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회홍색 [626207] · MS 2015 (수정됨) · 쪽지

2016-10-21 23:18:48
조회수 10,726

아버지 돌아가신 뒤 워마드하던 여동생과 절연하게 된 이야기.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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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동생 일로 무갤, 여시를 처음 알게 되어 눈팅하던 유동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 온라인 대전에 전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회색분자였기도 하고..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던 사람이었음을 미리 밝힌다.




이 글을 올리기로 결심하기까지 고민을 꽤 많이 했었다.


어딘가 하소연은 하고싶고, 이 황당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는데,


쓸곳이 무갤밖에 없다는게 아이러니했다.


내 페북이나 인스타 같은곳엔 썼다가 쓸데없이 주작이라면서 ㅁㄱ 웜 애들에게 시비걸릴 생각이 들어서 싫었고.



우리 아버지는 지난 7월 30일에 돌아가셨다.


가족들이 집에 아무도 없을때, 혼자 TV보시다가 돌아가셨다.


지금도 어안이 벙벙하고 믿기지가 않는다.



일단 우리집은 3남매다. 내가 장남이고, 밑에 두살 어린 남동생이랑, 나와 나이차가 8살이 나는 여동생이 있다.


사실 나에겐 누나가 있었다. 나랑은 여섯살차이였다.


나이차가 있다보니 정말 나를 많이 챙겨주고 이뻐해줬었고.. 누나한테는 좋았던 기억밖에 없다.


다른 형제들처럼 누나와 싸워보거나 대들어본적도 없다. 누나는 매일 나를 안아주고 뽀뽀해줬고..


아이스크림주고 과자 주고, 시험공부하느라 못놀아줘서 미안하다고 해주던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우리 둘째도 마찬가지다.


더 애기였으니까 누나가 더 이뻐했었다.



그런 우리 누나가 중학교 1학년때,  학원앞 뺑소니 사고로 하늘나라로 갔다.


엄마가 가슴 쥐어 뜯으면서 울던 기억.


우리 아버지 자동차 정비소 반장이셨는데, 갑자기 상태가 위급해져서 일하시다말고 기름때낀 작업복 입으신채로


뛰어 오셔서 누나 임종도 못보시고 주저앉아 우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장례식장에서 엄청 우시면서도 나랑 둘째한테


"누나 하늘나라가서 아프지말라고 인사해줘야지" 하시던 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성실하고 열심히 사셨던 분이었다.


겨울이면 어머니 핀잔에도 호빵을 한가득 사오셔서 누나랑 우리 형제들이랑 같이 나눠먹고..


마당에서 눈사람 만들고 같이 놀아주시던 다정한 아버지였다.


누나 죽기전엔 내가 너무 어려서였기도 하지만


누나가 죽은 뒤로도 우리 형제들에게 큰소리 한번 내신적 없고, 혼내신적 없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차에 치여 누나가 죽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평생 배워오시고 자격증을 가진 자동차 정비업을 더이상 하시지 못하셨다.


차를 미워하셨고, 차타는걸 싫어하셨고...


그래서 직업도 바꾸셨다.



친척 따라다니면서 금팔고 매입하는거 배우시더니,


작은 금은방을 하시게 됐다.


한번은 도둑을 크게 맞아서 큰 손해를 입으신적도 있지만.


큰돈은 못버셨어도 우리 다섯식구 굶은적 없고, 비싼 과외 학원은 못다녔어도 학교다니는데 어려움 없었다.


비싼 옷 비싼 신발은 사기 힘들었지만, 나랑 둘째는 왜 아버지께서 그런 인생을 사시게 됐는지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아버지 원망을 해본적이 없었다.




막내는 누나가 죽고 난 다음에 태어났다.


부모님들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누나가 그리워서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돌릴 딸이 필요해서였을것 같진 않다.



하지만 여동생이 생겨서 우리 형제는 너무 좋았고,


누나 죽은뒤에 항상 우울한 우리 가족에 생기가 돌아서 좋았다.


나는 누나가 나한테 해줬던것처럼 동생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정말 우리 막내 위해서라면 내가 안해본것이 없었다.



