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엽신 [439425] · MS 2018 · 쪽지

2014-11-24 13: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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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비 문학 마지막★ - 역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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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줄거리] : 옥화가 운영하던 화개장터 근처 한 기숙학원의 서울대 대비반에서 계연은 아쉽게 연세대에 합격하고 옥화의 아들 성기는 중대 최저마저 맞추지 못하게 된다. 계연은 성기를 마음에 두고 있기에 성기가 어떤 대학을 가든 대학생이 되어 같이 놀기를 원한다. 입시가 끝나게 되어 체장수 영감은 딸 계연을 데리고 신촌으로 가려 한다. N수살이 낀 성기는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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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잘 가거라."

옥화는 계연의 조그만 보따리에다 기숙학원 브로-셔 하나를 정표로 넣어 주며 하직을 하였다.

계연은 애걸하듯 호소하듯한 붉은 두 눈으로 한참 동안 옥화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다신 오지 마라."
옥화는 계연의 머리를 쓸어 주며 다만 이렇게 말하였고, 그러자 계연은 옥화의 가슴에다 얼굴을 묻으며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옥화가 그녀의 그 물결같이 흔들리는 둥그스름한 어깨를 쓸어 주며,

"그만 울어, 아버지가 저기 기다리고 계신다." 하는 음성도 이젠 아주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럼 편히 계시요." 영감은 옥화에게 하직을 하였다.

"하라부지 거기 가 보시고 거기 여의찮거든 여기 와서 다시 반수 시킵시다."
옥화는 또 한번 이렇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오빠, 편히 사시오."
계연은 이미 시뻘겋게 된 두 눈으로 성기의 마지막 시선을 찾으며 하직 인사를 했다.

성기는 계연의 이 말에 꿈을 깬 듯,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계연의 앞으로 당황히 몇 걸음 어뜩 어뜩 걸어오다간, 돌연히 다시 정신이 나는 듯 그 자리에 화석처럼 발이 굳어 버린 채, 한참 동안, 장승같이 계연의 얼굴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편히 사시오."
이렇게 두 번째 하직을 하는 순간까지도, 계연의 그 시뻘건 두 눈은 역시 성기의 얼굴에서 그 어떤 기적과도 같은 구원만을 기다리는 것이었고 그러나, 성기는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버릴 뻔하던 것을 겨우 버드나무 가지를 움켜잡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계연의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은, 옥화와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이 성기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으나,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인 성기의 두눈엔 다만 불꽃이 활활 타오를 뿐, 아무런 새로운 명령도 기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빠, 편히 사시오."
하고, 거의 울음이 다 된, 마지막 목소리를 남기고 돌아선 계연의 저만치 가고 있는 항라 적삼을, 고운 햇빛과 늘어진 버들가지와 산울림처럼 울려오는 뻐꾸기 울음 속에, 성기는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성기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이듬해 우수(雨水) 경칩(驚蟄)도 다 지나, 청명(淸明) 무렵의 비가 질금거릴 즈음이었다. 주막 앞에 늘어선 버들가지는 다시 실같이 푸르러지고 살구, 복숭아, 진달래들이 골목 사이로 산기슭으로 울긋불긋 피고 지고 하는 날이었다.

아들의 미음 상을 차려 들고 들어온 옥화는 성기가 미음 그릇을 비우는 것을 보자, 이렇게 물었다.

"아직도 너, 서울대 쪽으로 가 보고 싶냐?"

"……"

성기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1수하면서 나랑 같이 살겠냐?"

"……"

성기는 역시 고개를 돌렸다.

(중략)
"나도 처음부터 영감이 '스카이 미만 잡' 이라고 했을 때 가슴이 섬짓하긴 했다. 그렇지만 설마 했지, 그렇게 남의 간을 뒤집어 놀 줄이야 알았나. 하도 아슬해서 이튿날 지낙사(之落寺)로 가 라인까지 잡아 봤더니 요것도 남의 속을 빤히 듸려다나 보는 듯이 재줄 대는구나, 차라리 망신을 했지."

옥화는 잠깐 말을 그쳤다. 성기는 두 눈에 불을 켜듯한 형형한 광채를 띠고, 부들부들대며 그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수능 안봤으면 또 모르지만 한번 보고 나서야 이미 성적표가 있는듸 어찌겠냐."

그리고 부디 에미 야속타고나 생각지 말라고 옥화는 아들의 뼈만 남은 손을 눈물로 씻었다. 옥화의 이 마지막 하직같이 하는 통정 이야기에 의외로도 성기는 도로 힘을 얻은 모양이었다. 그 불타는 듯한 형형한 두눈으로 천장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성기는 무슨 새로운 결심이나 하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성적 맞춰서 지방대 쪽으로 가 볼 생각도 없다. 학원에서 다시 +1수를 할 생각도 없다, 하는 아들에게, 그러나, 옥화는 이제 전과같이 고지식한 미련을 두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어쩔랴냐? 너 졸 대로 해라."

"……"
성기는 아무런 말도 없이 도로 자리에 드러 누워 버렸다.

그리고 나서 한 달포나 넘어 지난 뒤였다.

성기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산나물이 화갯골에서 연달아 자꾸 내려오는 이른 여름의 어느 장날 아침이었다. 두릅회에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키고 난 성기는 옥화더러,

"어머니, 나 책가방 하나만 맞춰 주."
하였다.

"……"

옥화는 갑자기 무엇으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이 성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지도 다시 한 보름이나 지나, 뻐꾸기는 또다시 산울림처럼 건드러지게 울고, 늘어진 버들가지엔 햇빛이 젖어 흐르는 아침이었다. 새벽녘에 잠깐 가는비가 지나가고, 날은 다시 유달리 맑게 개인 「화개장터」삼거리릴 위에서, 성기는 그 어머니와 하직을 하고 있었다. 갈아입은 옥양목 고의 적삼에, 명주 수건까지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난 성기는, 새로 마춘 새하얀 책가방을 걸빵해서 느직하게 엉덩이 즈음에다 걸었다. 위쪽 주머니에는 새하얀 프린트들이 가득차 있었고, 아래 주머니에는 인강 교재 몇 권과 간단한 필기구가 좀 들어 있었다.

그의 발 앞에는, 물과 함께 갈리어 길도 세 갈래로 나 있었으나, 중대 쪽엔 처음부터 등을 지고 있었고, 동남으로 난길은 지잡대, 서남으로 난 길이 도서관, 작년 이맘 때도 지나 그려가 울음 섞인 하직을 남기고 체장수 영감과 함께 넘어간 산모퉁이 고갯질은 퍼붓는 햇빛 속에 지금도 하동 장터 위를 굽이돌아 지잡대 쪽을 향했으나, 성기는 한참 뒤 몸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은 지잡대 쪽을 등지고 도서관 쪽을 향해 천천히 옮겨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이 발을 옮겨 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어.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서 있을 어머니의 학원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갈무렵 하여서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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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기는 N수살이라는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도서관 독학을 선택하게 되는군요...

제 혼을 실어 만든 마지막 작품입니다. 저는 내용의 깊이나 외양 묘사, 감정적 측면에서 N수몽보다 더 좋다고 느껴지네요.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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