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븐4Answer [592707] · MS 2015 · 쪽지

2021-07-23 05:3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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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수생 느와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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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사교육으로 밥벌어먹고 사는 나지만, 고등학교때는 제도권 교육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서울에서 공부 좀 한다는 일반고에서 대충 시험 3주 전만 좀 빡세게 조지면 전교권 등수가 나오는데, 그 이외의 기간에 왜 공부를 더 해야 하는지 느끼지도 못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너는 내가 지금까지 교직에서 본 학생중에 가장 머리가 좋다. 근데 왜 지금보다 더 공부를 안하니?'

'너가 좋아하는 코딩이랑 소설 좀 잠시 쉬고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해볼 생각은 없니?'

내 담임선생님의 말씀이었고 난 그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누가 뭐래도 난 화성 갈끄라니깐 외치는 코인 사기범 일론 머스크마냥, 나는 그 당시 더 큰 꿈 속에 빠져 있었다. 

지금 웹소설 좀 보는 사람에게 전지적 독자 시점 모른다는건 간첩 취급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당시 달빛조각사가 딱 그랬다. 뭇 중고등학생들에게 부동의 대여점 1위 소설. 난 그 달빛조각사를 비롯 수많은 판타지 소설을 다 섭렵하며 두 가지 꿈을, 아니 크게는 세 가지 꿈을 꾸고 있었다. 


이영도(드래곤 라자 시리즈, 눈물을 마시는 새 등 명작을 남긴 한국 판타지계의 거장)의 뒤를 이어 한국 장르소설계의 트렌드를 바꾸는 자가 되겠다. 

달빛조각사의 가상현실게임 로열로드처럼, 나는 가상현실 게임을 개발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내가 개발한 소설을 바탕으로 가상현실 게임을 개발해 김택진 저리가라 하는 게임계 재벌이 될 것이다. 


이야, 지금 다시 쓰고 봐도 참 가슴이 웅장해진다. 무슨 깡이었을까. 


시험기간이 아닌 때는 자습실에서 소설을 썼다. 그리고 자습이 끝나면 그 소설을 당시 우후죽순 난립하던 인터넷 소설 카페에 연재하고 반응을 봤다. 심지어는 내 소설의 팬이라는 사람과 채팅을 주고받다가 실제로 만난 적도 있긴 했다. 웁스. 

남는 시간에는 알고리즘 공부를 하거나, 카페 관리를 했다. 한국에서는 비인기팀이었던 어떤 팀의 팬카페를 개설해 매니저를 하며 3000명대 카페로 키웠고 지금도 그 카페 올드비들은 다 내 닉을 기억할 정도니 참 공부 말고 많은 일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나 선생님을 비롯 주변의 어른들은 그때 내 공부머리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저건 서울대 갈 재능이다'생각해 더 밀어붙이려 했으나, 나는 상술했듯 대학에 큰 관심이 없었다. 내 내신에 포트폴리오면 연고서성한 정도는 가능했고, 실제로도 사후조사를 해보니 서성한까지는 학종으로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정도 학벌이면 만족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카이스트? 포스텍? 뭐 대외적으로 어른들한테야 가고 싶은척 했지만 진짜 대학에 관심이 없는걸 어떡하라고.


그리고 그러한 꿈 같던 시간들은 스물둘이 되고, 파편이 되어 내 가슴 속에 비수로 꽂히고 말았다. 대학에 대한 나의 무욕과, 주변의 욕심이 부딫혀 빚어낸 참극이 그 당시의 나였다. 


고등학교때는 대학에 관심이 없던 나였지만, 결국 스물 둘이 되도록 자리잡지 못한 채 떠도는 나를 보며, 그리고 나보다 저 앞에서 나가고 있는 당시 경쟁자이자 친구들을 보며, 극한의 자기연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스포츠에 보면 '몇대 유망주들 근황.jpg'이런 글이 많이들 올라온다. 누군가는 메이저리그에서, 레알/바르샤에서 뛰고 있고 또 누구는 2군이나 변방리그를 전전하는 삶을 산다. 그래 내가 바로 그 전전하는 전형적인 똥망주가 되어 있었다. 

당시 전교권에서 놀던 친구들이 간 대학을 보면, 서울대 기계공, 울산대 의대, 고려대 의대 라인업들이 아주 화려하고, 나보다 등수가 낮았던 친구들도 연고서성한은 다 가있었는데, 나는 자리를 못잡고 이러고 앉아있으니 이게 똥망주가 아니면 무엇이리. 


4월경, 집에서 나와 학교 근처 고시원에 들어갔다. 대외적으로는 학교 생활을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 이것에는 좀 어이없는 사연이 있었다. 내 인생이 하도 이상하게 흘러가니 아버지도 참다 못했는지 점을 보러 가셨나보다. 거기서 부자가 떨어지면 잘되는 팔자라는 얘기를 듣고 단 하루만에 분가가 결정되었다. 아 물론 나는 존나 땡큐였다. 안그래도 집에서 눈치 보여 죽겠는데 나가라니까 얼마나 좋아. 이제 학교 끝날 시간에 맞춰 집 가지 않아도 된다? 진짜 감사한 일이지. 장수생이나, 입시에서 실패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엄마밥이 좋지만서도, 집에서 눈치 보이는거 생각하면 나가 사는게 훨씬 낫다는 것을. 물론 그 당시 아버지는 내가 학교성적 이미 박고 제적의 칼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셨다.ㅋ


그렇게 2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자며, 근처 동사무소 무료 독서실에 가 깨작깨작 공부를 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3수때 존나 열심해 해놓고 노력의 배신을 심하게 겪었기에, 조금 공부하니 그 가락이 다시 나오는 느낌은 들었다. 하지만 그 시기 가장 큰 문제가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40분 이상 공부를 하면 정신의 파행이 일어나 도저히 책에 집중이 되지 않았고, 이유 없는 분노가 차올라 공부를 지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에라이 씨부레 여기는 엘베도 없냐 중얼거리며 5층 독서실에서 1층까지 걸어 내려와 줄담배를 피웠다. 정조 실록에 남은 기록에 보면 '남령초(담배)는 나의 폐장을 윤택하게 하며 정신을 맑게 한다'라고 정조가 그랬다는데, 그 당시 내가 정조 시대 관리였으면 아마 정조랑 하이파이프 치면서 맞담배를 맛깔나게 피웠을 것이다. 


