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가고시퍼용 [936437] · MS 2019 · 쪽지

2019-12-16 00: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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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흉걸려 옆구리 관 꼽고 수능 본 썰+성적표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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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방에 기숙 일반고를 다니고 있는 고3 학생입니다. 수능이 5일 남은 날 아침에 오른쪽 가슴과 등이 아프고 숨 쉬거나 움직이면 아프고 숨도 잘 안 쉬어져서 아침 일찍 택시타고 병원에 갔습니다. 거기서 엑스레이 찍고 심장하고 폐뭐 활동량? 같은거 측정하는 검사하니까 의사 선생님이 기흉이라고 하셨습니다. 관 꽂아서 입원해야 한다고 하시니까 수능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라는 느낌이 싹 들어가지고 막 눈물이 나오더라요. 수능 이후도 아니고 수능 5일전에 이런 일이 어떻게 나에게 일어나는건지, 작년에 세례받고 미사 단 한 번도 빠진적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별별 생각이 다 났습니다. 아버지와 의사 선생님께서 통화하시고 저는 담임 선생님께 기흉 걸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무슨 검진날인건지 어르신들 엄청 많으셨는데 대기하는 곳에서 저 혼자 엉엉 울고 그랬습니다. 쪽팔린 것 보다는 내가 지금까지 한 노력이 다 헛수고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먼저였습니다. 허망감과 절망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왔고, 집과 학교 중간 사이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서 제 오른쪽 옆구리에 칼로 구멍을 내고 거기에 관을 삽입했습니다. 


수능 5일날 제가 옆구리에 구멍이 뚫린 채 응급실에 누워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고, 다음주 목요일에 수능을 본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다 학교에서 수능 준비 빡시게 할 텐데, 저는 여기서 뭐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때 든 생각이 이번 수능은 망했구나, 내년에 보는구나 이 생각이었습니다. 평소에 재수는 죽어도 하기 싫어했는데, 재수가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습니다. 5일동안 엄청 놀았습니다 자포자기 했었거든요. TV는 계속 영화 채널 틀어서 인디펜던스 데이? 라는 영화 1,2편 보고 존 윅도 보고, 게임도 했습니다. 중간중간 공부는 그래도 했어요 2일 정도 남았을 때 이번년도 사관학교 기출 부탁해서 그거 풀어보고, 사탐 모의고사, 킬링캠프 모의고사 풀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차가운 게(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폐를 타고 흘러내리는거, 제 몸에 꽂은 관에서 피가 새어나오는거, 샤워도 못하고 화장실 갈 때도 관 잡고 가야하는거(흔들리면 꽂은데하고 폐 아파요), 무엇보다 제가 이런 상태로 수능을 봐야한다는게 너무 싫고 너무 스트레스였습니다. 아침 6시면 간호사님께서 진통제 팔에 꽃은 주사로 진통제 주입하시고(쎈 진통제라 그런지 맞으면 팔이 타는 것 같았습니다) 엑스레이 찍으러 1층까지 내려가야하고, 병원밥이 너무 맛없어서 짜증났습니다. 그때 수시로 지방대 한의대 교과 지역인재 지르고 논술 경한 성균관 글경, 학종 아버지 실수로 서강 경영 넣어가지고 그거 최저 맞춰서 수시 되기를 기도하자라는 생각으로 수능 보러 갔었습니다. 아랍어도 개념강좌 완강 했을 정도로 공부를 좀 했는데, 포기했습니다. 


수능 전날 밤, 침대에 누워서 든 생각이, 내일이면 자유다라는 생각과, 이 상태로 수능을 본다는게 너무 X같다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빨리 몸에 꽃힌 관을 빼고 싶었습니다. 수능날 아침이 밝자, 아침은 미역국으로 먹고, 사설 구급차를 불러서 좀 멀리있는 고등학교까지 갔습니다. 교육청간 관할 문제 때문에 수능은 병원이 아닌 타 고교 별실에서 응시했습니다. 그곳 보건선생님과 제 시험실 감독관님께서는 최대한 제 편의를 봐주셨습니다. 등받이가 필요한 것 같다고 보건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교장실에서 쿠션을 가져오셨습니다ㅋㅋㅋㅋ. 시간이 되서 국어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3년동안 저는 이 시험지를 풀기 위해 그렇게 공부를 했었습니다. 떨릴만도 한데, 아픈게 먼저라서 그런지 떨리지도 않았습니다. 시험지를 보고 든 생각이, 제목이 짧다였습니다. 사설 국어 모의고사 제목들은 누구누구 모의고사~~ 이렇게 긴데, 수능은 그냥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지 이것만 있어서 ‘어, 제목 짧다’이 생각만 들었습니다ㅋㅋㅋ 근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 구급차 타고 멀리까지 이동해서 몸이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아침에 먹은 진통제가 약효가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국어 풀 때 숨 평소대로 쉬거나 오른팔 움직이면(오른손잡이입니다) 폐가 찢어질 듯 아파서, 절반정도는 왼손으로 풀었고, 비문학 원래 줄 엄청 쳐가는데 거의 못치고, 숨도 엄청 얕게 가파르게 쉬었습니다. 너무 아파서 보는 도중에 울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풀었습니다ㅎㅎㅎ 10분정도 남아서 제일 헷갈렸던 BIS 지문 봤습니다.


