옯옯옯르비 [858186] · MS 2018 · 쪽지

2020-10-24 14:53:51
조회수 108

칸트 형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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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자의돌생활과윤리연구소 · 998748 · 10/24 15:12 · MS 2020

    설마 칸트가 악을 행하라고 했을까요...

  • 현자의돌생활과윤리연구소 · 998748 · 10/24 15:15 · MS 2020

    서울대 칸트 권위자 백종현 교수님의 책

    『한국 칸트철학 소사전』(백종현 지음, 아카넷) 73p~76p

    '좋음/선'과 '나쁨/악'이 오로지 이성의 개념 내지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의지 즉 행위와 관계된 것인 한에서, 그것은 "인격 자체"에 대한 가치어이다. 이런 맥락에서 '좋은'은 차라리 '선한'으로 대체하여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좋은'은 그러니까 결국 간접적으로나마 '선한' 것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인격의 감정 상태가 인격의 행위들과 관계한다고 보는, 아니 그러한 의미 연관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는 '좋은'은 '선[한]의지', '선[한]행[위]', '선한 사람' 등에서 보는 바처럼 '선한'의 대체어이다. 그리고 이런 용례의 '좋은'은 도덕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선한'을 이렇게 도덕적 의미에서만 사용할 때, '무엇을 위해' 좋은 것,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좋은 것은 '선한' 것에서 제외 된다. 그러하니 도덕적으로 좋은, 즉 선한 것이란 어떤 감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성을 매개로, 순전한 개념에 의해 적의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만약 굳이 '도덕적으로 좋은' 역시 '무엇을 위해 좋은'이라고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데에 좋은' 다시 말해 '인간이 인격으로 존재하는 데에 좋은'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구별하여 보면 선악이 화복과 다름은 확연하다. 이성의 원리인 선험적 실천법칙이 욕구능력의 가능한 대상들을 고려함 없이 그 자체로 의지를 규정한다면, 이러한 의지에 의한 행위는 선하고, 그 준칙이 항상 이러한 법칙에 적합한 의지는 그 자체로 선한 것, 즉 선의지라고 일컬을 수 있다. 반면에 의지가 쾌·불쾌 내지 쾌락과 고통의 대상에 의해 규정받아, 즉 경험적으로 어떤 것은 추구하고 어떤 것은 회피하면 그때 추구되는 것은 복(福)이고 회피되는 것은 화(禍)일 뿐, 그것이 곧 선악은 아니다. 이렇기에 도덕적으로 좋음-나쁨 곧 선악은 감성적인 호오(好惡)나 복화(福禍)와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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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확인하실 수 있듯,

    칸트에게 도덕적 선악은 범죄자에게 고통을 주고 안 주고, 또는 범죄자의 물리적 악행을 돌려주고 그런 것이 결정하는게 아니고요.

    도덕 법칙에 근거하여 선의지의 의욕에 근거하여 행위 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형벌은 도덕 법칙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므로
    도덕적으로 선(善)입니다.

  • 옯옯옯르비 · 858186 · 10/24 20:03 · MS 2018

    감사합니다
  • Zola · 758219 · 10/24 18:45 · MS 2017 (수정됨)

    공리주의와 달리 칸트에게는 나쁘다와 악[그름]하다는 구분해야 하는 개념입니다. 칸트에게 형벌은 범죄자에게 나쁜 것이기는 하지만 도덕적으로 악하다고[그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 옯옯옯르비 · 858186 · 10/24 20:03 · MS 2018

    감사합니다
  • 현자의돌생활과윤리연구소 · 998748 · 10/24 20:28 · MS 2020

    옳으신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