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Scholes... [52980] · MS 2004 · 쪽지

2014-01-05 23: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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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수,독학,의과대학,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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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전 썼던 수기입니다.

 많은 분들 특히 장수생,독학생 여러분들 보시고 힘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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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비에서 많은 정보얻고 많은 사람도 만나게 되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이젠 선배가 되어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여기에 글 꼭 한번 남겨보고 싶었어요...(24살의 작은 꿈이었답니다..^^)
좀 깁니다. 정말 할일없으실때 보세요.^^ 
이름들은 거론할 수 없어 가명으로 처리했습니다.




누구에게 보이려고 하는 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화자찬 하자는 글도 아니다.
언젠가는 꼭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치열했던 2008년을 회고하는 날이 오리라 했는데, 때마침 동생들이 모두 집으로 갔고, 따뜻한 물에 샤워도 하고 와서, 컨디션이 너무 좋다. (사실 아까 서울을 다녀왔는데 서울에서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왔다기 보다는 푹 자구 왔다..;그래서 지금 너무 정신이 말짱하다)언젠가 올것만 같던 날이 바로 오늘인 것 같아, insomnia라는 노래를 무한반복 해 놓은채 이렇게 운을 뗀다.

지난 학교에서 배웠던 학문은 정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고등학교 공부할적에 내가 이런 직업으로 사회에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적도 단 한번도 없었다. 그리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나름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고3 기숙사에 들어갈즈음 희망대학란에 당당히 1.서울대 의예과, 2.연세대 의예과, 3.전남대 의예과 라고 적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그땐 내가 다녔던 과에 대해선 전혀 문외한이었고 또 그럴 생각조차도 없었다.
그렇게 난 그곳에 발을 들여놓아선 안됐었다.(그러나 지난 3년을 절대 후회하진 않는다. 난 금보다 귀한 친구들을 얻었고 사람들을 얻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무지가 약이란 말도 있다.)

사람들은 향후의 전망을 말하기도 했다.
수의학에 대한 전망이 좋네 안좋네는 사실 현자들이 떠드는 잡소리에 불과하다. 내일 당신이 죽을수도 있는데 무슨 10년후, 20년후를 감히 예측한다는 것인가.이런 조언들에 대해선 과감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ㅡ 가슴속에 꼭 품고 있었던 '보람'이라는 두글자를 실현시키기엔 현재 내가 걷고 있는 학문의 길에서 내가 몸으로, 마음으로느낄수 있을련지에 대한 많은 회의도 들었다. 그때마다 옆에서 내 푸념을 항상 들어주었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일년이 흐른 지금 에도 난 그 올가미에서 헤어나올수 없을지도 모른다. 

본과1학년을 마친 어느 겨울 아침.
(그까짓 수의대 본과생활이 의대와 비교가 되겠냐고 물을 분도 있겠다만, 마지막 전전 시험을 칠때 A4를 보면 토가 나올정도로 많은양이었다.퀴즈를 포함해 일년동안 총 54번의 시험이 있었다. 형이 말한 것을 보면, 아마 우리 의과대학 3학년때의 공부 양은 수의대에서의 양의 약 1.5~2배라고 생각된다. 그냥 죽으라는 소리다. ㅡ그런데 또 신기하게 죽는 사람은 없다.)

부모님께서 직접 진주까지 찾아오셨다. 물론 난 그때에도 고3영어과외 2개를 해주며 80만원을 받으며 심심할땐 동생들과 친구들을 불러 통닭을 시켜먹고 맥주를 들이키고 있을때였지. ㅡ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가슴한켠에 남는 추억이지만, 그땐 이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안됐었어ㅡ

"xx야 공부 한번 다시 해보는게 어떻겠니?"... 
학교앞에서 차를 타고 간지 5분만에 나온 엄마의 첫 한마디였다.
머리가 쭈뼛쭈뼛 섰고 아트로핀을 맞은것 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거렸다.
2008년 2월 20일...이날은 내 인생의 가장 컸던 전환점이 아닐까 회자해본다. 
1분의 망설임도 없이 난 선택했다.
"엄마,아빠 한번 해볼게요"
그날로 예정되어있던 과외를 모두 채워준 후, 짐을 싸고ㅡ재미있는건 대학교 짐을 싸는데 하이탑 화1이 내 짐속에 들어있었다..훗.ㅡ 그길로 서울로 떠났다. 2월 24일.