나랑 둘째는  중학교 다닐때 같이 알바를 해서 막내 생일에


리복 퓨리를 사준적도 있다.


동생은 좋은 신발 신고 학교 다녔으면 좋겠단 생각이었다.


옷.. 노트북.. 핸드폰.. 때마다 좋은것이라면 다 베풀었다.



한번도 동생 혼낸적도 없고, 동생에게 욕해본적도 없고, 화내본적도 없었다.


둘째도 마찬가지였고,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딱히 버릇없이 구는 행동들이 있다거나하지 않았다.


잘자라주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말썽피우는 일 없이 무난한 학생으로 잘다녀주고 있었다.



그러던 막내가 대학엘 가게 됐다.



이제와서 밝히자면, 나는 형제가 많은 우리집에서 모든 형제가 다 대학을 갈 수 있단 생각이 들지 않아서,


대학입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작은 인테리어 업체에 들어가 이런저런 막노동들 다 경험해보면서 밑바닥부터 일을 배우면서,


사무실에서 캐드랑 라이노, 스케치업 같은 프로그램들도 배우면서,


국비로 실내디자인 직무교육 받으면서 실내건축기사 자격증을 땄다.


독학사를 하면서 학위를 땄고, 지금은 조금 더 큰 인테리어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장남인 내가 학업을 포기한다니 가슴아파하셨지만,


나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꼭 공부 다 할테니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수능은 봤었고, 대학교 합격증도 받았었다.


공부를 잘했던건 아니었다.


인하대와 충북대학교에 붙었었다.



둘째에게는 형이 열심히 일해서 도와줄테니 공부 열심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둘째는 진짜 멋진 녀석이다.


정말 열심히 공부해주었고, 고등학교때 성적이 가파르게 상승해서 성적도 아주 높았다.


공군사관학교에 붙었고, 졸업해서 무사히 임관했다.


임관식때 우리 다섯식구 정말 행복했었다.



어머니 아버지 건강하셨고, 나도 직장에서 자리잡아 꾸준히 돈 잘벌고 있었고..


동생은 군인이 되었고, 여동생도 무난했으니까.


어쨌든 여동생이 대학에 진학해서 성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집에서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집에 고소장이 날아왔는데, 막내에 대한 일이니 급히 집으로 오라고.


동생의 학교는 서울이었는데, 우리 집은 청주였고, 동생 집주소는 옮기지 않아서 집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사유가 모욕죄였다. 그게 작년 가을의 일이다.



당연히 뭔가 착오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동생에게 물으니, 별거아닌 사소한 일로 비판적인 댓글을 썼는데, 그걸 누군가가 고소했다는거였다.


걱정이 되어 담당경찰과 통화를 했지만, 별거 아닌일이라해서 마음을 놓았다.


경찰이 아마 무죄 뜰거 같다고 말했는데, 진짜 그렇게 되었다.


그저 어쩌다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이라 생각했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더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번 더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똑같은 패턴으로 어머니께 전화, 그래서 난 또 막내에게 전화..


"너 굿이라도 해야겠다. 왜이렇게 자꾸 이런일이 일어나니 ㅋㅋ"


하면서 웃으며 전화했던 기억이 난다.


막내도 웃었었다.




하지만 이번엔 처음과 같지 않았다.


벌금형을 받게 되었고, 나는 대체 무슨 글을 쓴것이냐고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동생이 나에게 대든 건.


아버지 역시 너무 걱정이 되셨는지 동생에게 해당 글을 보여줄것을 요구하셨고,


여동생은 정말 완강하게 저항했다.


얼마나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지, 내가 알던 여동생이 맞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형제가 화를 내거나, 부모님이 화내시고 윽박지른일은 없다.


약간 언성이 올라갔을지언정, 그건 답답한 마음에 그랬을뿐,


'아니 내용 좀 보자는 거잖아.' 정도의 내용들이었다.



나는 동생이 대체 어떤 글들을 쓰고 다니는지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동생의 아이디와 비번은 쉽게 알아냈고, 네이버, 다음, 페이스북, 인스타...


