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 [966253] · MS 2020 (수정됨) · 쪽지

2020-11-26 02: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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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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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프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내 일대기를 푸는 그런 글이 되어버렸다


오늘 아빠가 오른쪽 가슴이 칼로 찌르는 듯하게 심하게 아팠다는데 역류성 식도염이나 부정맥 같은건가요? 내일 병원가보라고 아까 한참 얘기하고 왔는데 많이 불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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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8과 이어지는 내용


그렇게 창고같은 단칸방에서 우린 시작했다

화장실은 걸어서 1분 거리에 푸세식 화장실이였다

물론 나는 조개껍데기 같은 변기에서 용변을 처리했지만

엄마 아빠는 그래도 이혼하려고 하기 전에는 부산에 체어빌이라는 그래도 꽤 괜찮은 아파트에서 살았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할아버지가 망했었지만 그래도 아파트까지 재기하셨음)


그 시절 기억은 아직 몇몇 남아있다

양복점 아저씨 집에서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곳도 있었고 집이 복잡하게 엄청 넓었다


하루는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컵케잌을 사온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 부터 잘 울지도 않고 얌전하고 조용했다

뭘 사달라고 땡깡을 부리지도 않았고 말도 너무 잘들었다고 했다

근데 그날은 40분 거리 시내의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처음으로 뭔가 사달라고 졸랐던 것 같다

트럭을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그 노란 컵케잌을 들고 기분 좋아했던게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단칸방에는 전자레인지를 놓을 공간도 그리고 그걸 살만한 여유금도 없었다


어찌저찌 양복점 할아버지네 집에서 그걸 먹었는데 그게 너무 맛있었다

밀가루랑 계란 하나랑 넣고 잘 저어서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되는 음식이었는데

내가 중학교 때 까지 많이 사먹었었다 어느순간부터 보이지 않아서 잊고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있는지 모르겠다

이거다 아직 단종되진 않은 것 같아서 기분은 좋다

이 일기를 안썼다면 다신 맛볼 수 없었겠지 ㅋㅎㅋㅎ

수능 끝나면 사먹어봐야겠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우린 그렇게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빚은 겉잡을 수 없이 컸고

 아빠가 열심히 벌었지만 돈을 벌어도 빚은 줄지 않았다


난 어렸을 때고 지금도 그때 기억은 단편적이라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세힌 알 수 없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었다면

아마 우리 가족은 뉴스에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우린 그렇게 악착같이 버텼다


열심히 벌어서 동네의 16평? 18평? 정도의 빌라로 이사를 가게됐고

우린 거기서 또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아 사실 내가 느린년생이 된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단칸방에 살 때 학교 갈 나이가 됐지만 날 홈스쿨링을 시키려고 했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뭔가 금전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더 나아져서 빌라로 이사를 가고나서 난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생활은 무척 즐거웠던 것 같다

반은 14명 정도 있었던 것 같고 난 초등학교 때 한 여자아이를 4년동안 좋아했다가 결국 6학년 2학기 겨울방학즈음 고백했고

그렇게 우린 연인사이로 발전했다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헤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너와 난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서로 부끄러워서 만나지도 못하고 카톡만 하는 근거리인데 장거리인 연애를 했었다

그 후로 너랑 다시 친해지는데 참 오래걸렸는데

지금은 뭐 좋은 친구로 남아줘서 고맙단 말을 하고싶다


초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별 일 없이 지나갔고

나는 몇차례 수술을 더 받았다 이때 전신마취를 2번 경험했다

사는게 힘들때면 앞으로 난 4번 가까이 전신마취를 했고 태어나자마자는 죽을뻔한 사람이다! 라고 외치면서 버텨볼까 한다


내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 우리집은 결국 파산하고 빚을 면책 받았다

아빠 혼자서 연탄 배달로 빚을 갚으려면 우린 평생을 갚았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난 당시에 어려서 파산이라는게 별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돈 빌려 준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엄청 미워했을 것 같다

