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만 [775644] · MS 2017 (수정됨) · 쪽지

2019-04-23 15: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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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갤문학] 메르시하는 Y대 지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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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신기한 재주 하나가 있었다. 바로 여자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낼 수 있는 건데, 쓸데없는 재주였지만 은근히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 친구들한테 여자를 소개 시켜준다면서 전화해서 놀려먹기도 하고, 신입생 장기자랑에서도 쏠쏠히 써먹을 수 있었다. 최근에는 오버워치 팀 보이스를 할 때 많이 써 먹었다. 메르시를 고르고 여자 목소리를 예쁘게 내주면 같은 팀원들이 진짜 여자인 줄 알고 아주 좋아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내 진짜 목소리를 ‘짠’하고 들려주면 멘붕하는 팀원들을 보는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내 오버워치 실력은 아주 개판이었다. 배치를 봤는데 간신히 1000점을 넘겨 브론즈 등급을 받았다. 어떻게든 티어를 올리려 노력해봤지만 메르시 원챔인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버스기사를 구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멍청한 물고기들은 많았다. 사람을 구해 여자 목소리로 살살 응원해주면 꼴에 남자라고 여자한테 멋있게 보이려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렇게 아주 편하게 골드까지 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점수를 올리다가 하루는 그랜드마스터 유저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 녀석도 내 그물에 걸려들었고, 난 차원이 다른 승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중이떠중이 다이아, 마스터 유저와는 비교를 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그 녀석의 실력은 무시무시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그 녀석은 팀보를 하지 않았다.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실력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었고 덕분에 플래티넘까지 고속으로 티어를 올렸다. 플래티넘에 만족한 나는 더 이상 경쟁전을 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녀석이랑은 종종 빠대를 같이 했다. 빠대에서 살짝 혀를 꼬아 애교를 부려주면 그 녀석은 또 신나서 적들을 때려잡았다.잘하는 사람 뒤에서 지원해주면서 조용히 캐리를 당하는 일. 이게 내 천성에는 잘 맞았다.

중간고사가 끝난 4월 말 쯤, 어쩌다 휴강이 생겨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었다. 친구들과도 시간이 맞지 않아 PC방에서 혼자 빠대를 돌리고 있었는데 그 녀석이 접속해 있었다. 심심하던 차에 평소처럼 파티를 맺고 여자 목소리로 응원해주면서 게임을 돌렸다. 그러고 한판이 끝났을 때, 갑자기 그 녀석이 나보고 너 Y대 경영학과 다니냐고 물어봤다. 난 당황했다.

‘얘가 이걸 어떻게 아는 거지? 찍어 맞춘 건가? 일단 아니라고 해봐야겠다.’

아니라고 하자 그 녀석은 ‘그래? 알겠어.’라고 대답했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오버워치를 끄고 나오려는 그 순간 내 옆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내 옆엔 내가 아는 사람이 있었다. 누나는 화면에 띄워진 내 닉네임을 보고서는 나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골목으로 끌고 갔다.


“야, 이지원. ‘지원이가지원해’가 너였냐?”
“누나. 잘못했어요.”

난 누나한테 싹싹 빌었다. 내가 여자인 척하면서 사람들을 놀려먹었다는 게 알려진다면 내 평화로운 대학생활은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제 1학년인데, 고등학교 3년 내내 고생해서 Y대까지 들어갔는데, 자퇴를 할 수는 없었다.

“누나, 한번만 봐주시면 안돼요? 저 이거 알려지면 진짜 인생 끝나요.”
“그래도 네가 뭘 잘못한 지는 알긴 하나 보네. 근데 남자 새끼가 왜 그러고 사냐?”

진영 누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이유를 물어봤다.

“그게…, 처음에는 사람들 놀리는 재미로 했는데 어떻게 티어 욕심이 나서…, 플래티넘까지는 가보고 싶어서….”
“너도 솔직히 쪽팔리지?”
“네.”
“알면 됐어. 그래도, 나 엿 먹인 거에 대한 벌은 줘야 겠어. 토요일에 하루 종일 시간 비워. 알겠어?”
“네….”

