열 두 살짜리 작은 놈 남아가 앉은채 꼬박꼬박 존다. 이렇게 초저녁인데 꼬박꼬박 존다. 어린 육체로써 자기네가 하는 일이 고된가 보다. 나는 그만 검은 하수도 개천으로 고개를 돌리고 만다. 담배를 꺼내 문다. 성냥이 일어서지 않는다. 고중에서 검은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큰 놈 동아가 혼자 일어나 집 쪽으로 간다. 좀만에 뛰어오면서, 어머니도 돌아오고 대문도 열었다고 한다. 큰 놈이 문 앞에 가 보니, 방안에서 어머니 말소리가 들려 불렀다는 것이다.

 

방에 들어가 알고 보니, 전등은 고장인지 고의인지 저녁부터 안들어온다는 것이다. 이 댁 전등은 밤 낮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특수선으로, 물론 지금도 다른 방엔 모두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잠시 우리들은 어둠 속에서 말이 없었다.

 

애들 이모가, 혼잣말처럼 내일은 어느 다리 밑으로라도 나가고 말아야겠다고 한다. 그러자 아내가, 여지껏도 그래 왔지만 오늘은 이 집에서 더 어린 것들을 못살게 굴었다는 말을 한다. 이모네 일곱 살짜리 큰 놈고 우리의 여섯 살짜리 끝 놈이 어쩌다 노래를 부른다든가, 변소에라도 가려 복도로 나가면 시끄럽다고 꽥 소리를 지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자기네 일곱 살짜리가 여봐란 듯이 보무당당히 복도를 행진하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할 때, 이곳 애들이 따라만 해도, 다시 고함소리가 연발됐다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보기에 안 된 것은 우리 선아가 역시 계집애는 달라, 동생애들이 주인한테 꾸지람 듣는게 보기에 안 된 듯, 조금만 애들이 소리를 내도 안타까워 하는 모양이 차마 옆에서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애들 이모가 어둠 속에서 소리를 죽여가며 운다. 내 가슴속도 화끈 불이 붙는 걸 느낀다. 그건 대구서 선아의 고무신 한짝을 잃었을 때와도 또 달랐다. 그러나 그들이 여하한 전술을 바꿔 가지고 나오더라도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참는 수 밖에 없다. 그저 그 전술을 최대한 피할 도리를 강구하면서

 

 

그래 우리가 생각해 낸 것이 내일부터는 낮에 이 방을 진공상태로 해 두자는 것이었다. 우리의 어린 것들은 남포동 가 있기로 하고, 이모네는 외가집에를 가 있다가 이모만이 먼저 와서 저녁 준비를 하기로 하였다. 이러고 나서야 우리는 무슨 안심이나 얻은 듯이, 어둠 속에서 싸늘히 식은 밥덩이를 찾아 목구멍에 넘길 수 가 있었다.

 

선아와 끝엣놈 경아를 데리고 나는 남포동 부모가 계신 곳에 가 하루를 보냈다. 어제 저녁에는 빗방울이 듣더니, 오늘은 그래도 날이 개서 됐다.

 

어둡기 전에 아내가 왔다. 그런데 어두워도 큰 애 둘이 오지 않는다. 경아가 졸립다고 하더니, 어머니 품에 잠이 들었다.

 

아주 깜깜하게 어두운 뒤에야 두 애는 돌아왔다. 어제 오늘은 전차 얻어 타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두애는 어미 아비와 조부모 앞에 흥겹게 품 속에 놓어 가지고 온 담배 보루며 껌곽을 솜씨 빠르게 꺼내 놓는다. 나는 도리어 그 익숙한 손 놀림이 슬퍼서 견딜 수 가 없었다.

 

잠든 경아는 내가 업고, 아내는 보퉁이를 이고, 우리는 나섰다. 동아극장 앞 큰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큰 놈 동아가 내 곁으로 다가서며, 물건 살 때 이렇게 말하면 잘 팔아 준다고 하면서, <플리즈 쌜 투 미>,하고 영어 회화를 해보인다. <쌜 투 미>가 아니고 <쎌 투 미>라고 내고 고쳐 준다. 동아는 국민학교 졸업반이다. 이제 학교엘 보내서 졸업을 시켜야 중학교엘 들어갈 수 있는 애다. 이 애가 껑충 뛰어서 영어 회화부터 배워 오는 것이다. 그것을 이 아비는 또 정정까지 해 줘야 하는 것이다.

