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백전백승 [461458] · MS 2013 · 쪽지

2021-04-21 05: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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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대 예과생을 위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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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오르비에 들어온 것 같다.

시험기간이라 속에 쌓인 게 많아서 글로써라도 뱉어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에 들어오게 되었다.


예과때 나는 지독한 한까였다.

한까에서 본과2학년까지 무사히 오게 된 데에는 수많은 사유와 고뇌가 있었지만

이 글에선 그걸 다루고자 함은 아니고


적당히 한의대에 와서 반수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맹렬한 한빠도 아닌

그냥 평범한 한의대 예과생을 위한 글이 될 것 같다.

해주고 싶은 말이 많다. 특히 과거의 나에게......



이 글의 핵심 결론을 먼저 말해야겠다.


☆ 예과 때도 공부해야 된다.


내가 한의대 입학하고 예과 때 수도 없이 들은 말이 있다.


예과 때는 놀아도 된다.

나아가서, 학부생 때는 적당히 놀아도 된다.

학교 내용과 임상은 하늘과 땅차이다.


뭐 이런 류의 내용들이었다.


이런 말을 즐겨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바로 학점이 중위권 이상은 된다는 것이다.


'공부를 한다'의 개념은 상당히 거쳐야 될 난관들이 많다.


순서대로 1. 수업을 듣는다. 2. 수업 내용을 이해한다. 3. 시험기간에 공부를 한다.


나는 초, 중학교 때 단 한번도 학교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고, 고등학교는 자퇴를 했고, 수능 공부는 90%를 인강, 책 위주로 했기 때문에

1번부터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한기일까지 과제를 제출해야된다는 사실조차도 항상 친구들에게 물어봤어야 했다.


그 상황에, 예과 때 놀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편했는지 모른다.

바로 1번부터 걸렀다.

그리고 예2때 10개 전공과목 중 8개 과목에서 F를 받고 유급을 당했다.

(예1 학점 : 1학기 - 1.82 / 2학기 - 1.81. 난 생존 전문가였다.)


놀아도 된다 라는 말의 정의는 개개인이 살아온 역사와 습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특히 정시 n수로 온 친구들에게는 더욱이 주의해야할 말이다.



그리고, 대학 공부의 단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과 1학년 때 배우는 한의학 한문, (우리 학교는 맹자를 이용했다.) 이것부터 살펴보자.


이 과목을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는 무, 소, 중, 대 의 4가지 단계가 있다.


無 : 안 한다.

小 : 한자를 익힌다. ( 이 단계부터 진급이 가능하다. )

中 : 한문을 익힌다.

大 : 내용을 익힌다.



소의 단계. 

한자를 익힌다. 간단하다.

한자를 알고 들어오는 한의대생의 수는 극히 적다.

가끔 1, 2급 따고 들어오는 친구들은 1년을 편하게 지내지만, 대다수는 숫자 1~9도 한자로 쓸줄 모른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맹자에 나오는 한자 정도만 익힌다. 보통 이 정도만 해도 D~D+ 정도의 학점으로 진급이 가능하다.



중의 단계. 

한문을 익힌다.

한문과 한자는 다르다. 영단어와 구문의 차이 정도 되겠다.

다만 더욱 ㅈ같은 건, 한자는 뜻 언어이기 때문에 뜻을 알아야 한문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구문 해석을 통해 문장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는데, 한문은 반대로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야 해석이 가능하다... 매우 ㅈ같다.

그래서 수업이 필요하다. 또한 어조사에 대한 이해와 자주 나오는 유형의 문법 또한 익혀야 한다.

이 단계를 거치면, 대충 아는 한자로 이루어진 한문에 대해 적어도 해석 흉내라도 낼 수 있다.



대의 단계. 

내용을 익힌다.

맹자 1권 1장은 인의를 강조하며 백성을 이끄는 주도자로서의 이상적인 덕목을 제시한다.

1권 3장은 호연지기 파트로, 개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되는가에 대한 이상적인 길을 제시한다.

이 과정 속에서 인,의,예,지 와 氣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

즉, 내가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척 의문과 사유로까지 넘어갈 수 있다.




