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민쌤] [429250] · MS 2012

2019-04-22 19:39:43
조회수 2355

감상이 먼저고, 분석이 다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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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제한된 시험에 응시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무조건 소재, 시어의 표현 방식 등에 구속(engager)당하지 마세요.


현대 비평론에서 시를 설명할 때 쌓아두는 여러 전제 중 하나가 바로 시가 가지는 '순간성'입니다.

따라서 시를 감상하실 때는, 아주 짧은 순간이 담긴 사진 하나를 감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이때 사진의 인물이나 자연물이 살짝 움직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시의 포착된 한 장면은 '찰나'에 불과합니다.


시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읽어나가면서 장면 하나를, 사진 하나를 완성해 나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감상의 본질은 이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떠올리는 것, 상상하는 것에 있습니다.


분석은 그 다음입니다.


시를 물리적인 분석의 대상으로만 삼아 해체했을 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얘기하는 객관적 도구 역시 감상을 전제로 했을 때 올바르게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영탄법은 영탄형 어미와 감탄사라는 분석적 방법론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곱씹어본 그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음이 감상으로 드러날 때 확인되는 겁니다.

이 둘은 겹칠 때도 많지만, 다를 때도 많다는 걸 잊지 마세요.

도구를 배우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감상을 전제로 배우고 쓰라는 거죠.


EBS 연계 공부를 하실 때도, 작품을 감상하면서 연습하셔야지 무슨 기법이 쓰였네, 
뭐가 쓰였네, 이런 식으로 접근하시면 안됩니다.

EBS 분석서를 공부하실 때도 기법들을 중심으로 나열되어 있으면 권하지 않습니다.


시 하나만 보고 오늘도 공부 잘 마무리하세요.


  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 속에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 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문 입술로 꽃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었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르누아르를 흉내 낸 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 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의 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의 공기를 앓게 하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속에서 잃어버린 얼굴을 낯선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얼굴 안에 켜지는 가로등을 다시 꺼내보는 저녁 무렵

슬픔이라는 조금은 슬픈 단어는 호텔 방 서랍 안에 든 성경 밑에 숨겨둔다

  

  저녁의 가장 두터운 속살을 주문하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리는 골목 토마토를 싣고 가는 자전거는 넘어지고 붉은 노을의 살점으로 만든 칵테일, 딱 한 잔 비우면서 휘파람이라는 명랑한 악기를 사랑하면 이국의 거리는 작은 술잔처럼 둥글어지면서 아프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울울해도 좋아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라는 말을 계속해도 좋아


-허수경, 이국의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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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민쌤] · 429250 · 04/22 19:40 · MS 2012

    특강 와준 친구들 고마웠고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아요. 후기 써 준 친구들도 고맙습니다. 특강에 대한 글은 조만간 다시 또 쓸게요.

  • પ નુલુંગ ખਅ · 783475 · 04/22 19:48 · MS 2017

    사설 모고라고는 풀어본적 없는 사람이라 뭐가 좋고 나쁜지 판단할 수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 [수민쌤] · 429250 · 04/22 19:51 · MS 2012

    ㅋㅋ네 도움될 거 골라서 푸세요. 쪽지나 문자로 나중에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셔도 좋음

  • 국어 설승환 · 521434 · 04/22 20:31 · MS 2017

    너무나 맞는 말씀이십니다! 순간성이란 용어를 선생님 덕분에 오랜만에 들어봤네요ㅎㅎ

  • [수민쌤] · 429250 · 04/22 20:33 · MS 2012

    감사합니다 시론 너무 힘들게 공부했습니다 선생님ㅠㅠ ㅋㅋㅋ

  • 국어 설승환 · 521434 · 04/22 20:35 · MS 2017

    김준오 선생님의 시론 교재를 너무나 너무나 어렵게 공부했던 기억이 저도 떠오르네요ㅠㅠ 선생님께 영감을 받아 문학 칼럼 하나 써야겠습니다ㅎ

  • [수민쌤] · 429250 · 04/22 20:36 · MS 2012

    써주시면 저도 어서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ㅎㅎ

  • 심찬우 · 677168 · 04/22 21:56 · MS 2016

    오랜만에 읽은, 정말 좋은 글이네요.

    길들여진 사고와 관성에 젖은 문제 풀이가 이런 본질을 가리는 것 같아 내심 답답했는데, 뻥 뚫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허수경 선생은 예전에 '박하'만 들춰보고, 작년에 작고 하셨다는 소식 외에 완전 잊고 있었는데, 수민쌤 쓰신 글을 보고 이런 시가 있었는지 까맣게 몰랐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수민쌤] · 429250 · 04/22 22:20 · MS 2012

    저도 독립서점에서 너무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 이과현역독고다이 · 877749 · 04/22 22:34 · MS 2019

    방금 수특 문학 분석 완전 물리적으로 하고 오르비 들왔는데 뼈맞았다......

  • [수민쌤] · 429250 · 04/22 22:52 · MS 2012

    다들 그래서 한 말이에요~

  • ✨공주✨ · 541907 · 04/23 00:22 · MS 2014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
    안녕히 주무세요!

  • [수민쌤] · 429250 · 04/23 00:36 · MS 2012

    잘자요~

  • 고대갈수있을까? · 885431 · 04/23 12:00 · MS 2019

    특강듣고 바로다음날 강옯가서수강신청했습니다 ^^ 개강때 봬요~

  • [수민쌤] · 429250 · 04/23 13:21 · MS 2012

    좋아요~~~

  • Cu2+ · 861291 · 04/23 19:56 · MS 2018

  • WhiteRiver · 825967 · 04/23 21:29 · MS 2018

    쌤, 감사함돠~ 자~알 읽었습니다.

    뒤에 글을 앞에 설명하신 대로 읽으니 저도 모르게 "아..." 소리가 새어 나오네요.
    이런게 공부인데... 이런게 수학능력인데... 싶어요.
  • [수민쌤] · 429250 · 04/23 22:52 · MS 2012

    감사합니다~~

  • 2020tnsmdakswja · 878696 · 04/23 22:14 · MS 2019

    선생님
    무료특강 들은 학생인데요
    선생님이 쓰신 논술교재 이름이 뭔가요?

  • [수민쌤] · 429250 · 04/23 22:53 · MS 2012

    논술 책이 아니라 학생부, 자소서 책이에요 ㅎㅎ yes24 등에 학생부 검색하면 거의 가장 위에 나옵니다

  • 세계체주 · 821921 · 04/24 12:44 · MS 2018

    쌤,

    수능 문학을 공부하다보니

    주제가
    독재의 암담한 현실. 이념. 성찰. 가난. 아픔.
    산업화. 권선징악. 연군지정. 자연친화 등등
    너무 뻔하고 허졉하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솝우화나 탈무드처럼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재미도 있는 문학이 없는건가요??

  • [수민쌤] · 429250 · 04/24 14:22 · MS 2012

    한국의 문학, 특히 서정 문학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입니다.
    문학사적 흐름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작품 선정을 고려했을 때, 평가원에서 다루는 문학 작품들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이솝 우화, 탈무드, 격언집이나 다를 바 없죠. 순수하게 문학 자체로서의 가치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나중에 대학 가서 비평론이나 현대소설강론 교양 삼아 들어보시면 좋은 작품 많이 접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