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고 조경민 [875628] · MS 2019 (수정됨) · 쪽지

2020-10-25 23: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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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고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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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고1때까지만 해도 성남고등학교에는 심화반 제도가 있었다. 내신 30등까지의 학생들을 모아두고 독서실을 제공하여 야자를 시키는건데, 이게 아주 골때리는 제도였다. 학생들을 심화반-비심화반으로 구분한 것이 너무 뚜렷했고, 어떤 선생님들은 출석부에 심화반 학생들 이름만 적어오기도 했다. 중학교때 100몇등을 하던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공부를 시작한다고 했는데, 당연히 심화반에는 들지 못했다.


심화반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이 야자를 하려면 '도약반'에 들어가야 했다. 체육관에 책상 100개를 깔아놓고 정해진 시간동안 선생님들이 감시하면서 공부를 시키는데, 여기서 공부하는게 자괴감이 매우 심했다. 스포츠의 3부 리그나 암살교실의 열등반 느낌이 강했다. 선생님들도 도약반 학생들을 무시한다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많이 느꼈다. 도약반은 한 달 하고 내가 때려쳤고, 공부할 맛이 안 나서 결국은 고1 전체를 거의 날려먹었다. 학교 탓하는게 웃기긴 한데, 만약 심화반에 들어갔더라면 조금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웃기게도 이런 심화반 제도는 정작 심화반 아이들의 반발로 없어졌다. 공부를 잘하면 특혜를 줘야 하는데, 강제로 야자를 시켜서 학원도 못 다니게 하는게 어떻게 특혜냐는 얘기였다. 비심화반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심화반 독서실이 너무 큰 특혜 같았지만 그건 또 아니었던 거다.


아마 성남고의 역사에서 심화반 때문에 상처 입은 학생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화반이 없어지고 나는 처음으로 1등급을 받아봤고, 공부할 맛이라는게 생겼다. 아직도 왜 저런게 있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2. 사립 고등학교다 보니까, 선생님들이 몇십년씩 근무하신다. 이렇게 되면 선생님들이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전날 술먹고 교실에 들어와서 자습시키고 주무시는 분처럼, 그냥 출근만 하시는 분들이 첫째 부류였다. 이 분들은 뭐... 학생들한테 재밌는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셨다. 사람은 좋았다.


둘째 부류는 학교 입결을 정말 자기 일처럼 생각하시는 분들. 매일 11시까지 남아서 학생들 자소서 봐주고, 질문 받아주고, 상담해주고, 수업 준비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질문도 안하고, 자소서도 혼자 썼던 나는 크게 덕을 보진 못했지만 열심히 일하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3. 학교 설립자가 친일파 인명 사전에 등록된 사람이고, 이사장이 그 분 손자다. 교장실에는 아직도 일제 군복을 입던 설립자의 사진이 걸려있고, 교가에는 설립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설립자를 찬양하는 내용과 일제 통치를 은유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뭐 소설 설정 같은데 진짜다. 이 부분에 대해 정말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선생님들도 계셨지만 결국 사립 고등학교다보니 다 좋게좋게 넘어가시더라.


나는 이것과 관련해서 학교에 컴플레인을 상당히 많이 걸었고, 자소서에도 이 내용을 썼다. 고3 담임 선생님은 내 자소서를 굉장히 좋아하셨는데, 수시는 결국 광탈했다. 고3때 꿈이, 대학을 딱 합격을 하고 혼자 교가 개정과 관련하여 1인 시위도 하고, 방송국에도 제보하고 하는 거였는데... 막상 수능 끝나고 나니까 '굳이?' 이 생각이 들더라. 이래서 사회에 변화가 이뤄지기가 힘들다 ㅎ





4. 결론적으로 성남고라는 학교 자체를 크게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특이한 학교였던 만큼 기억에 남는 부분은 많았다. 작년 초에 오르비에 가입하면서, 적당히 또라이 같은 이름을 짓고 싶었는데, 신상을 완전히 공개한 닉네임을 쓰면 재밌겠다 싶었다(이때는 강사를 하겠다는 생각이 크게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사람들 기억에도 오래 남고, 지금까지 쓴 칼럼들이 다 하나의 이력이 되었으니...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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