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cri [2] · MS 2002 · 쪽지

2009-05-28 00:54:27
조회수 35,938

왜 공부를 해야 하나요?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1839212

1

이번에는 거의 6주만에 안드로메다 Q&A 게시판에 답변을 달 수 있었어요.

그 이유는 득남을 했기 때문입니다.




2

의과대학에서 실습을 하며 자연분만을 하는 모습도 여러 번 보고, 제왕절개 수술에도 참여해 보았지만, 내 아내가 어머니가 되고, 내가 아빠로서 옆에서 분만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은 매 1초를 언제라도 다시 상기할 수 있을 만큼 기억에 남는 기적과도 같은 경험이었어요.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도 아마 10년 정도 후에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각보다 출산은 훨씬 더 고통스럽고 긴 과정이고, 출산 이후 수유를 하는 것도 심지어는 출산 그 자체 만큼이나 아프고 힘든 과정이었어요. 이건 의과대학을 졸업한 저도 바로 옆에서 간접 경험을 하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입니다.




3

아이와 산모의 하루 하루를 24시간 내내 곁에서 함께할 수 있게 된 건 정말 축복이에요.

나는 다음 일정이나 상사(경우에 따라 교수 혹은 레지던트)의 긴급 호출, 월급 통장 잔고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문제들에 시달리지 않고 따사로운 5월의 햇볕을 즐기며 한없이 놀라운 기적 같은 내 아이의 표정 하나하나를 필름에 담습니다.




4

나는 서울 의대를 졸업했고 아내는 홍대 미대(회화과=서양화과)를 졸업했어요. 결혼 이후에도 매일 네다섯 시간은 빼놓지 않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눕니다. 가끔은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하기도 해요: "만약 우리가 서울 의대나 홍대 미대에 합격하지 못했더라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누리고 우리가 즐기고 있는 것들을 즐길 수 있었을까?"

대화의 결론은 보통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로 귀결됩니다.

물론 많은 학부모(그리고 특히 재수생, 반수생)들의 바람과는 달리 명문대에 합격한다는 것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희소가치를 부여해 주지는 않아요.

명문대에 합격한 이후에도 많은 고민과 노력, 그리고 절묘한 운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만 명문대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많은 고민과 노력, 그리고 절묘한 운이 있었더라도 얻지 못했을 것 같은 그 무언가를 종종 느끼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공감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이렇게 얘기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죠: "아, 부모님과 선생님이 공부하라고 할 때 공부했던 게 정말 다행이다."




5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더라도 실력과 노력으로 좋은 대학교에 진학한 많은 사람들을 추월해 앞서나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좋은 대학교에 합격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그러지 못했다면 평생동안 아마 천 번 이상은 마주치게 되었을, "실력과 노력으로 많은 사람을 추월하신 분이 왜 하필 좋은 대학에는 합격하지 못하셨습니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나는 다른 의대를 잠깐 다녔기 때문에 이를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불필요한 검증 과정을 생략받으며 삶의 효율을 높이고, 삶의 여러 국면에서 강력한 자신감과 자기 확신을 갖게 함으로써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하는 믿음직한 무기가 됩니다.




6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재수학원에 다닐 때는 마치 학벌이 이 세상의 전부인 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막상 명문대에 합격하고 나면 이렇게 얘기하죠: "좋은 대학 와봐야 별 거 없다. 예쁜 여자친구도 안 생기고, 대학 제대로 못 갔어도 돈 많았던 옆집 친구가 더 잘 나간다."
어떤 명문대학생들은 자신이 명문대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답을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학벌주의는 이 나라의 정말 고질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실력과 노력이지 출신 학교가 아니다."

사실 명문대에 입학하고 학점 스트레스에, 취업 전선의 선배들의 현실적인(우울한) 이야기들에 시달리고 있으면 정말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전의 나는 주변에서 정말 공부를 잘 하는, 미래를 촉망받는 인재였는데, 지금은 그런 인재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캠퍼스를 떠나서 다시 사회로 돌아오면 조금만 발품을 팔 준비가 되어 있고, 타인과의 화학반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아, 정말 학벌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었구나.'

그리고 명문대 출신이라는 학벌이 주는 여러 이득을 본의 아니게 누리면서 이런 여유있는 생각도 가끔은 하게 되지요: "다음 세대에는, 10년 간의 노력으로 90년을 평가 받는, 이런 불공평한 학벌주의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7

나의 할아버지는 교육을 받지 못한 농부였고, 아버지는 까까머리 중학생 때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여 공장에서 일하며 아사(餓死)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혼자 힘으로 대학을 졸업해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덕택에 나는 아주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평균은 되는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집안 사정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고도 명문대학에 가지 못하는 (아버지와 같은) 불상사는 겪지 않았습니다.

내가 '부의 대물림'이나 '학력의 대물림'이 부분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아버지의 사례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선상에서 출발을 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면 가장 밑바닥에서 평균까지 올라오며 자신이 누리지 못하고 축적한 희소가치를 자식의 교육에 투자하고 싶어하였던 아버지의 희생을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요.

나는 16살 때부터 내가 나태하게 살면 그건 내 자식과 내 손자의 삶의 범위를 제약하고 말 것이라는 부담을 안고 내 삶을 계획하고, 공부했습니다.




8

우리 아이가 꼭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명문대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에 만족합니다.

나는 물을 끔찍히 무서워 해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면 매초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만, 우리 아이는 백일이 지나면 유아 수영 교실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수영을 배울 것입니다.

3년 후에는 오늘 밤에 야근을 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지 않고, 아이와 옷을 맞춰 입고서 여름에는 키에 맞춰 자른 골프 클럽을 손에 쥐어주고 잔디를 거닐고, 겨울에는 스노우 보드 타고 뜨끈하게 온천에서 같이 목욕을 할 것이고

네 살이 되면 피아노도 가르쳐야겠지요.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려면 그녀에게 프로포즈 할 때 필요할테니까...




9

내가 얻은 많은 것들은 필요한 시점에 거짓말처럼 나타나준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능했어요.

그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나이대도 아니었고, 나와 비슷한 지역에 살지도 않았고, 나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도 않은 경우도 많았어요. 심지어는 내가 이런 사람이 나타나줬으면 하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모든 운들은 내가 16살 때부터 쏟아 부은 노력들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합격증을 손에 쥐고 나서부터 시작되었죠.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열심히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노력을 바로 지금 할 때,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요.

수능 시험 전날까지 내가 해준 이야기를 잊지 마세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30년 후에 여러분의 아이에게 여러분이 지금 해야만 했던 것을 다그치고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의 거의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그러하고 있듯이.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