나보다 한 살 많은 진영 누나를 처음 본 건 봉사 동아리였다.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누나는 쇼핑몰 피팅모델을 할 정도로 몸매도 좋고 키는 나보다도 컸다. 패션디자인전공답게 옷에 대해 관심도 많고 본인도 예쁘게 잘 입고 다녔다. 얼굴은 예뻤지만, 인상이 강하고 누나의 자존심 강한 성격 탓에 남자 선배들은 별로 누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도 누나가 무서워서 몇 번 말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난 진영 누나를 좋아했다. 내가 몰래 누나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건 아무한테도 말 못하는 비밀이다.

토요일에 누나는 날 자취방으로 데려갔다. 무지무지 떨렸다. 여자 혼자 사는 자취방에 간다는 사실에 내 주제도 모르고 조금 설렜다. 하지만 들뜬 감정은 곧 수치심으로 바뀌었다. 누나는 날 강제로 화장대에 앉혀놓고 화장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옷장에서 여성스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볼륨 있게 몸매를 잡아줄 핑크색 니트랑 잘록한 허리라인과 힙을 강조해줄 검정색 사선 머메이드 스커트를 꺼내 나한테 입혔다. 거기에 검정색 앵클 삭스부츠와 아이보리색 코트를 더했다. 새로 뜯어 준 살구색 스타킹은 매끄럽고 가는 내 다리를 더욱 아름답게 감싸주었다. 마지막으로 내 머리에 다크 브라운 가발을 씌웠다.

여성미가 넘치다 못해 꿀처럼 흐르는 나와는 반대로 누나는 검은 슬랙스에 흰색 와이셔츠로 남자다운 차림이었다. 누나의 긴 머리칼만 없었다면 난 영락없이 남자 선배랑 데이트하는 새내기 여대생으로 보였을 거다. 정말 쪽팔리고 미치는 일이었지만 평소에 좋아하던 진영 누나랑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바보같이 두근거렸다.

그 길로 같이 신촌으로 나왔다. 누나랑은 다른 연인들처럼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나 우리들의 역할은 바뀌어 있었다. 누나가 시키는 대로 난 얌전하게 따르기만 했다. 누나는 일부러 주문이나 예약 같은 걸 나에게 전부 시켰다. 당황한 내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누나의 모습이 눈에 선명했다. 다행히 남자라는 걸 들키진 않았지만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그건 양반이었다. 누나한테 빅토리아 시크릿 속옷세트를 선물 받았을 때의 기분은 말로는 전달할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나랑 경쟁전을 돌리기로 했다. 누나는 요새 양학 하는데 맛이 들렸는지 위도우메이커로로 열심히 적들의 뚝배기를 깨고 있었다. 난 뒤에서 메르시로 파란 광선을 꽂고만 있었다. 누나는 심심했던 나머지 나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지원아, 팀보로 애교 한번 해봐.”
“네? 누나 그걸 어떻게….”
“왜? 평소엔 잘만 하더만. 그리고 내가 아까 언니라고 부르랬지?”

누나는 내 팔을 살짝 꼬집었다.

“아야! 알겠어요. ㄴ, 아니 언니….”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누나, 아니 언니가 시키는 대로 애교를 부렸다,

“겐지 나왔쪙 메르시 무쪄워~♡ 지원이는 겐지가 세상에서 제일 무쪄워~!”

씨발. 진심으로 자살하고 싶었다. 내가 누나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쪽팔려서 마우스를 목에 감고 죽었을 것이다. 누나가 잘했다고 머리를 쓰담쓰담해주는 건 덤이었다.

