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ful World [153197] · MS 2006 · 쪽지

2009-04-13 20:51:41
조회수 7,840

2년간의 일기 (1)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1442320

안녕하세요.

이 수기는 작년 11월경에 친구 아이디로 08 수기 게시판에 올라갔던 글입니다.
당시 수기를 올리자마자 오르비 개편으로 인해 수기 게시판이 사라져서, 수정후 제 아이디로 다시
올리려던 애초의 계획이 무산되어버렸고, 4개월이 지나 수기 게시판은 다시 열렸으나
게시판 문제로 예전에 올린 글의 수정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은 글을 09 게시판에 새로 올립니다.

08 게시판에 있는 글은 일단 제 아이디로 올린 글이 아니기 때문에, 해당 아이디로 보내신 메일이나 쪽지가
친구 아이디로 보내집니다. 그래서 간혹 감상평이나 질문을 보내주시는 분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친구도 짜증내거나 가끔 저 대신 답변을 보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ㅎㅎ)

동일한 글을 두 개의 게시판에서 보게 해드려 죄송하며, 08 게시판의 글은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난 수능을 치렀다.

한 때는 일어나서 눈을 뜨면 수능 공부 생각만 했었고, 잠자리에 누워 잠이 들기 직전까지도 내일 할 공부 걱정을 해야 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수험생 시기로부터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의 마지막 수능으로부터 1년 가까운 나날들이 지나갔다.

수험생의 고통이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보는 그 치열함. 치열하게 공부하는 가운데서 달려드는 수많은 유혹들과 잡념들을 뿌리치는 순수한 성질이라면, 대학생의 고통은 수많은 목표들과 성취, 좌절들이 뒤섞인 가운데 혼탁하게 소용돌이치는 모습이 아닐는지.

수험생에서 대학생으로 갑작스럽게 옷을 갈아입은 후, 난 집을 나와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다. 공부에 있어서, 나아가 생활 전반에 있어서 모든 부분이 이전의 내 방식과는 달랐다. 순식간에 뒤바뀐 주위의 모습에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준비 없는 변화였기에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되짚어볼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한 학기와 한 번의 방학을 순식간에 거치고, 두 번째 학기 중간고사의 마지막 리포트를 쓰고 있던 난 정리되지 않는 머리를 잠시 가다듬으려 팔을 책상 아래로 내려놓았다, 책상에 놓인 수업교재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쉬다가 문득 예전에 쓰던 일기장이 떠올랐다.

지난 2년동안 써 왔던 일기장. 책장 구석에 가만히 넣어 놓았던 일기장은 표지에 커피 얼룩이 선명했다. 아직 종이도 많이 남았고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새삼스레 거기에 적힌 지난날의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여 손에 잡힐 듯 했다.

표지를 열자 맨 첫 장에 보이는 것은 내 이름과,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글씨.
그 아래에 다른 색깔로 쓰여진 글씨는 ‘고등학교 4학년’, 그리고 그 옆에 조그맣게 쓰여진 것은 ‘대학교 0학년’.

그 글씨들을 보는 순간, 고등학교 3학년부터 4학년까지, 학생과 재수생을 신분을 거쳐 대학생으로 바뀌어 온 지난 2년의 시간이 내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왔다. 잊고 있었던 시간들, 이젠 과거의 시간이 되어 버렸지만 내 20년 인생에서 10분의 1을 차지했던 시간들. 난 펜을 놓고 일기장을 들었다.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일기장과 그에 스며든 추억들이 새로웠다.





첫 일기가 7월 16일. 고3 여름 방학이 시작 될 때쯤 적기 시작한 일기였다. 따라서 고등학교 1학년 때나 2학년 때의 기록은 따로 남겨놓은 것이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을 생각나는 대로 되새겨 보면..

