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UBIO16 [496355] · 쪽지

2015-06-07 20:43:00
조회수 5,853

죄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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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상담이라는 연유로 전교1등의 부모가 왔다. 당당한 그 애와 그 애의 부모를 보자하니 화가 치밀었다. 나는 왜 저렇게 되지 못했나. 무작정 속으로 화를 내다보니 이러한 감정이 발하는 이유를 되짚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저 아이에게 투영되는 과거의 나를 보는 듯 해서 그랬다. 현실은 너무도 볼품없다.


과거의 나와 나의 부모는 언제고 당당했다. 모두들 선망의 눈길로 날 쳐다보았고 꼿꼿하게 세운 목과 어깨죽지에는 힘이 가득 들어가있었다. 가령 공부를 어떻게 했냐던가, 어쩜 그렇게 공부를 잘하냐던가. 쏟아지는 질문 세례 속에서 아닌 척 겸손한 척 했건만 사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멋졌다. 모두들 그리도 원하던 전교 석권. 3년 간 한 번도 놓쳐본 적 없던 일등 타이틀. 이름 석자만 대어도 부러워하는 학교의 수재 중의 수재.

시험이 끝나면 다들 나에게 답을 묻고, 내 시험지가 정답지인냥 비교하고. 선생님들은 나를 맹신했다. 어느 누구도,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날 무시할 수 없던 이유가 있던 그 시절. 성적은 떨어질 일도, 망가질 일도 없었다. 난 늘 잘해왔고 늘 잘하고 늘 잘 할 것이니까. 난 항상 고고했다. 소위 잘나간다는 고등학교에 원서를 쓰고도 나는 합격여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결과는 보지 않더라도 합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전적으로 달라졌다.

더 이상 아무도 나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다. 가끔 내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모르는 친척들만이 내 상태를 모르는 채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성적표를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다. 혼날까봐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냥, 엄마 마저도 나에게 모든 기대를 놓어버릴까봐. 무엇보다 엄마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당신의 몸은 챙기지도 않으면서 내 비싼 과외비와 인강비에는 서슴이 없었고 내 학비에 당신의 모든 것을 던졌다. 난 환경을 탓해서는 안됬다. 내 환경은 최상 중의 최상이었다.

매일 아침 짜증을 내며 일어나서 학교에 간다. 집 앞에서 타는 카풀로 편안하게 학교에 도착한다. 학교 언덕 오르는 것 조차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공부가 어렵다고 친구들과 놀기 일쑤이며 모든 꼬투리를 잡아 기필코 놀고 만다. 그렇게 어물쩡거리며 하루가 지나가고 노느라 고단해진 몸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서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무한한 같은 패턴.

철없던 딸은 오히려 일탈을 즐겼다. 내신이라는 족쇄를 풀고나니 무한한 추락도, 깊은 침전도 무엇 하나 두렵지 않았다. 내려놓는다는 것이 이렇게 편하다니. 진작 이렇게 할 걸이라는 온갖 같잖은 말로 자기 자신을 위안하며 충분히 역전할 시간은 있다고 착각했다. 나 자신에 대한 과신과 자만이 나를 파멸에 치닫게 하였다. 성적이 안 나오면 환경을 탓했고 모든 것은 나의 죄가 아닌 냥 살았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모든 건 내가 좋은 학원을 다니지 않아서 그렇고 더 좋은 인강을 듣지 않아서 그래, 라는 간사한 말로 나 자신을 속였다. 그리고 나는 수긍했다.

엄마는 매일 아침 나보다 일찍 일어나서 밥을 준비했다. 딸이 밥맛이 없을텐데 무얼 해주면 잘 먹을까라던가. 갖은 생각을 하며, 엄마는 딸을 위해 밥을 준비한다. 그것도 모르는 철없는 딸은 오늘도 반찬투정을 한다. 엄마는 겉으로는 잔소리를 하지만 마냥 미안하다. 더 좋은 음식을 해주지 못한 것, 더 좋은 과외 선생님을 붙여주지 못한 것, 엄마가 무능력해서 미안한 것. 밤에 돌아온 딸은 아침과 마찬가지로 짜증을 낸다. 가뜩이나 힘들텐데 성적을 물어볼 수도 없다. 그냥 혼자서도 잘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엄마는 하루를 마무리한다.