그렇게 한 자리에서 두세대 피우고 나면 그제서야 좀 다시 공부가 가능한 상태가 되어 독서실에 올라가 깨작깨작 책을 봤다. 


더 큰 문제는 불면증이었다. 밤에 잠이 오지를 않았다. 가슴이 짓눌리듯이 답답해서. 자기 위해 술에 입을 대기 시작했다. 우리집안 남자들은 대대로 말술이었지만(내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소주 됫병을 두병 세병씩 매일 드시고도 장수하신 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께 술과 담배는 나쁜 것이라고 배웠고 '엄마 전 성인 되어서도 술 담배는 안할거에요!'라고 낭랑하게 외치던 어린이는 어디로 가고 술과 담배에 찌들은 한 폐인새끼가 있었다.


당시 하루에 담배를 한갑 반에서 두갑을 피우고, 잠이 오지 않으니 떠올린 방법이 소주 한병을 원샷때린 다음에 말보로 레드(한국에서 시판되는 가장 쎈 담배)를 두개 연달아 피우고 잠을 잤다. 또 웃긴건 집안 DNA에 각인된 말술 유전자 때문인지 다음날 그러고도 숙취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또 독서실에 꾸역꾸역 출근도장은 찍지.


자, 정신과를 공부해보거나, 심리상담쪽 공부를 해본 사람이면 저거 무슨 증례인지 바로 예상이 갈 것이다. 전형적인 MDD(우울증)이다. 그 당시 나는 정신과나 이런 쪽에 무지했기에 내 상태를 정확하게 몰랐고, 그때 적절한 약물 치료를 받았으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싶긴 하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만. 그래서 그런가 사이트에서 나랑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수험생들을 보면 빨리 병원 가보시라고 한다. 그때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근데 또 전해에 열심히 쌓아둔 공부 스택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진짜 입시의 신이 존재하는 것인지, 그 너덜너덜한 멘탈 상태로 공부를 해도 이상하리만치 감은 또 돌아오긴 했다. 그렇게 깨작거리며 준비했더니 한달 반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어느덧 6평이 다가왔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모교가서 볼 엄두는 나지 않았고, 다른 학원들을 알아보니 자리가 금방금방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강남의 J학원을 2년간 다녔었는데, 결국 내키지 않았지만 같은 계열인 중구쪽 J학원에 자리가 나서 그쪽으로 신청했다. 그래도 원래 학원 쪽팔리게 다시 안가는게 어디냐며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긴 했다. 


그리고 대망의 6평 전날, 여느때와 같이 잠이 오지 않았지만 그날만큼은 무슨 최소한의 양심인지 술에 입을 대지 않았다. 아니 뭐 오랜만에 본가 와서 자는 날이라 그런가 못마신쪽에 가깝긴 하겠지만. 근데 잠이 안왔다 시부레. 그래서 아프리카 방송을 보다 보니 밤을 새고 말았다. 결국 몽롱한 상태로 시험장으로 향했다. 


국어. 원래 국어야 뭐 오랜 기간의 소설 집필 짬바와 독서량이 있다 보니 고정 100에 가까운 실력이었고 쉽게 풀었다. 수학. 이때 느꼈다. 내 머리가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예전에는 뭔가 직관으로 어떻게 풀지 파바박 길이 떠오르곤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되지 않았다. 손을 쓰는 빈도가 늘어났다. 아 이게 장수생들이 말하는 머리가 굳는 과정인가 생각하며 꾸역꾸역 풀었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담배를 들고 흡연구역을 찾다가 끽연자들이 많이 보이는 곳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을 마주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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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이렇게 큰 성원을 보내주실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실 그냥 일필휘지로 퇴고 없이 싸지른 똥글에 가까워서 글만 띡 써놓고 잊어먹고 있었거든요. 한 주가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고요. 

오늘 글은 좀 많이 어둡습니다. 근데 또 어둠이 없으면 느와르라는 말이 붙겠습니까. 어둠과 암울함 속에서 한 줄기 라이터 빛처럼 생기는 희망, 우정, 사랑 또 이런게 있어야 느와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다음편을 또 쓰게 된다면 그때는 이번편보다는 좀 밝을 것 같습니다. 거의 의형제를 맺은 친구와의 만남, 대치동에서의 이야기, 게이사우나 썰 등 또 한편의 희극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원래 삶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 저는 정말 공감합니다. 지금도 제가 저 시기 저를 보면 희극처럼 얘기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진짜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거든요. 

시간이 난다면 좀 더 밝아진 다음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아울러 당시의 저와 비슷한 증상을 가지신 분들이면 정말 저는 고민하지 마시고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정신과가 예전같이 그런 이미지도 아니고, 치료 받아야 할 사람들이 치료 안받는건 정말 병을 더 곪게 할 수 있거든요. 뭐 정 힘드시면 저한테 쪽지주세요. 시간은 많이 없지만 지금도 접속하는 틈틈히 쪽지 확인은 다 하고 답장은 다 해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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