고등학교 1학년, 평준화 지역에서 추첨으로 입학한 고등학교는 인문계에서 공부롤 못 하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시내와 가까이 있어서 놀기는 좋지만 그에 비례하여 진학 실적도 좋지 않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대학 진학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나는, 야자가 끝나면 새로 만난 친구들과 오락실 내지 피씨방에서 오후 10시를 채워 게임하는 재미에 빠졌고, 시험 공부는 모의고사는 따로 준비하지 않았고, 내신은 일 주일 정도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공부에 크게 신경 쓴 시기는 아니었지만, 학교 주변에 있었던 시립 도서관에 때때로 들러 소설책 읽는 것을 좋아했었고, 당시 즐겨 했던 게임들은 아직까지도 나의 취미로 남아서 수험 생활에 약간의(?) 위협을 안겨주기도 했었다. 아, 추억의 리니지.. 아직도 그 배경음악을 들으면 향수 내지 손이 떨림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현재는 가장 인기 많은 게임이지만 당시에는 베타 테스트 기간이었던 던전앤 파이터도 즐겼다.

던전앤 파이터.. ㅋㅋ 지금은 고객 서비스가 불친절하기로 유명한 게임이지만, 베타 테스트 시기에만 해도 고객 한 명이 빠져나갈 까 봐 쓸개까지 빼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던 기억이 난다. 한 번 잘못된 패치를 강행해 유저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게시판에 욕을 하는 유저들에게 공지 사항에서 유저 아이디 하나 하나를 언급하면서 직접 사과를 하고 게임을 계속 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지만..

게임을 즐기는 와중에 모의고사는 대략 300점 정도 나왔던 걸로 기억하며, 내신은 내가 좋아하는 과목 외에는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 수학을 싫어했는데, 중3 과정을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인수분해를 참 못했기 때문이었다. -_-; 한문이나 체육처럼 암기만 하면 점수를 잘 받는 과목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이런 과목들은 ‘가’를 받기도 했다.

당시 우리 반에는 입학 배치고사 1위로 입학식에서 선서를 했고, 이후 모의고사에서도 전교 1등의 자리를 고수하여 선생님들의 이목을 독차지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공부를 잘 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데다 깔끔한 외모를 갖고 있어서 지금으로 말하자면 ‘엄친아‘ 이었다. 학교에서 400점 이상을 받는 학생은 이 친구가 유일했는데, 성적표의 지원 가능 대학란에 서울대 내지 연고대가 찍혀 나오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고 부러웠다.

내가 고 1때, 우리 집은 사정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어렸을 때라 잘 몰랐지만 겨울에 보일러를 켜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고, 찬이 없어 식은 밥만 레인지에 돌려서 먹었던 기억도 있다. 고 1때부터 난 학교에서 학비를 지원받았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한 학기가 흐르고, 여름 방학이 지나고, 2학년이 되기 전에 나는 진로를 선택해야 했다. 이과와 문과. 가족들은 어린 시절부터 내가 이과를 선택해서 의대로 진학하기를 바라 왔다. 그래서 이과를 선택했다. 그 뿐이었다. 가난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은 깨닫고 있었던 그때, 가족들이 내게 거는 기대가 무엇인 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나에게, 진로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아니더라도 희미한 목적이나마 있었다면 한 번 더 생각해 보았을 텐데. 그러나 그 시기의 나는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놀고, 이제는 익숙해진 고등학교의 생활에 몸을 맞추어 살아가는 일에 태연했을 뿐 미래에 다가올 내 모습에 대해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 고등학교 생활 초반까지는 나 자신도 의대라는 막연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조차 희미해졌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의 출발은 의욕적이었다. 선생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모두 필기하겠다는 생각 아래 노트 한 장에 빼곡히 필기를 한 것은 좋았다. 그 다음 시간에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잘 해서 공부 열심히 한다는 소문이 난 것도 좋았다. (공부 잘 한다는 소문이 아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복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부 방법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복습만큼은 누구에게나, 어떤 공부를 하거나 상관없이 공부를 잘 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라도 생각한다.