수업도 듣지 않을거면서 왜 서울로 갔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난 다른사람들보다 많이 뒤쳐진 상태임은 분명했다. 본과1년을 하면서 과외도 못하고 그렇다고 몸은 또 건강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시험에 취해,술에 취한때가 거의 365일중에 200일이 넘어갔으니, 몸도 성치않았다. 머리는 현재 90년생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쨌건 여러모로 많은 불리함을 갖고 있었다. 

내스스로의 힘으로 도전해보고 싶었기에ㅡ물론 이 생각이 얼마나 무모하고 멍청한 것이었는지는 말 안해도 알겠지만은...또 내 힘으로 합격했다고는 말 한 적 결단코 없다.오해마시길. ㅡ 학원 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노량진이라는 땅, 학원가의 best들만 모인다는 이곳에 와서 수업 하나도 안듣고 자습만 한다는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가장 약했던 벡터강의를 3월 한달간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 강의는 훗날 2009 수능때 그 어려운(?)벡터를 틀리지 않게 해준 나의 원천이 되었다.


서울에선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들이 있었다기 보다는, 느낀것들이 많았다.
(사실 이런 이야기 저런이야기 되게 많이 적어놨는데, 입학하는 그날까지 끝내 귀차니즘으로 정리하나 못하고 이렇게 짐을 싸서 학교로 와버렸지만) 간단한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난 항상 6시반에 일어나 한달내내 똑같은 곳에서 밥을 주는 고시원식당에서 밥을 대충챙겨먹고 7시 에 자리에 앉아 밥먹는시간, 화장실가는시간,낮잠자는 시간을 빼곤 모두 자습실에서 공부하는 것에 투자했었다. 그 넓은 땅 서울이라는 곳에서 아는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고, 그래서 내옆의 이름모를이에게 의지할수도 없었고, 그래서 그곳에서 난 누구보다도 '곧게' 서 있어야 했다. 조금만 옆으로 기댔다간 내가 목표로 하던 모든것들이 와르르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에 집착했다. 

자습실은 밤 10시가 되면 정리를 했고, 난 언제나 밤 10시가 되기까지 벡터에 미쳐있었다. 하루이틀....이 지나고 보니 항상 같은시간에 짐을 싸는 한 아주머니가 계셨다. 어쩌다보니 나도모르게 "안녕하세요"라고 고개를 숙이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물론 따로 시간을 낸건 아니고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았을 뿐이다.) 조금 친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정도는 아니고, 그냥 어떻게 공부를 하게 되었다 정도는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한의대를 목표로 하셨었지. 

3월 모의고사 성적이야기가 어쩌다보니 나오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40x점이신가?맞으셨고 난 42x이 나왔다. (내가 잘한게 아니라 무지 쉬웠다. 과탐은 3과목이었다.운좋게 공부했던 쪽에서 많이 나왔었다.현역들은 이 글을 보고 날 비웃고 있겠지 후훗.)아무래도 내가 성적이 아주머니보다 좋게 나와서였는지, 그때부터 그 아주머니는 날 더욱더 관심가져하시는것 같았고, 모르는게 있으면 공부하는 시간 중간중간에 이것저것 물어보시기 시작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난 공부시간에 정도를 넘어서서 나를 건드는 건들때면 난 절대 가만있지 않는다.해부학 전정규시험 전전날에도 "xx아 형이다.술먹으러 나와라" 하면 좋다고 옷을 주섬주섬입고 나갔던 '나'이지만, 장난이 도를 넘어선 식의ㅡ은근히 짜증나게 건드는 스타일 ㅡ 간섭은 참질 못한다. 포커페이스와는 거리가 먼 나이기에, 기분이 좋지않으면 얼굴로 모든 오감이 나타나버리는 지라 나중에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그렇다고 난 누굴 악의를 갖고 때려본적은 단 한번도 없다.물주먹이라서?)

그 아주머니가 그정도로 한건 아니었지만, 좀 답답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냥 가르쳐드리려고 하는데도 말을 툭툭 끊으셨고, '나는 화2를 안하는데 화1을 화1의 내용으로 설명을 해달라'는 식으로 되물으셨기에, 자습실에서는 절대 소곤소곤대지 않았던 내가 다른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거같기도 하고 내가 알고 있는것이 잘 전달되지 않아 점점 짜증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 짜증을 참지 못하고 알면서도 "저기요 이거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한채 고개를 푹 숙이고 정사면체를 그렸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xx같고 쪼다같은 행동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땐 정말 화가 났었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아 내가 잘못했구나.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려야겠다.' 생각하고 아주머니를 밖에서 잠깐 뵙자고 불렀다.그땐 정말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하지만 욕을 먹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아주머니에게 욕을 먹고 한시간동안 기분 꿀꿀해 하는것보단 나중에 100일동안 편하게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더 우선순위에 있었으니깐.

