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534033] · MS 2014 (수정됨) · 쪽지

2015-03-28 20:19:15
조회수 8,746

우리 헤어진지 일년이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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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처음 만나 열여섯이 되던 나,
어리고 어리고 어린 나이지만
네가 너무 좋더라.

반에서 급식을 먹고 남은 상추를 모아서
엄마가 비싸다고 상추를 안사준다고ㅡㅡ
싸가도 되냐며 사랑스럽게 묻던
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지금보다도 더 철없던 어린 마음에
여자친구도 자랑삼아 많이도 만나보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너에게 처음으로 진심이었어.

너에게 사랑을 배우고,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여자를 배우고,
삶에 대한 자세도 배웠지.

민족 최고의 고등학교에 도전하던,
1,2 차를 모두 붙고 면접에서 아쉽게 떨어져 눈물 흘리던,
네 모습이 아직도 선해.
이렇게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러운데,
놀기도 이렇게 잘 놀면서
어쩌면 공부도 이렇게 잘할까.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어.

결국 같이 검정고시를 보려 하다가,
마음을 돌려 함께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됬고,
너와 같은 동아리에도 들게 됬지.
이렇게 매주 어색하고 불편한 만남이 될 줄 알았다면,
그 때 같은 동아리를 선택하는게 아니었는데.
너를 따라 어쩌다보니 들게 된 동아리에서 만난
동아리 담당선생님이 지금의 담임선생님이 됬지.
세상에 정말 우연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들더라.

너와 헤어지고 나서도
맞아, 너도 알다시피 올해 초 연애를 다시 해봤어.
스무살의 누나랑.
절반은 내가 이렇게나 잘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절반은 이제 너를 그만 생각하기 위해서.
그런데 자꾸만 행동 하나하나 너와 비교하게 되더라.
이건 아니다싶어 그만두게 됬어.

어쩌다보니 너와 헤어진 일 년 동안,
단 하루도 네 생각이 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네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더라.
정말 단 하루도.

한 두달 전엔,
너에게 사실 아닌 소문이 들려
내가 오해를 사기도 했지.
너한테는 정말로 잘 해주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서로 원망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네.
내 친구들이 말하는 것처럼,
너와 네 친구들 역시
아마 나를 많이도 싫어하겠지.

헤어진지 일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너를 많이 그려.
이제
네 눈을 보고 사랑한다고 웃으며 말하고,
너를 안고 사랑한다 입을 맞추는
이런 감정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데도
왜일까, 나는 아직도 너를 많이 그려.
너를 그리워하는 걸까,
행복했던 나를 그리워하는 걸까.

너 때문에
나도 영화관에 가던, 어딜 가던 콜라를 마셔.
라면을 먹어도 꼭 진라면만 먹고,
카톡을 보내도 꼭 습관적으로 너의 말투를 따라해.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원디렉션 노래를 듣고,
괜히 페북을 내리다 강동원 사진이 눈에 띄면 나도 좋아.

너의 일부가 나의 일부가 되고,
그렇게 내가 되어버린 나의 일부가
또다른 누군가의 것이 되더라.
씁쓸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

여전히 명확하고 큰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전히 한심한 내 모습을 봐.
부끄럽기 짝이 없지.
어쩜 이렇게 변함없이 한심할까.
존ㄴ나 소나문줄 시발

너와 결국 이런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너에게 정말로 감사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너만한 스승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친구들은 아직도 장난삼아 참 네 얘기를 많이해.
네 이름을 부르며 날 놀릴 때마다
웃고 때리고 넘어가지만
정말, 만감이 교차하더라.

내 일상에 네가 너무 많이 녹아있다.
지금 오글거려서 때리고 싶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너와 함께하던 부분이고, 추억이고,
너와 함께 있던 공간이야.
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때 함께 앉아있던 너를 수식하는 것만 같아.

아직은 우리 정말 많이 어리지만,
조금 더 어른이 되서
조금 더 성숙해진다면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너를 바라볼 수 있을까.

너에게 정말로 감사해, 진심으로.
너를 만난건 내 인생에 가장 크나큰 축복이 아니었을까.
너를 만난 일 년 조금 더 되는 시간 동안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했었어 정말 많이.
내가 가장 동경하는 사람이 나를 동경해준다는거,
정말 달콤한 일이더라.

나도 공부란 걸 좀 해볼 생각이야. 죽도록.
수능이 600일 정도 남았네
평준화 고등학교에서 기말고사 국영수 내신이 5.3 등급이니 말 다했지.
모의고사는 국영수 3등급 정도 나와.
놀랐지?
너와 헤어지고 단 하루도,
설령 내신고사 하루 전날에도
책상에 앉아 맘 잡고 공부해본적이 없어.
이게 그 결과야.
몰락해버린 내 모습이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너-
누군가의 사랑이 되어 행복하게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 만약 인연이라면,
지금 이런 오해와 원망, 짜증어린 상황 속에서도
다시 만나게 될거고,
그렇지 않다면 인연이 아닌 거겠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갈거라고 했지.
너라면 갈 수 있을거야.
네가 아니면, 도대체 세상 어느 수험생이 갈 수 있을까.
내가 보아온 수많은 사람들 중에
너는, 가장 대단한 사람이니까.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던.
너는 내게 가장 고마운 사람이야.
고등학교를 졸업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다못해 동창회에서라도,
너를 만나게 되겠지.

그 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너를 만났으면 한다.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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