수업을 듣기는 하되 복습은 하지 않으니 다음 시간이 되면 저번 시간에 공부한 내용들을 잊기 일쑤였고, 더 이상 공부 잘 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게 되었다. 자연히 수업 자체에도 점점 흥미를 잃게 될 수밖에 없었다. 과학은 그나마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재미라도 있었지만, 수학은 기초가 단단하지 않으니 곤두박질 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고1때 나와 같은 반으로 성적이 비슷했던 한 친구는 이과 공부에 잘 적응해 모의고사에서 이과 전교 1등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이 친구와 짝이었는데,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짝에게로 몰려와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고, 친구가 답해주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짧은 시간동안 참 많은 차이가 생겼구나 싶었다. 적응한 사람과 적응한 사람, 열심히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

난 더 이상 의욕이 없었다. 수1 내용과 수2 내용을 동시에 훑어내리는 수학 시간. 일 주일에 다섯 시간 있는 수학 시간이 나에겐 과장 보태 지옥 같았다. 흥미가 없으니 자기 시작했고, 수학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점점 나를 잠에 빠진 학생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이런 나태한 모습은 물론 성적으로 곧바로 나타났다. 1학년 때에 제대로 못 했던 한문은 여전히 ‘가’ 였고, 화학 역시 ‘가’ 였다. 지구과학을 뺀 다른 과학탐구 과목들은 모조리 3등급 밖이었다. 수학은 충격적인 5등급이었다. 모의고사 점수는 여전히 300점대 초반. 수학은 40점대였다.

1학년 때의 다른 친구들은 차츰 성적이 올라, 이제는 400점 이상인 학생들이 종종 있었다. 평준화 하위고에서 수학 5등급을 받아 놓고, 어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막막했다. 이 성적으로 의대를 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해서 따라 잡으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냥 물 흘러가는 대로 의욕 없이, 친구 관계와 게임에 빠져서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결국 난 목표를 수정했다. 지방 국립대 수학교육과... 물론 내 생각은 아니었고, 의대에 가지 못한다면 교사라도 되라는 가족들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여전히 난 내 진로에 대해 별다른 견해가 없었다. 언론인이 되고 싶은걸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내가 생각하는 언론인의 모습이 현실과 유리되어 있음을 안 후 아무렇지 않게 떠밀려 나가 사라진 꿈이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1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얻은 것은 만신창이로 변한 내신 성적과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할 만한 몇 명의 친구들. 그리고 목표 없는, 의욕 없는 내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결국 나는 이과에서의 공부를 포기했다. 고등학교 3학년부터는 문과로 전과하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의 시작.

문과에서는 뭔가 잘 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학은 수1도 제대로 몰랐고, 사회탐구는 전혀 몰라서 전통 윤리/윤리와 사상이 수능을 따로 치는 걸로 알 정도였고, 제2외국어는 한문 성적이 여전히 ‘가’ 보증수표였으니 어떤 수준인 지 알 것이다. 현실은 거의 시궁창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왠지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 계기는 첫째 고3 학생주임 선생님과의 상담이었다. 당시 고3 학주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희망 대학을 적어 내게 했었는데, 난 별 생각 없이 고 2때 가려고 마음먹었던 지방 국립대 이름을 적어 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지방에 있는 대학교를 적어낸 아이들은 다 두들겨 맞았다.;; 꿈이 너무 작은 것에 대한 꾸지람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공부를 못 해서 들었던 매였을까. 그것은 확실치 않지만, 그 분 덕택에 억지로라도 목표를 연고대와 서울대로 상향 조정하게 되었다....대체 평준하 하위고에서 무슨 기대를 하셨던건지 모르겠다 -_-;;

또한 졸업한 선배들의 이야기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우리 학교는 가뭄에 콩 나듯 서울대 합격자가 나오는데, (그나마 지역균형 전형으로 인해 예전보단 많아진 걸로 암) 이 분들이 학교에 오셔서 후배들에게 강연을 하곤 했다. 내가 고 3일 때 오셨던 분은 서울대 사회대에 재학중인 여선배였는데, 강연이 끝나고 질문하는 시간이 주어져서 나는 질문을 했다.