엄마 역시 힘들었다. 직장에 나가서 스트레스 받고. 돈을 번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별로 좋지도 못한 형편에 화가 난다고 해서 당장 그만둘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뻔히 보이는 수업료며 급식비만 해도 빠듯했다. 그래도 엄마는 딸을 보며 힘냈다. 우리 가족의 미래인 딸이 공부를 하는데 도움은 못 될 망정 짐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엄마는 오늘도 새벽 같이 일어나 밥을 준비하고 직장으로 나간다. 여름에는 작열하는 태양빛을 쏘이며, 겨울에는 얼어붙은 빙판길을 지나서. 혹 감기라도 걸리는 날엔 물을 끓여 마시는게 고작이었다. 당신이 쓰는 돈은 너무도 아까웠다. 이 돈이면 딸에게 책을 한 권 더 사줄 수 있고, 먹고 싶어하던 통닭 한 마리를 더 사줄 수 있었다.



엄마에게 미안하다. 엄마에게 미안하다. 엄마 미안해. 내가 이 정도라서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 쟤처럼 좋은 딸이어야 했는데 엄마 기대도 내가 다 무너뜨리고. 이게 다 나 때문이야. 엄마는 날 위해 모든 것을 했는데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엄마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이 모든 것을 알고서도 방관하고 자만했던 나 자신이 너무도 가증스러웠다. 일말의 것도 용서되지 않았으며 혹 조금의 용기만 있었다면 이미 어디선가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죽을 용기조차 없던 겁쟁이였으며. 무엇보다 내가 지금까지 저질러놓았던 모든 것들을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그만 둔다면 난 정말 겁쟁이가 될 것이다. 되돌려야 한다. 모든 것을 원상태로. 과거의 빛나던 내가 되야만 했고, 착하고 공부잘하는 딸, 성실하고 성적 좋은 학생,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생각해도 멋진 내가 되어야만 했다.



저 아이를 보면 아직도 마냥 짜증이 난다. 너무도 익숙한 장면이라서. 내 눈 앞에 투영되는 저 녀석은 과거의 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데, 찬란했던 시기가 이젠 영원히 과거에 갇혀있을까봐 두렵다. 현재의 나는 너무나도 볼품없고 하찮다. 그냥 겉으로만 괜찮은 척 센 척하는 겁쟁이에 불과하다.

과거의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아 현실의 나를 증오한다.
부디 미래의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길 바란다.

이젠 다시 공부하러 가야겠다.



BGM : 프라이머리 - 독




오르비 분들은 당연히 잘하시겠지만, 저처럼 못 된 자식이 되지 마세요.
죄책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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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학 · 534033 · 15/06/07 20:46 · MS 2014

    스크랩해갈게요 좋은 글이네요.

  • 파워문돌이 · 517146 · 15/06/07 20:48

    저도 어렸을때 기대대로만 했다면 지금즈음엔 참 달랐을 텐데.. 중간중간 공감되는 부분이 많네요ㅠ 원래 잘했던 사람은 다시해도 잘해요 힘내세요!!ㅎㅎ

  • Axier · 575225 · 15/06/07 21:00 · MS 2015

    시간 지나 내 몸에 쌓인 독...

  • 엠마왓슨덕후 · 520643 · 15/06/07 21:07 · MS 2014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을 긍정합니다.

    잘 됩니다.
    잘 됩니다.

    SNUBIO16님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 맥스슈어저 · 578530 · 15/06/07 21:12 · MS 2015

    너무 길어서 안읽음

  • 해달바람 · 480550 · 15/06/07 21:44 · MS 2013

    사람이 참 일관성이있네여 ㅎㅎ 한결같이 xx움

  • 재수-서울대화생공 · 524013 · 15/06/07 22:48 · MS 2014

    대학생 그렇게 강조하더니 인간성이 참 돋보이시네요 ㅋㅋㅋㅋ

  • 연대가는기린 · 574729 · 15/06/08 06:17

    표현한게 좀 그렇지만 저도 길어서 읽기가..