전부 접속해 검색하고 작성글들을 찾아봤다.



특이할것도 없다.


여성시대, 하고 있었고.. ㅁㄱㄹㅇ 회원이었다.



당연히, 한남충, 애비충.. 유병단수.. 이런 ㅁㄱㄹㅇ 용어들 다 쓰고 있었다.


아버지, 나, 둘째.. 이렇게 가정내에 '한남충'이 셋이나 있어, 자신도 모르게 코르셋을 입고 살았으며,


드디어 코르셋을 벗게되어 살것같다는 글을 봤다.



경제적 능력이 재기해서 무능한 씹치 애비충 때문에 힘들었다.


심지어 둘째 오빠가 군무새라 봊나 짜증난다. 집에 올때마다 군인냄새 때문에 숨이 막힐것 같다.


쎈척하는 말투 극혐이다..


이런 내용들.



나에 대해서는, 그냥 무능한 노가다충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손발이 벌벌 떨리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


그런데 웃긴건, 나는 그 순간에도 내가 대체 이 아이한테 뭘 잘못한건지 생각을 했다는거다.


무엇보다 아버지한테 애비충이라니. 이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생을 밖으로 불러내어 이야길 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글을 뒤져본 일, 허락없이 접속한 일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화를 냈다.


그에 대해서는 사과하겠다. 하지만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않느냐.


유병단수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화를 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미러링이라고, 그저 따라하기일 뿐이니 심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설명만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고소장들이 날아오는 상황에서,


어떻게 오빠가 동생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둘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결국 둘째는 끝내 격분하고 화를내고, 동생을 심하게 질책했다.


당장 아버지께 사과드리고 사죄하라는 식으로 갔다.


군인이어서 그런지 더욱 참기 힘들어했던것 같다.



설날, 가족들이 다 모인곳에서 둘째는 그런 글들의 존재를 아버지 어머니께 알려드리고,


동생에게 부모님께 공개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결국 또 막내는 대들었다.



그 이후 ㅁㄱㄹㅇ, 넷 페미니즘 같은 것들을 찾아보고 유심히 보게 되었다.


나는 오히려 동생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서, 비판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냥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나중엔 막내가 그러더라.


이쁘고 착하고 무난한 여동생이길 바라는 마음. 그게 바로 자기를 옥죄는거라고.


그래서 자기는 숨이 막힌다고 하더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형제들을 위해서 학업을 포기했다. 좋은 명문대학은 아니더라도 진학해서 캠퍼스 낭만을 즐겨볼 수도 있었다.


둘째는 막내가 사립이든 국립이든 선택의 자유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관학교에 갔다.


군인 되고싶었던 아이 아니었다. 공군사관학교 간것도, 집이랑 가깝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동생은 원래 광고홍보학 같은걸 공부하고 싶어했지만, 취업현실과 이런 학과들은 사립대들에만 있다는 이유로 포기했었다.



동생에게 좋은 대학을 가라고 강요하거나 부담준 사람들은 없었다.


막내는 학원도, 과외도 해봤다.


과외는 내가 붙여줬다.


대학 선택할때도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말한적 한번도 없었다.


너 하고싶은 학과, 너 하고싶은 공부하라고 말했던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나... 참담한 심정이었다.



둘째는 부대로 복귀했고, 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나는 이때 둘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게 안타까우셨는지 막내와 대화를 자꾸 시도하셨던것 같다.



아버지는 과거 사람이었다.


아버지 시대때는 '당연했던 것'들이, 막내 눈에 그렇게 안보인다고 해서,


아버지가 막내나 사회나 어머니한테 사죄해야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막내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자기 인생이 없이 살아왔고, 아버지의 무능력 때문에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는 비판과 함께.


그때는 나도 너무 화가 났다.



동생에게 전화해서 이런저런 말싸움을 격하게 했던것 같다.


그래, 그럼 오빠가 죽어줘야하느냐. 아버지가 죽어야겠느냐. 둘째오빠가 군인을 그만둬야 하는거냐.


네 인생과 너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 세 남자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줘야 되는거냐고 소리질렀다.