국어 끝나고 나서 진통제가 효과가 나타나더라고요. 수학은 원래 자신있던 과목이라 열심히 풀었습니다. 관을 꽂아서 많이 불편했지만 최대한 풀었습니다. 21번에서 20분정도 쓰고 나중에 풀자라는 생각으로 30번까지 다 풀고 21번 풀었습니다. 다 풀긴 풀었습니다. 막판에 26번 고친 것 빼고는 다 제대로 푼 것 같았습니다. 점심시간에 그래도 한 분 저를 감독?하시는 분이 필요하셔서 보건선생님이 점심 거르시고 저 감독하려고 하셨는데 선생님 한 분이 자기는 점심 먹었으니까 가서 점심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알고보니 교감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죽을 먹고 교감선생님은 제 왼편 창가에서 책 읽으셨는데 중간에 조시더라고요ㅎㅎㅎㅎ 새벽 3시에 일어나셨답니다. 피곤하실 만하죠. 


영어도 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럭저럭 봤고, 한국사, 탐구도 봤습니다. 사회문화 10분 남아서 실수 체크하고 20번 도표 체크하다가 종이 울렸습니다. 제 수험 인생을 끝내는 종이 울렸습니다. 시험을 이상하게도 잘 본 느낌이 들어서 제 동아리 직속 선배, 중학교 때 수학을 배웠던 과외 선생님, 1학년 때 담임 선생님 등 여러 사람들에게 전화했습니다. 다 그렇게 느끼셨겠지만 진짜 허무하더라고요ㅎㅎㅎㅎ 억겁의 시간을 찰나를 위해 준비했으니, 허무하더라고요. 수능 문제들 지금도 기억 하나도 안납니다. 전체 시험에서 국어 BIS/이식 지문, 수학 21번 빼고 기억 안납니다. 


저녁 먹고, 병실에 들어와서 채점을 하려는데, 차마 못했습니다. 똥이 마려워 똥 싸러 화장실에 갔을 때, 아버지가 수학을 가채점하셨습니다. 아 전과목 전부 시험볼 때 OMR카도 보고 가채점표 썼었습니다. 아버지가 야 수학 100점이다 하셨는데, 그때 진짜 안도감에 약간 울었습니다. 수학 100점이면 다른 거 좀 망해도 커버할 수 있었으니까요. 똥 싸고 나와서 의기양양한 상태로 나머지 과목 쾌속으로 채점했습니다. 국어 91점이라서 아쉽긴 했으나 어떤 상태에서 봤는지 제가 잘 알기 때문에 이정도면 잘 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어도 100점. 한국사 45점. 세계지리 48점. 사회문화 50점. 국영수탐 389점, 딱 5개 틀렸습니다. 중학교 때 다는 수학 과외 선생님과 통화하는데 울어버렸습니다. 내가 해냈구나라는 안도감, 재수는 안 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 목표였던 한의대를 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막 교차하더군요. 그렇게 병실에서 롤을 시작하고 며칠 뒤에 관 빼고 퇴원했습니다. 


수시로 지방대 한의대 지른 거 합격해서 얼떨결에 벌써 한의대 뱃지를 달게 되었습니다. 2020년도 수능 보신 전국에 모든 수험생 여러분 많이 늦었지만 수고 정말 많으셨습니다. 원하는 대학 꼭 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이번 수능은 저 혼자 본게 아닙니다 먼 곳까지 가신 저희 학교 선생님 3분, 기도해주신 신부님들, 희뱀 어머니, 학교 친구/후배들, 도와주신 장학사님들, 시험장 보건선생님,교감선생님,교장선생님 그리고 부모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수능 이렇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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