문제는 뭘까? 무의 단계는 처음에 설명한, 나의 경우와 같이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소 중 대 의 단계.


예과 2학년으로 넘어가면 또 한의학 한문 과목이 있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필요한 능력치는, 맹자에서의 중의 단계부터 시작한다.

본과 1학년으로 넘어가면 황제내경이 있고, 본과 2학년으로 넘어가면 상한론이 있다.

여기서부터는 맹자에서의 대의 단계가 이 과목에서의 소의 단계로 가게 된다.


즉, 최소 '중의 단계' 정도는 해두어야 다음 커리큘럼에 해당하는 과목에서 기본은 칠 수 있다.


그런데, 예과 때 놀라는 말을 듣고, '소의 단계' 정도의 공부만 하게 된다면


다음 학년이 되었을 때 고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근데 이건 원전 커리큘럼에 해당하는 예시고.

이런 커리큘럼이 5~6개는 되는데.

1학년 기초화학, 기초생물학 -> 2학년 생화학 -> 본1 생리학 미생물학 -> 본2 병리학 약리학 등등


그리고 또

한의학개론 -> 한의학원리론 -> 한방생리학 -> 한방병리학

이거 예과 과정 때 한의학적 사고 방식? 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사유하는 시간이 없으면

(이게 개론에서의 중의 단계에 해당한다.)

본1 때 한방생리학, 본2 때 방제학, 병리학같은 거 하면서

뒤늦게 이 개 무당 내용 왜 공부하는 거지? 이런 생각하게 된다.




이제 슬슬 감이 올 것이다.

'중의 단계' 에 해당하는 정도의 공부를 해야 한다. 매년.



비단 한의대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당장 내가 있는 학번에 해당하는 과목의 필요성은 보통

그 다음 학년이 되어서야 느끼게 된다.

내가 당장 3년 전의 나에게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그리고 임상에 나간 한의사들이 학교 내용은 임상과 다르다고 하는 말...

이건 나도 아직 학부생 찌끄래기라 와닿지는 않지만.

결국 임상에서는 자주 오는 환자들은 대충 무슨 병에 걸려 오는 게 정해져 있고.

그에 맞는 처방만 잘 알고 있으면, 그래도 의사 노릇은 할 수 있다.

학교 때 별의별 쓸데 없는 거 공부해봤자 결국 임상에서 쓸모 없다...

뭐 이런 의미인 것 같다.


맞는 말같다.

근데 내 생각은... 학교 공부는 폴더를 만드는 것이다.

임상에서는 수많은 환자와 접하면서 여러 가지 파일들이 생기게 된다.

그 파일들을 넣을 폴더가 정리가 되어있으면 되어있을 수록 임상에서 쌓은 데이터들의 축적 효율이 확연히 다를 것이다.


폴더가 대충 정리되어 있어도

국시 쳐서 어쨌든 면허 받은 한의사들이라면 바보들이 아니기에

임상 뛰면서 자체적으로 폴더를 정립할 수 있는 건 당연한 소리다.

그래서 학부생 때 공부를 대충 해도 상관이 없다는 건데...


모르겠다. 적어도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을까?


내가 한의대 적성과 관련해 고민할 때

아버지가 아는 지인 한의사 분들 3명을 소개해주셨다.

다들 월에 순수입 4~5천은 되는 분들이었는데, 특징이 있었다.

진료 시간 끝나고 공부를 ㅈㄴ 열심히 하신다...


사실 임상에 나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학교 지식만 있는게 아니다.

사람 다루는 능력, 경영 능력 등등 뭐 많다.

그러니까 학교 다닐 때 대외활동 많이 하면서 사람 많이 만나 보라고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피와 살이 되는 조언같다.

근데... 그걸 나같은 인간은 '공부 안해도 된다'라는 단편적인 내용만 수용해버리니까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유급생이 된다. 나처럼...



그리고 본2인데 어제 경혈학 공부하는데 본1때 했어야 될 기본 지식들조차도 없어서

애 많이 먹었는데... 자괴감 들어서 쓴 글이다.

결론은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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