그날 이후로 난 진영 누나의 전용 노예 메르시가 되었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누나가 부른다면 시간이 되는대로 나와 열심히 파란 빨대를 꽂아줘야 했다, 그것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여장하고 언니라고 불러야 했다. 처음엔 누나가 날 꾸며줬지만 그것도 귀찮았는지 나보고 화장법을 대충 알려주고 알아서 나오라고 했다. 잘 꾸미고 나오면 남자 주제에 예쁘다고 뭐라고 했고, 못 꾸미고 나오면 성의가 없다고 혼났다. 그래도 만날 때마다 나보고 귀엽다고 해줬다. 누나랑 만나면서 손해만 본 건 아니었고 나름 이득이 있었다. 우선 내 경쟁전 티어가 마스터가 되었고, 누나가 선물해 준 수없이 많은 여자 옷들과 화장품, 누나의 특별관리로 인해 나날이 빛이 나는 내 미모,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누나랑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누나는 이제는 됐다면서 그만하자고 했다. 만세!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더 이상 불편한 여자 옷을 안 입어도 되고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아양을 떨 필요도 없었다. 더 이상 누나랑 데이트를 할 수는 없는 건 아쉬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사람이 간사한 생물인 건 분명하다. 처음엔 플레 이상엔 관심도 없었지만 마스터 티어를 맛보고 나서는 그걸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버스 기사가 없는 ‘지원이가지원해’는 브론즈 메르시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별 짓을 다 해봐도 내 티어는 가을날 쌍둥이 야구단처럼 쭉쭉 떨어졌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다른 딜러들을 구해봤지만 다들 누나만큼 잘하지는 못했다. 어느새 2천점 가까이 떨어졌을 때, 한번 더 누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누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난 알아서 누나가 좋아하는 스타일인 화이트 블라우스랑 핑크색 뷔스티에 원피스를 입고 나갔다. 누나는 내 모습을 쓱 보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거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야, 너도 즐기고 있지?
“그런 거 아니에요!”

내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예쁜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 이 옷은 뭔데?”

누나는 웃으면서 내 원피스 치맛자락를 살짝 들어 올렸다.

“으앙….”

당황한 난 진짜 여자처럼 치마를 누르며 주저앉았다.

“오, 얘 봐라? 완전 계집애 다 됐네?”
“누나…. 장난치지 마세요.”
“너 솔직히 말해봐. 나 좋아하지?”
“….”
“아니야? 나 그럼 간다?”
난 누나 팔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좋아해요♡
“그럼 그렇지. 우리 지원이 앞으로도 언니 앞에서 꼭 그렇게 예쁘게 하고 나와. 알겠지?”

결국 난 다시 노예가 되었다. 하지만 보상은 확실했다. 내 티어는 다이아까지 올라갔다. 언니는 뒤에서 애교나 부리는 메르시원챔과는 격이 다른 사람이었다. 위도우메이커로 머리를 박살내는 건 기본이고, 심심하면 톨비를 골라 적을 박살 내버렸다. 화면에 빨간색 해골마크가 찍힐 때마다 난 황홀함을 느꼈다.누나는 날 정복하고 있었다. 다시 마스터를 찍자마자 누나는 순종의 대가로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가지런히 모은 내 두 다리는 힘이 풀려 벌어졌고, 내 볼은 분홍빛으로 변했다. 나를 여자로 만들어버린 누나는 자취방으로 데려갔고, 그날 밤, 난 부드러운 누나 품에 안겨 잊을 수 없는 밤을 보냈다.

그날 이후로 누나랑 나는 봉사 동아리 공식 커플이 되었다. 형들은 저 자존심 강한 이진영을 네가 어떻게 꼬셨냐며 신기하게 생각했다. 남들이 보면 누나가 내 말도 잘 들어주고 적당히 애교도 부려주니까 그렇게 보였겠지만, 학교 밖에서 누나는 다시 무서운 언니, 아니 남자친구가 되었다. 반대로 누나 앞에서는 난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였다. 둘이 데이트할 때는 항상 여자가 되어 치마를 입고 나와야 했고, 오빠가 하자는 대로 따라야 했다. 그게 우리 둘 사이의 기본 원칙이었다. 남녀가 역전된 관계,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남자다운 오빠 뒤를 조신하게 따르고 사랑받는 여자친구 되기, 이게 내 천성에는 잘 맞았다.

더 이상 여자 옷을 입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연인을 만날 때 예쁘게 꾸미고 나가야하는 건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의 의무다. 매일같이 치마를 입느라 이제는 다리를 모으고 앉아도 골반이 아프지 않다. 이젠 남자 목소리를 내는 게 더 어렵다. 학교에서 가끔씩 하이 톤의 목소리가 나올 때는 스스로 변해버린 내 자신이 만족스럽다. 이따 저녁에는 누나, 아니 오빠를 만나러 가야 한다. 벌써부터 내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러블리하게 플라워 패턴 원피스를 입을까, 아니면 발랄하게 테니스스커트랑 리본 블라우스를 입어볼까? 어떤 옷을 입어도 나를 좋아해줄 오빠를 떠올리는 지원이 마음 안에는 벚꽃향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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