"아주머니, 제가 지금 공부하는게 남들만큼 일찍 시작한 것도 아니구요. 제가 여차저차해서 3년을 다니다 이렇게 휴학을 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데요. 정말 제 인생 다 걸고 시작하는 거거든요. 정말 제가 원래 이렇게 매정한 놈은 아닌데 아주머니와 함께 하면서 이것저것 제 테이블대로 진행되지 못하는게 좀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부탁드려요"

진심이 통해서였을까, 아니면 아주머니가 그냥 나를 냅다 무시하기로 했던걸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주머니는 되게 나를 이해해 주셨다. "아 학생 내가 미안해. 서로 공부 열심히 해보자는 뜻이었는데 학생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래선 안될것 같네. 미안하네"

그이후로 이 아주머니는 내가 학원을 그만둘때까지 단 한번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셨다. 그 아주머니에게 정말 못된짓을 한거 같았지만, 어쩔수 없었다 그때는.. (그 아주머니에게 이렇게라도 사과드리고 싶다. 그렇게 나쁜놈은 아니라고. 한의대 합격은 하셨는지 갑작스레 궁금해진다.) 죄송합니다.

이런일이 몇개 더 있었지만, 지면에 모든것을 할애하기엔 내 체력이 감당하질 않는다. 중요한건 내 마음이 그만큼 조급했고 모든것에 만족할 수 없을정도의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4월 5월이 되며 성적은 내가 바라는대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완만하지만,그러나 확실히 성적은 오르고 있었다.(47x-47x-48x-49x) 이때부터 '아 나도 할 수 있겠다' 라는 확신이 차근차근 내 마음에 쌓여왔던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의사라는 직업을 동경해왔던 현역이나 재수생들은 이런 내 마음을 잘 모른다. 삼수생들은 좀 알려나? "내가 정말 의대생이 된다고? 내가 의사가 될수 있다고? 어떻게 내가 그럴수가있지? 정말 될수 있을까?"라는 의심반걱정반의 심리를 말이다. 그런 불안한 마음들이 하나둘 씻겨져 가는 상태였다. 5월경기도교육청모의고사에서 49x점을 받았을땐, 고시원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시원한 맥주 한캔을 따고난후, 한모금씩 마시며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란 책을 두권 모두 새벽 3시까지 봤던 기억이 난다. 

6월 평가원 시험을 치면서 더욱더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모의고사 성적과 수능시험은 전혀 별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전 고등학교 시절엔 맛볼수 없었던 점수들(오르비 기준 자연계 0.x%)을 받으며, 이젠 서울에서의 힘든 싸움을 정리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내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다고 말할 수 있는 '100일'의 밤을 맞이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오면서. 

집에서의 생활은 서울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더 편했다.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따뜻한 집밥을 먹게 되었고, 밥먹을때 줄서서 영어단어를 외우는 시간이 사라진 대신, '우리 결혼했어요'를 보면서 1시간동안 편한 점심시간을 갖었다는 정도?
공부시간도 독서실이 9시부터 문을 여는 바람에 오전9시~오전 1시까지로 변경되었었지.

이제부턴 '나'와의 싸움이 아닌,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밤 10시가 되면 사람들의 왕래가 끊기는 촌동네라서 아침 9시부터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없었다.ㅡ모두 서울로 올라갔을테지ㅡ 혼자와서 혼자만의 작은 책상의 스탠드를 켜고, 한참을 공부하다 또 스탠드를 끄고 혼자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밥을 먹으러 가는 생활....(이는 6월 7일부터 11월 12일까지 반복되었다.)

혹시나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에 외로움을 느꼈는가? 이런 외로움은 '외로움'이라는 단어에 대한 모독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캐스트어웨이라는 영화를 보면 무인도에 떨어진 주인공이 배구공에 얼굴을 그리고 친구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이름이 아마 윌슨였을거다.) 그 경지까진 아니었지만, 새벽1시 독서실을 나오며 하늘에 떠있는 별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던 정도였으니. 그때당시의 외로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내 게시판에 있는 2008년 10월 14일자 글을 보면 얼마나 그 외로움과 싸우고 있었는지 알수 있다. 생각나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모두 적었던 기억이 난다.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적었다. 그냥.)