“ 480점 넘으면 정말 서울대 갈 수 있나요? ”
“ 당연하죠;; 480 넘으면 갈 수 있어요. ”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

“ 480 넘으면 내신 정말 안 좋아도 서울대를 갈 수 있나요? ”
다시 한 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때가 3월 내지 4월. 학기 시작 후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고 그 그 때까지만 해도 내 모의고사 성적은 350점 선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나마 수1 공부와 사탐에 집중하면서 꽤 많이 오른 점수였는데도 480점까지는 턱도 없이 먼 점수였다. 아이들이 웃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다” 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만으로도 나에게 큰 용기가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난 고1, 고2 때의 내신 점수가 매우 나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서울대는 절대 기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수능을 잘 치면 그러한 불리함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뒤집어 생각하면 내가 그 동안 입시에 얼마나 무감각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이 즈음부터 오르비 등 입시 관련 사이트들을 알게 되면서 입시에 대해 조금씩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07 기준으로, 서울대는 1, 2차 전형에서 모두 수능 성적을 반영했었다. 그랬던 것이 08 입시에서 수능은 1단계에서만 반영하고 2단계에서는 반영하지 않게 되었고, 그러한 경향이 09 입시에도 유지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수능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서울대식 내신 6점대로 합격한 사례가 있고, 적어도 7~8 점대 이상이라면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점수이다. )

이후 나는 현재 내 점수에서 얼마만큼 올릴 수 있을지, 최악의 경우와 최선의 경우 내 성적이 어떻게 될 것인지, 각각의 경우 어느 대학교를 진학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 나는 내신을 전교 10위권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모의고사는 여전히 300점대에서 헤매고 있었다. 사회탐구와 제2외국어의 부실함이 점수 상승을 막는 주요 요인이었다.

사회탐구는 워낙 기본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 내신과 겹치는 과목을 위주로 선택했다. 학교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특히 역사 과목은 암기가 중요하다는 직감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 진도에 맞추어 교과서를 읽으며 계속 공부를 해 나갔다. 내가 선택했던 과목은 윤리, 국사, 근 현대사, 사회 문화였는데 국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학교 내신과 겹치는 과목이었다.

국사를 선택한 이유는 물론 서울대에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학교 내신과목인 한국 지리를 선택하고 서울대를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알다시피 국사는 고등학교 사회탐구 과목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당시 시기가 이미 고3 5월달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지금부터 준비를 시작하면 다른 과목 공부를 병행하면서 국사 공부를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었다.

결국 난 국사를 응시하기로 결정하였다. 해 보기도 전에 질려서 포기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주변 친구들도 국사를 선택할 것인지 많이들 고민하고 있었고, 일부는 국사를 선택했고 일부는 포기했다. 선택한 친구들 중에서도 나중엔 중도 포기하고 나머지 3과목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보력이 부족한 지방의 하위권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입시 전형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지했음은 물론, 수능 공부 자체에 있어서도 그다지 효율적인 방법으로 준비하고 있지는 못했다. 인강이라는 건 EBS 정도만 알고 있던 나는 오르비에서 메가스터디, 이투스 등의 인터넷 강의 사이트들이 다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사탐 공부에 적극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사회탐구는 혼자 공부하기 힘든 과목이라고 생각한다. 언어, 외국어, 수리 영역은 암기도 일부 필요하지만 암기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문제를 푸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사회탐구 공부 방법은 결국 암기가 우선이다. 최근 수능이 사고력을 중시하는 출제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해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암기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혼자 공부하기보다는 실력 있는 강사의 강의를 통해 정리하는 편히 훨씬 도움이 되었다.)

대학 진학에 대한 계획을 조금씩 세우고 내신을 계속 준비하면서 1학기가 거진 흘러갔다. 사회문화와 근현대사는 학교 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 진도를 맞추어 나갔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사 공부는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못한 상태였고, 윤리 또한 어렵게만 느껴지는 과목이었다.

대망의 고3 6월 모의고사 성적은 다음과 같았다.
언어 87 수리 77 외국어 85 / 윤리 33 국사 18 근현대사 39 사회문화 47 / 총점 386

난이도를 감안하면 등급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원점수가 낮아서 불안함은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400대 중반은 이상은 나와야 목표하는 대학에 지원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불안했다.