  • 보보보보아미슈 · 521833 · 15/06/07 21:22 · MS 2018

    고등학교때 제 사정이랑 너무 비슷하셔서.. 저는 결국 삼수라는 불효까지 저질렀습니다 몇학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시간은 차고 넘쳐요 늦지 않았어요 힘내셔서 더욱 정진하시길

  • 2015접수 · 389207 · 15/06/07 21:44 · MS 2011

    할수있을거에요. 해낼거에요. 힘내세요.

  • 딸기날 · 513462 · 15/06/07 21:5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있다.

    마지막에 이 한줄 있으면 정말 현실적이고 따끔한 수기일 것 같네요

  • 20세기학생 · 578592 · 15/06/07 23:09 · MS 20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르비를 하고있다. 라고 하시면 타자이해의 완벽한 예가 되겠네요.

  • 딸기날 · 513462 · 15/06/08 08:17

    졌다

  • Silver Lining · 525230 · 15/06/07 22:18 · MS 2014

    나희덕 시인의 오래된 수틀이라는 시인데 저는 이거 읽고 항상 마음을 다잡아요 힘내세요 저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많이 공감가네요 힘내요 과거의 영광에만 집착하고 묶여있으면 진전이 없어요 저도 씁쓸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지금 할 수 있는일에 최선을 다하려구요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 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 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나희덕, '오래된 수틀'

  • 20세기학생 · 578592 · 15/06/07 22:52 · MS 2015

    고2 학평끝나고 잠시 풀어졌는데, 이 글이 제 마음에 사무칩니다 ㅠㅠ 죄송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글 ㅠㅠ

    ...
    그런데 자네.. 글쓰기 해볼생각 없나?
    글 되게 잘 쓰시네요 ㅎㅎ 스크랩 해가요~

  • 북극달링 · 454213 · 15/06/07 23:07 · MS 2013

    과거의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아 현실의 나를 증오한다.

    부디 미래의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길 바란다.

    이 구절이 왜 가슴을 찌르는지....
    부디 자신을 사랑하시길 기원할게요

  • 서울대물리천문학부 · 562461 · 15/06/08 00:24 · MS 2015

    정말 좋은 글.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 흙요니 · 560787 · 15/06/08 01:15 · MS 2015

    저랑 정말 같은상황인데 ...많이 자극도되고 정신차리게 해주는 글이네요.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싶고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고싶고
    가족들에게 사랑받은만큼 대학합격증으로나마 보답하고싶네요...
    좋은글 정말로 감사합니다!

  • 좋아하다 · 497537 · 15/06/08 01:18 · MS 2014

    저랑 같아요..
    5개월 그래도 마지막은 밀어붙입시다

  • 95년생 수의학도 · 570518 · 15/06/08 03:04 · MS 2015

    올해는 목표 꼭 이루고 부모님의 근심을 덜어드릴겁니다. 이 댓글 안지우고 수능때 다시올게요. 화이팅!

  • 연공수지16 · 531037 · 15/06/08 03:18 · MS 2014

    좋은글 감사합니다.

  • 하얀까마귀 · 551631 · 15/06/08 06:14 · MS 2015

    좋은글...정말정말 감사해요

  • Rublleup · 487437 · 15/06/08 13:19 · MS 2014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수능날승리한다 · 562748 · 15/06/08 23:34 · MS 2015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orbiNorbiN · 411480 · 15/06/09 17:06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수능날승리한다 · 562748 · 15/06/09 23:31 · MS 2015

    마지막 세문장 중 가운데 한문장을 바꿔보시는 건 어떨까요? 왠지 너무 슬픈 느낌이 들어서요.
    과거의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아 현재의 나를 증오한다.
    미래의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현재의 나는 변화할 것이다.
    항상 응원할게요.

  • 나를사랑할수있도록 · 574512 · 16/04/20 18:24 · MS 2015

    탈퇴하셨네요,,  지금 제 상황이 정말 똑같아서 너무 괴롭습니다 혹시라도 글을 다시 보시게되면 쪽지부탁드릴게요,, 자살하신건 아니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