아버지는 결국 우울증이 오셨다.



여동생은 그날 이후로 주말이 되어도 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어머니와는 종종 전화통화를 했지만, 나와 둘째하고는 아예 전화나 카톡을 하지 않았다.


카톡은 차단을 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아버지의 우울증은 심해지셨다.



그러다가 7월 30일.


주말이 되어 나와 둘째는 모두 본가에 내려왔고..


집에서 TV를 보고계시는 아버지께서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셨지만, 나는 예삿일로 생각했다.


둘째가 축구화를 사야한다기에, 잠깐 동생과 나갔다오겠다하고 집근처 나이키 샵에 다녀온 길..



아버지께서 주무시고 계시는줄 알았다.


하지만 표정이 이상했고, 역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우리 두 형제는 소리를 질러대며 아버지를 흔들었고,


119를 부르고.. 둘째는 아버지 가슴에 올라타서 오열하면서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나중에 둘째가 그런 말을 했다.


아버지 몸이 부서질까봐 이걸 계속해도 되는건지 모르겠어서 자꾸 팔에서 힘이 빠지려 하더라고..



집밖에 나갔다온 시간은 채 두시간도 지나지 않았었다.


나와 둘째는 아직도 그때의 외출이 너무나 후회된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장례식장으로 아버지를 모신뒤,


막내가 장례식장에 왔다.


둘째는 격분해서 화를 내려는걸, 내가 말렸다.


덕분에 장례식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우리 3남매는 거의 대화없이 장례식을 치뤘다.



발인하고 난 마지막 날,


결국 둘째는 터져버렸다.


그래, 유병단수해서 니 말대로 애비충 뒤져서 좋냐 이 개같은 년아. 하면서 욕하더라.


니가 아버지 볼 낯짝이나 되냐.


평생 큰누나 그리워 하시며 사시고 큰누나 일로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셨는데,


고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안해본 년이 어디서 이상한거나 배워와가지고 저렇게 마음에 상처입고 돌아가시게 하느냐고.


넌 이제 내 동생도 아니라고..



막내도 후회는 되는지, 아무 말대꾸 않고 욕들으며 울기는 울더라.


오빠들이 저한테 쌍욕하는게 처음인데 당연히 힘들었겠지.


게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발인한 날부터 그런 소릴 들으니.



나중에 들으니, 아버지께서 죽은 큰누나의 모습을 저한테 투영하려 한거 다 안다고 하면서


아버지한테 엄청 쏘아붙이기도 했다고 들었다.


대체.. 뭘 어떻게 배우고 잘못 물들면 이렇게 되는건지 정말 이해가 안된다.



우리 가족,


큰누나 잃는 큰일을 겪으면서도 잘 극복하고 행복한 미래를 향해서 잘 살고 있었다.


막내가 그렇게 마지막에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지지만 않았더라도,


아버지가 갑자기 이렇게 가셨어도 이런 관계는 되지 않았을거였는데.....


나도 이제는 막내를 편히 보기가 어렵고, 용서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둘째는 이미 절연을 선언했고,


어머니는 매일 전화해서 말리고 계시지만, 유독 아버지를 따르고 존경했던 둘째인데다..


군인이 되면서 더 단호해지고 예의와 도리에 대해 더 엄격해진 녀석이라..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좀,


여성운동도 좋지만..


혜택받고 살며,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희생해가면서까지 위해주는 환경에서 살아온 여자들은,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닌 경우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만..


내 동생인 경우에는 그들을 지지할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지면 안되는거 아니었나 생각한다.


내 여동생이 피해자라면, 대체 누가 가해자가 되어야하는건가.


한평생 성실히 살다가 가신 우리 아버지?


동생들을 위해 희생했던 나, 둘째?


그저 전업주부로만 살아오신 어머니?



긴글, 끝까지 읽어주는 갤러가 있다면 고맙고,


인증이 없다고 주작이라해도 할말은 없다.


그렇다고 장례식 사진을 올리는 것도 우스워서 그렇게는 하지 않으려고한다.


그저 뭍힐 글이라도 하소연한 것에 만족하면서 글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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