일선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학교에서도 고3 여름방학에는 의무적으로 보충 수업에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강을 알고 난 뒤부터 학교 수업의 질이 예전에 생각하던 것만큼 높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수업을 애써 따라가기보다는 내 방식대로 따로 공부하는 것이 훨씬 나을 거라 생각했다.

부모님과의 상담을 통해, 나는 학교에다 방학동안 서울에 간다고 거짓 핑계를 댄 다음 집 주변 독서실에 등록했다. 그리고 국사와 윤리 인터넷 강의를 신청하고, 돌아오는 길에 조그만 일기장을 하나 샀다. 먼 훗날 수험생 때의 치열하게 공부한 기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잊지 못할 여름방학과 함께 나의 일기도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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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21일(금)
딱히 꾸준히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5일째이니 오랜만이구나 싶다. 방학 때 보충수업도 나가지 않으니 쓸 내용이 없다는 게 정답이다. 독서실 자리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메뚜기 작전’ 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할 것은 많은데 계속 늦잠을 자고, 생각처럼 공부를 못 해서 걱정이다... 열심히 해서 올해 꼭 가야 한다. 그러면 이제 재수하는 아이들은 보기 힘들겠지만.
7.21 근현대사 “끝” 매주 일요일 복습.. 생각처럼 되기를
7.21~7.31 윤리 “끝”
7.31~8.20 국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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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방학 시작 후 며칠 안에 근현대사의 복습을 끝내 놓고, 열흘만에 윤리를 끝낸다. 그리고 남은 기간동안 국사를 끝낸다. 그러자면 하루에 인터넷 강의를 평균 4강 이상 들어야 했다. 나는 주로 아침식사 후 오전 시간에 강의를 들었는데, 잠이 너무 많은 편이었던 나는 수업을 들으면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나중엔 잠을 쫒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서 눈꺼풀을 뜯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음악을 듣고, 운동을 하고, 나중엔 대야에 물을 담아 놓고 발을 담근 채 강의를 듣기도 했다. 4시간동안 강의를 듣고 나면 30분 정도 눈을 붙인 후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던 독서실로 향했다. 독서실은 방학이라 그런지 학생들로 자리가 꽉 차 있어서 뒤늦게 신청한 나는 등록할 수가 없었는데, 독서실 아저씨는 편법으로 오전과 오후에 각각 비는 자리를 체크해서 비는 자리마다 자리를 옮겨가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셨다. 7월 21일 자 일기에 써 놓은 “메뚜기 작전”이 바로 이걸 뜻하는 말이었다.

내가 사탐을 정리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강의를 들으면서 한 권의 노트에 강의 내용을 필기한다. 이 노트는 아무래도 강의를 들으면서 빠르게 정리해야 하기에 글씨를 대충 쓰게 된다. 이후 독서실에서 이 노트에 적힌 필기를 깨끗한 글씨로 다른 노트에 옮겨 쓴다. 이 과정에서 인강 교재와 교과서 등을 참고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적어 넣기도 한다. 그러면 나중엔 두 번째 노트 하나만으로도 복습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과정만으로 완전히 공부한 거라고는 할 수 없다. 정리하는 중에도 계속 생각하면서 머릿속에 남기려 노력해야 하고, 이후에도 노트를 수시로 보면서 복습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하루에 네 시간 강의를 듣고 이를 정리하는 시간은 네 시간에서, 많을 때는 여덟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언수외나 다른 공부에도 소홀해졌고, 하루에 한 시간씩 간신히 감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제2외국어 공부는 엄두도 못 내지 못했다. 수학이 부족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학만큼은 꾸준히 공부하려 했는데, 그나마 공부한다는 게 하루에 정석 한 단원씩을 읽고 넘어가버리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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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24일(월)

그리 만족하진 못했지만 조금은 공부를 했다.

윤리를 6강 듣고, 정리. 언어, 외국어, 그리고 수학.
머리가 아파서 일기장을 폈다.
가장 큰 문제는 수학. 그리고 국사. 둘 중 선택하라면 수학.

