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코코 [1019873] · MS 2020 (수정됨) · 쪽지

2021-05-07 04: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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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지도 교수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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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요. 자리에 앉아요. 가방은 내려두고.” 

 교수님은 간이 의자를 멀찍이 세워두고 앉으셨다. 대면 수업도 모두 취소된 마당에 가까이에서 상담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수강편람을 살펴봤는데, 학생은 일반생물학을 제외하고는 모두 인문학 교양이네요? 왜 그렇게 신청했죠?”

 차분하신 목소리에 적잖이 당황했다. 지금껏 해본 어떤 상담에서도 저의를 물어본 적은 없었다. 몇 개월간 속으로 끙끙 앓던 고민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살짝 떨궜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전공 공부하기 전에 다양한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고 할까? 생물학 교수님 앞에서 생물학보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사실 어떤 일을 해야할지 고민 중입니다. 문학 관련해서 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이 축축해졌다. 손바닥을 쫘악 펴서 허벅지 위를 문질렀다. 곧 교수님은 레포트 패드를 하나 꺼내시며,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래요...어떤 문학을 좋아해요?”

 “시를 좋아합니다.”

 교수님은 흥미롭다는 듯이 노트 위에 하나하나 적어가기 시작했다.

 “어떤 시인을 좋아해요?”

 속으로 한 다섯명을 꼽았다. 입 밖에 나온 시인은 허수경 시인과 이병률 시인 두 분이었다.

 “이병률 시인...그 ‘끌림’ 쓴 작가 아닌가?”

 나는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은 시집이나 산문집을 따로 사서 읽지는 않으셨지만, 신문에 기고된 글들을 챙겨보셔서 알고 계셨다. 


 “그래요. 그럼 우리 과에 온 이유는 뭐죠? 유사한 과들도 많은데 여기로 온 이유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점수를 맞춰서 온 것도 있습니다. 다만, 만약 이 전공을 계속하게 된다면 생물자원관에서 일해보고 싶습니다. 가장 적절한 전공이라고 생각해서 왔습니다.”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아요. 그럼 전공은 잘 선택했어요. 식물 병리학은 좀 그렇고... 곤충학을 전공하는게 좋겠네요. 이 일을 계속 한다면 문학은 어떡할거죠?”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타협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나는 아직도 ‘타협’이 적절한 단어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요. 식물학자 이유미 수목원장이라고 계시는데, 글 쓰는 식물학자. 국립 수목원장에서 최근에 세종 수목원장으로 왔는데... 하여튼 이분처럼 전문분야를 문학적으로 녹여내 봐요. 어떤 일이든 글잘쓰는건 플러스 요인이 될겁니다.”

 이어 말씀하셨다. 

 “일단 계속 할 생각이 있으면 계획을 세워봐요. 대학 노트에다가 어떻게 연구사가 될지 적어보고... 움츠려 들지 마요. 어깨도 피고, 과사 들려서 조교 분들께 인사도 드리고...” 

 인사를 거듭 드리며 교수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나는 여전히 반수를 준비하고 있다. 재미도 없고 재능도 없는 과학탐구를 작년에 선택한 탓에 원치 않는 성적이 나왔다. 무조건 학교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수학 문제 푸랴, 시집 읽으랴, 일반생물학 공부하랴...그 중 일반생물학이 제일 재미가 없다. 그래도 교수님이 말씀하신 글 쓰는 생물학자가 될 수 있다면? 처음으로 일반생물학을 열심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될진 나도 모른다. 다만 뭐가 되든 교수님을 다시 찾아 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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