 

남아가 또 한 옆으로 다가오더니, 오늘 참 약은 자식 하나 봤다고 하며, 이런 이야길 지껄여댄다. 어떤 꼬마 하나가 붙잡히게 되니까 거리 논 바닥에 번듯이 나가 자빠졌다는 것이다. 물을 잡은 논이었다. 귀까지 잠기는 물 속에 사지를 쭉 뻥고 나가 넘어져서는 눈을 뒤집어 솟고 입을 대고 히물거렸다는 것이다. 이 꼬마의 품안에는 몇 원의 군표가 들어 있는 것이다. 꼬마의 이러는 모양을 저 편에서 한참이나내려다 보다가 도리어 걱정되는 듯이 꼬마의 배를 몇 번 꾹꾹 찔러 보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꼬마는 알은 체 않고 그냥 눈을 뒤집어 솟은 채 입을 대고 히물거렸다는 것이다. 지랄병이라도 있는 놈인 줄 안 것이리라. 저 편에서 훌훌 가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 나는 내 옆에서 지껄여대는 우리의 이 남아도 몇원의 군표를 위해서는 지금의 꼬마처럼 그 지랄을 해야 할 걸 생각했다.

 

부성교에 이르러 우리는 오른 편으로 꺾인다. 개천 둑 길은 어둡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한데 어둡다.

 

남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리 노래 불러요, 한다. 내가, 노래는 무슨 노래, 하려는데 어머니 곁에 붙어 오던 선아가, 노래라는 말에 기다리고나 있던 듯, 부르기 시작한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나는 이 선아가 변호사 댁에서는 꾸지람이 무서워 어린동생에게 노래는 코녕 소리 한번 못 내게 주의시키던 일을 생각하고, 노래를 그만 두라는 말을 못한다. 남아, 동아도 따라 부른다.

 

 

이 노래가 끝나기가 바쁘게 남아가, 찌리링 찌리링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찌리리리링, 하며 자전거를 탄 시늉을 하고 어둠 속을 달린다. 어제 저녁에는 그렇게 졸던 애가 오늘은 웬일일까. 오늘 장사에 수지가 맞았다는 것인가.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우물쭈물하다가는 큰 일 납니다. 이번에는 자전거가 이리로 달려와 어머니와 아버지 새를 돌아 나간다. 아버지 되는 이 영감은 자전거에 치지 않기 위해 비켜나야만 했다.

 

등에서 경아가 잠을 깼다. 깨어나서는 누나가 다시 부르기 시작한,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라 오너라를 불러본다. 선아는 율동까지 섞어가며 한다. 흡사 어둠 속을 날아가는 나비와도 같이

 

누나의 노래가 끝나자, 그제는 온전히 정신이 든 듯, 경가 가 산토끼 토끼야를 꺼낸다. 이 놈도 토끼 뛰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는데, 내 등에서는 맛이 안 나는지 어깨로 기어올라가 무등을 타고서 야단이다.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로 가느냐, 산고개 고개를 나 혼자 넘어가 토실토실 밤토실 주워서 올테야. 경아는 노래가 끝난 뒤에도 그냥 토끼 뛰는 시늉을 한다.

 

나는 경아의 엉덩이 밑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생각한다. 토끼라고 하면 이 아빠도 엄마도 토끼생이다. 그러나 이 아빠 토끼는 깡충깡충 산고개를 넘어가 토실밤을 주워 오기는커녕 이렇게 어두운 개천둑에서 요맛 무게 요맛 움직임 밑에서도 비틀거리며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곡예사라는 말을 떠올렸다. 오라, 지금 나는 경아를 어깨에 올려 놓고 곡예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경아도 내 어깨 위에서 곡예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아도 나비의 곡예를 했다. 남아는 자전거 곡예를 했다. 이 남아가 이제 몇 원의 군표를 위해 그 꼬마와 같은 지랄을 해야 하는 것도 일종의 슬픈 곡예인 것이다. 그리고 동아의 <플리즈 쌜 투 미>도 그런 곡예요, 이들이 가슴이나 잔등에서 또는 허리춤에서 담배보루며 껌곽을 재빨리 꺼내고 넣는 것도 훌륭한 곡예의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황순원 곡예단의 어린 피에로요, 나는 이들의 단장인 것이다. 지금 우리의 무대는 이 부민동 개천둑이고

 

피에로 동아가 <솔렌토>를 부른다. 그래 마음대로들 너의의 재주를 피워 보아라. 나는 너희가 이 후에 오늘의 이 곡예를 돌이켜보고, 슬퍼해 할는지 이 날의 너희 엄마 아빠가 너희들의 곡예를 보고 웃었는지 울었는지 어쨌든지를 몰라도 좋은 것이다. 그저 원컨대 나의 어린 피에로들이여, 너희가 이 후에 각각 자기의 곡예단을 가지게 될 적에는 모쪼록 너희들의 어린 피에로들과 더불어 이런 무대와 곡예를 되풀이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거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쓸데 없는 어릿광대의 넋두리였습니다. 자, 그러면 피에로 동아군의 독창을 경청해 주십시오

 

한 걸음 떨어져 오던 아내가 가까이 와 한 팔을 내 허리에 돌린다. 이 단장 부인은 남편 되는 단장의 곡예가 위태로워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염려 말라고 아내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러는데 피에로동아의 노래가 마지막 대목 다 가서 뚝 그친다. 이미 우리는 그 변호사 댁이 있는 골목에 다다른 것이었다.

 

 

출처는

https://m.cafe.daum.net/brhrt/1zRe/189?listURI=%2Fbrhrt%2F1z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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