국사는 2주 동안 돌리면 수능에서 40 이상은 나올 것이다. 적어도.
수학은 2주 돌리면 얼마나 나올까.
9월 6일 수학 목표 90점. 국사 목표 50점.
힘들다고 포기하면 진짜 아무것도 안 된다.

시간을 되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런데 만약 미래의 내가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가/ 갑자기 소원이 이루어져서 되돌아온 시간이
지금인 것은 아닐까?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되돌아간 그 시점의 나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며
불평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 이 만큼의 시간이 남았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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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힘든 마음에 일기를 꽤 길게 적었던 기억이 난다. 방학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공부량에 몸과 마음이 금세 지쳐 버렸던 것인지. 한 자리에 진득히 앉아 있는 성격이 못 되는 나는 고1 담임선생님께 ADHD증후군이라는 별명까지 들었었다. 그런 내게 지루하고 오래 걸리는 사탐 암기는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던 것이다.

때로 노래방이나 오락실 등으로 일탈을 시도하긴 했지만 간신하 하루의 할당량을 채우면서 공부한 탓에 윤리 공부는 목표한 대로 10일 안에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국사 공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방학은 계속 흘러갔다. 개학과 9월 모의고사가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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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4일(월)

개학 D-7 / 9월 모의 D-23 / 수능 D-94

독서실 옆자리 ㅅㅂㄹㅁ는 아무래도 너무 시끄럽다. 조만간 책을 다 찢어야겠다.(;;)
잠이 올 시간이 아니었는데 잠이 와서 어제 공부는 망쳤다.

국사는 꾸준히 보고 있고, 이제 사회사 반 정도와 문화사가 남았다. 일 주일이면 충분히 끝낼 만한 분량이다.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수학도 뭐... 순열 조합 파트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느꼈다. 목표는 9월 6일 90점.

다만 3년동안 나의 손길을 받지 못했던 언어와 외국어가 슬슬 발악하려고 몸을 풀고 있다. 요즘 둘 다 90점선에서 간당간당... 외국어는 단어를 외어야 하는데 손이 안 간다. 듣기도 별로 느는 것 같지 않고.

학기중엔 매일 언어에 2시간, 외국어에 1시간 정도 배정할 생각이다. 95 이상씩은 찍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수학도... 푸는 속도를 빨리해서 “검산” 이라는 걸 나도 한번 해 봤으면 좋겠다ㅠㅠ

20일 쯤 종로 모의고사를 쳐 볼 생각이다. 다음은 내 목표 점수.

언어 93 수리 86 외국어 94 / 근현대사 40 윤리 42 사회 문화 43 국사 40
438점 너무 소박하네.. 사탐에서 40점씩 찍는게 목표다. 어차피 사탐은 다시 정리 할 거니까.
그래도 440 넘었으면 좋겠네.

옆 자리 거지같은 놈이 코 골면서 잔다. 진짜 책 찢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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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책을 찢지는 않았다. ^.^ 8월 14일의 일기는 방학이 끝날 때 쯤 내 심리를 종합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모습이다. 국사 사회사 절반과 문화사를 일주일 만에 끝낼 만 하다고 하는 망발은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다. 결국 끝내지 못해서 학기 중에도 계속 문화사를 공부해야 했다. ㅋㅋ

방학이 끝나 감에 따라 2학기 학기 중 공부에 대한 계획을 조금씩 세웠다. 방학 동안의 공부한 내용을 믿고 다음 모의고사 점수를 조심스럽게 예측해 보았었다. 사실 예측이라기보다는 희망 사항에 가까웠지만..

개학 후 9월 6일 평가원 모의고사가 첫 모의고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전까지 계속 공부해서 사회탐구 성적을 끌어올릴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8월 20일에 사설 모의고사가 잡혔다. 서울에 공부하러 갔다 왔다는 이상한 소문이 학교에 퍼졌었는데, 잘못하면 다 허세였다는 것이 들킬 위기였다 ㄷㄷ

시간은 계속 흘러 개학식이 끝났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학기의 첫 모의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채점이 끝난 후, 난 내 눈을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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