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G [978175] · MS 2020 (수정됨) · 쪽지

2020-09-20 07:5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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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71에서 중앙대까지의 기록-6 (수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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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71에서 중앙대까지의 기록 수기 보러가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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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는 매주 일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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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시절 선생님들이 가장 강조하셨던 점은 ‘실수를 줄여라’였다. 어차피 수능은 쉽게 나올 것이니, 상위 등급컷이 높고 또 잘게 쪼개지기 때문에 실수를 줄여야 문제 하나로 등급이 떨어지는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옳은 말이었지만 실수를 줄여야 하는 충고는 어느 정도 베이스가 깔려있던 상위권 수험생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었고, 수능을 보는 게 실수였던, 베이스는커녕 아래 자체가 없던 필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던 말이긴 했다.


 2016학년도 6평과 9평이 모두 쉽게 나왔기 때문에 수험생과 전문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당해 연도 수능 역시 쉬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1년 내내 쉬운 난이도를 유지하던 출제 경향이 수능 날에 갑자기 뒤바뀔 것이라고는 쉽게 예상하기 힘들었다. 자세히 뜯어보아도 모의고사의 시작인 3평부터 난이도는 물, 6평은 물모의, 9평은 역대급 물모의였고, 심지어 수능 직전 기강을 잡는 역할을 하던 10평 역시 수험생들이 그 위에서 헤엄을 칠 수 있을 정도로 물모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가원은 수험생들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고, 언제나 수험생들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대망의 수능날은 이렇게 흘러간다. 아침을 대충 먹는다. 청담동에 있는 수능을 볼 고등학교로 향한다. 고등학교 교문에는 많은 학부모들과 가족들, 고등학교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천천히 운동장 옆에 있던 오솔길을 오른다. 어차피 수능을 보는 학생들은 대부분 고등학교가 같게 설정되기 때문에 친구들도 많이 만난다.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고등학교 정문에 붙어 있는 명단을 확인한다. 명단에서 본인의 이름을 찾아 학교의 2층을 오른다.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주며 본인의 교실로 향한다. 책상에는 본인의 이름과 수험번호, 시험과목 등이 적혀있는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다. 국어 시간 전까지 남는 시간에는 마지막 족집게 노트를 펴서 외울 만한 것들을 확인한다. 정말 이런 것들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학생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지만, 마치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은 비장함이 서려 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남자 한 분과 검은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두 분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제야 책들을 집어넣고 컴퓨터싸인펜과 수능샤프, 지우개를 꺼내고 정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크고 두꺼운 봉투를 열어 수능시험지와 OMR카드를 꺼냈다. 천천히 시험지와 OMR카드를 배부한 후 책상 위에 뒤집어서 덮어 놓는다.


 긴장감 1.5oz, 그 긴장감을 상쇄시키기 위한 평정심 3oz, 걱정 0.5oz, 기대감도 0.5oz, 거기다가 졸림 한 티스푼을 얹어서 잘 저어주면 수능시험 시작 5분 전 마음이 칵테일처럼 뒤섞인다. 30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교실 안에 있다. 그런데 나 혼자만 조용히 교실에 앉아있는 것 같다. 말 한마디 없는 고요한 교실이지만, 마치 유치환의 ‘깃발‘에서 보았던 ’소리없는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하나의 시험이 끝나면 학생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화장실 한 번 들렸다가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 또는 조용히 교실 안에서 다음 과목을 준비하는 사람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친구들과 답 맞춰 보는 행위는 최대한 지양하라고 말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은 호기심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의 유혹을 견디기는 힘들다. 국어의 난이도는 친구들이 이구동성 ‘상‘을 외쳤고, 몇몇은 여태 봤던 문과 국어 중 최강 급이라는 말까지 하곤 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된 바였다. 작년 수능에도 문과의 국어 난이도는 충격적인 수준이었고, 수험생들도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를 알고 국어를 대비한 학생들은 굉장히 많았다. 적어도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평가원이 작년 수능과 비슷하게 국어에만 조금 힘준 수능이고 나머지는 평이하게 나올 것이라고 많은 수험생들이 믿었지만, 이는 결국 사망 플래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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