내가 성공해서 돈을 벌 때 까지 살아계신다면 보답해드리고 싶다


난 그렇게 계속 자랐다

돈은 쥐뿔도 없어도 싸구려 옷은 안입힌다는 부모님의 말씀 때문에

신용 카드도 없는 형편에 메이커 옷만 입었다

태권도 학원도 다녀보고 수학학원도 다녀보고 미술학원도 다녀봤다

또 돌봄센터 비슷한 곳에도 다녀봤고 용돈도 떨어질 때 마다 계속 받았다


돈은 없어도 나한테는 티를 안내려고 했었던 것 같다

물론 다 알고있었지만 지금은 그 과거가 너무나도 고맙다

돈은 없었지만 우린 부족함 없이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다


난 초등학교 저학년 때 누군가가 컴퓨터를 줘서 그때부터 혼자 야후에 들어가서 게임도 해보고

당시에 광고중에 지금으로 치자면 뭐 아이폰 12를 공짜로 준다는 광고? 그런걸 아침에 보고서는 엄마한테 이거 당첨 됐다고

어떻게 하면 되냐고 그렇게 신나서 막 물어봤다

물론 엄마도 광고라는 걸 아셨지만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아빠한테도 보여주라고해서 하루종일 게임도 안하고 그 당첨 창을 띄워놓고 아빠가 올 때 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이 바보..


그때부터 혼자서 컴퓨터로 게임도 하고 막 만져보면서 생긴 관심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본인 수상 경력은 초등학교 때 더블클릭 제일 빨리하기

한컴타자 타자수 빠르게 치기 같은 컴퓨터 관련한 수상도 았다

이야기가 신나서 점점 산으로 가는데

사실 내가 중고등학교 때는 우리 집안이 많이 안정을 취하게 됐고

그만큼 더 행복했기 때문에 무겁게보단 가볍게 생각의 흐름이 막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자기 전 마지막 챕터를 풀자면

내가 살면서 죽음이라는 걸 직감한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중학교에 처음 입학하자마자 난 2일만에 학교를 빠졌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급히 천안으로 내려갔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부터 담배와 술을 즐겨하셨고


폐암으로 시작해 대장암으로 생을 끝마치셨다


할아버지 집에가면 외증조할머니 증조할머니 할머니 이모할머니 고모 할아버지 이렇게 다같이 살고 계셨는데

증조할머니 둘이서 날 그렇게 예뻐하셨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폐암에 처음 걸렸을 때 증조할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자기 아들보다 오래 살 수는 없다며 그렇게 목을 매달고 우리 가족의 곁에서 떠났다


외증조할머니도 꼬부랑 할머니의 나이를 넘어서도 담배를 계속 피셨는데 외증조할머니도 폐암으로 돌아가셨던 것 같다


사실 두 증조할머니의 죽음은 그렇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시기적으로는 내가 초등학교 때였고 죽음이라는게 썩 달갑지않게 느껴질 뿐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땐 달랐다

할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전전긍긍 할 때 엄마와 나와 이모할머니는 할아버지 집에서 기다렸다

수많은 가족이 병원에서 잘 수도 없었고 난 어렸기에 밖에서 재울 수도 없었다


근데 그날 새벽 할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그 후에 들은 바로는 엄마와 나와 이모할머니를 제외한 가족들이 임종을 지켜줬는데


할아버지가 계속 고개를 돌리면서 애써 누군가를 찾으려 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어른들은 날 찾는거라고 했지만 그때 난 엄마와 이모할머니와 집에서 자고있었기에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린다

할아버지가 진짜로 내 얼굴을 보기위해서 끝까지 고개를 돌리셨든 아니든 이때가 돼서야 난 죽음이라는게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다가 다음날 장례식을 갔을 때 난 아빠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장례식장에 긴 통로 끝에 아빠가 있었고 엄마랑 손잡고 난 아빠에게 갔다

곧바로 아빠는 날 안았고 나도 그런 아빠를 안아주었다

아빠는 그렇게 내게 안겨서 한참을 울었고

그런 아빠한테 안긴 나도 같이 울었다


아직까지 그 이후로 아빠의 눈물을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강한 우리 아빤데 그날의 눈물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렇게 난 생이별을 여러번 겪었고 그 해에 12월쯤

외할아버지도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심지어 이모부의 외갓집에서도 그 다음날 누군가가 돌아가셔서 그당시에

줄초상으로 난리가 났었다


다음편에 계속


오늘 글은 두서도 없고 잘 안써져서 아무말 대잔치 한 것 같다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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