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스-피아트 [630596] · MS 2015 (수정됨) · 쪽지

2018-12-16 04:3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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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역배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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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비행기 타는 거나, 비행기 표 알아보는 거 및 항공 업계 자체에 대한 흥미가 아주 많습니다. 학기 중엔 밤에 집 와서 놀러가는 표 알아보는 게 유일한 낙입니다. 지금 대한항공에서 연락와서 일하라고 하면 지금 하는 모든 거 그만두고 갈 수 있을 정도로 흥미가 있습니다. 

갑자기 웬 비행기 얘기를 하냐면 항공권 가격을 자세히 보다 보면 입시하는데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공권의 기본 원칙은 직항은 경유보다 비싸고 성수기가 비수기 보다 비쌉니다. 

저는 보통 남들 다가는 방학에 여행을 가기 때문에 유럽을 간다고 치면 대한항공 기준 왕복 100만원, 경유편 기준 80만원 정도면 잘 샀다고 느낍니다. 동남아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코타키나발루의 경우 약 35-40만원 정도가 기준입니다. 

몇 주 전에 학교 삶이 심히 재미가 없어서 한 주 정도 째고 따뜻한 코타키나발루로 여행을 다녀오려고 표를 알아보니 왕복 18-19만원이었습니다. 기름 값은 나오려나 싶을 정도로 저렴해서 갈까 하다가 이런 저런 일이 겹쳐서 못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시간이 되어 잠깐 다녀오려고 알아보니 전에 알아 본 같은 항공사 같은 스케쥴 기준 가격이 60만원이었습니다. 전자 같은 경우엔 남들 안탈 때 타기 때문에 가격도 엄청 저렴하고 심지어 승객도 별로 없어서 비행도 쾌적합니다. 남들 다 갈 때 가기 때문에 돈은 돈대로 비싸고 만석에 가까워서 쾌적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통상 갖는 인식에 비해 가격 차이도 엄청나게 큽니다.


아주 비슷한 상황이 입시 판에서 벌어집니다. 정시에서 자기 점수를 손해 안보려는 경향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약간의 유불리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그래서 나한테 좀 유리하다 싶은 학교나 반영비가 있으면 거기를 쓰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문제는 나만 그런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시립대 자전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탐구를 거의 안 보기 때문에 탐구를 망치고 국어 수학을 잘 본 학생들에게 구세주 같은 학과입니다. 문제는 그게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겁니다. 나름 자기 점수를 잘 사용해서 지원한다고 시립대 자전 같은 모집 단위를 쓰지만 남들도 그렇기 때문에 점수 상의 절대우위(점수 그 자체 혹은 누백)은 있지만 상대열위(다 같이 유리해지는데 유리해 지는 정도가 다소 약함)가 있는 경우 이른바 폭발로 인해 떨어지는 결과가 있습니다. 마치 크리스마스 시기에 좁디 좁은 비행기를 엄청난 가격을 지불하고 낑겨서 가는 것처럼. 비행기는 그래도 목적지에라도 데려다 주지만 입시판은 정원이 차면 가차없이 내리라고 합니다. 

물론 입시는 제로썸이기 때문에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중경외시 라인 같은 경우엔 상대평가 기준 보통 영어1등급 반, 2등급 반인데 올해 같이 어려운 경우엔 절대평가여도 1등급이 굉장히 적습니다. 따라서 2등급 감점을 어마어마 하게 하는 K대 같은 경우엔 해당 라인 지원자 모두에게 굉장히 불리해 보입니다. 그래서 여기를 쓰려는 학생들이 다른 대안을 납두고 굳이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입결이 떨어지는데 이는 절대열위(점수 그 자체가 불리하게 반영)의 영향보다 상대우위(남들과 다같이 불리해지는 것보다 내가 좀 덜 불리해지는 것)의 영향이 크면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돈도 조금 내고 같이 타는 사람도 없어 쾌적하게 누워서 갈 수 있죠.


저는 2014학년도 입시를 했는데 이 때가 A, B형 도입 첫해라 상당히 혼란스러운 해였습니다. 저는 국어, 수학, 영어, 탐구를 각 한 문제씩 틀려서 나름 수능을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입시 직전에 예측치는 한참 안 좋게 나왔습니다. 그 회사 기준으로 제가 최종 진학한 고려대 경영 같은 경우엔 1칸 내지 2칸이었고 장학금을 받고 합격한 S대 경영은 5칸 추합으로 나왔습니다. 당시 누백으로는 대략 0.4-0.5였는데 제가 갖고 있던 입시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표본을 다 세어보았습니다. 그 땐 시간도 많고 딱 제 것만 했으니까 얼마나 정밀하게 했을까요. 어쨌든 다 세어본 결과 현재 누백 추정은 말도 안 된다는 나름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 원인은 영어 B형 도입과 사탐 과목 축소로 인해 점수가 디플레이션(실제 가치에 비해 명목상 점수가 떨어져 보임) 된 것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수험생은 최소한 연고대 라인에서는 붙을 학교를 쓰기 때문에 제 점수 바로 위 그 곳 기준으로 3-4칸인 수험생들(실제로는 연고대 프패)이 결국에 입시를 할 때는 붙을 학과로 내려 쓸 개연성이 있고 한 5-10명만 그렇게 해도 제가 추합으로 붙을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수생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용기에서였는지 가군 5칸짜리 추합, 나군 2칸짜리 불합격 원서를 쓰고 결국엔 가군은 최초합 나군은 여유있게 추합되었습니다. 모두에게 불리하게 보이던 해에 분석과 나름의 확신에 기초해서 남들이 잘 안하는 선택을 한 것이 주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 해는 양 교 상위 학과는 다 박살이 났고 오히려 독문처럼 그 학교를 지키기 위해 쓰는 학과가 입결 탑을 찍었습니다.


저는 수시 완료 전에는 그 회사에서 만드는 데이터를 크게 의미 있게 검토하지 않아서 잘 인식하고 있지 못했는데 여러 글을 보니 굉장히 짜다는 여론이 강하더군요. 이것은 오히려 기회입니다. 나한테만 짜게 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짜게 주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실제 입결을 훨씬 떨어트립니다. 물론 과정에서는 불합격이라는 글자를 너무 많이 보여주기 때문에 심적으로 힘들 순 있습니다.

제가 인생의 큰 결정을 하는데 덮어 놓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분석이 뒷받침되어서 내가 불리한 것 보다 남들이 더 불리하겠다는 판단이 들면 과감하게 역배를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에서 글을 씁니다. 왜 매년 서울대 농경제, 고대 식자경 등의 과가 입결 탑을 찍는 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 학과들의 선호도가 가장 높아서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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