그 외로움을 극복케 해줬던 사람들은 내 가족들과 A,B,C,D,E,F 친구들이었다.. 나에게 가족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소중한 존재들이고, 위에서 언급한 몇몇의 친구들은 정말 나에게 너무나도 큰 힘들이 되어주었다. 외로움에 견디다 못할때면 독서실 옥상으로 올가 그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10분 20분 풀어놓는 푸념들을 단 한번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나를 웃게 해주었다. 나에게 항상 '넌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항상 전화를 끊을때쯤이면 '힘내라', '오빠 힘내'라는 말들을 해주는 정말정말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내가 이자리에까지 설수있을지 의심할 것이다.

한번 쓰라린 맛을 보긴 했지만(9월달 KICE 시험을 망쳐버렸다. 믿고만 있었던 언어영역이 3등급이 뜨는 어이없는 참사가 발생하고 말았다...다행히 다른과목은 꽤 안정적으로 나왔었지.)그래도 끝까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독서실을 올라가는 계단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생각하는대로 됩니다"..
정말 맞는말이다.
난 이 문구를 보면서 항상 주먹을 30번씩 불끈쥐며 "난 할수 있다. 할수있다. 난 한다. 난 할수있다. 난 한다"를 되뇌였던 것 같다.

그렇게...하루..이틀이 지나고..
정말로 오지 않을것 같았던 2009수능날짜가 다가왔다. 내 인생에 있어 절대 잊지못할 2008년 11월 13일..그날 해는 어김없이 동에서 떴다.
내가 시험을 쳐야 할 곳은 목포고등학교 였다. 예전엔 전남지역의 수재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목포고 불합격을 볼때마다 피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 있지만, 지금은 보잘것없는 지방 평준화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가 이학교 교문사이로 들어갈땐 '그래 여긴 명문고다. 명문고엔 명문 학생이 나온다. 그사람은 바로 나다. 난 할 수 있다. god bless me'라고 되뇌였었다.

언어영역시간. 생각보다 많이 어렵다. 지난 9월에 칼을 한번 맞은 기억이 있기에 너무 신중하게 풀어서였을까? 문제옆에 체크표시가 된 것이 10개가 넘어간다. (난 확실한 답이 아니면 항상 문제옆에 작은 체크표시를 해놓는데, 이것들은 나중에 50번까지 풀고 난이후에 다시 볼 기회가 거의 없으므로 반은 틀렸고 반은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항상 그랬다.) 어익후...이거 5개 틀리면 1등급은 고사하고 언어점수를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공부좀 많이 할 걸 그랬나? (미친 자신감때문이었는진 모르겠지만 난 언어영역공부에 하루에 한시간이상 투자한적이 없다. 6월까진 항상 20분이하로ㅡ한지문씩ㅡ공부했고, 9월이후로는 양을 좀 늘려 3지문정도 봤던것 같다.)
"그래 언어영역은 못쳐도 나중에 수과외로 승부하면 어쨌든 할수 있다. 빨리 잊자"라고 20분을 끊임없이 되뇌였던것 같다. 그렇게 언어시간은 끝이 났다. (나중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언어는 2개틀렸다. 신기하다 정말. 어떻게..;; 언어-2)


수리영역시간. 여기에 모든것이 걸려있다 생각해왔다. 13시간의 공부시간중에 7~8시간을 날마다 할애할 정도로 깊게 공부했고 정말 수학을 잘하는 학생들 뒤꽁무니라도 따라가 보려고 수학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무언가 심상치가 않다. 5번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pass. 6번도 모르겠다 pass. 7번은 풀리네...어라 8번??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건데 안풀리네..? pass......
어쨌든 30번까지 다 풀었다. pass가 12개가 있었다. 시간은 50분정도가 흘렀다. (pass를 하는건 언어영역과 풀이방법이 거의 동일하다. 한마디로 망했다는 뜻이다.) 
남은 50분간 하나도 풀리지 않았던 12개를 풀어야 한다. 한 1분동안은 패닉상태였던것 같다. 머리가 정말 새하애졌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해선 안됐다. 
아까 말은 못했지만 내가 수능시험장을 들어가면서 생각했었지. 
'이 시험은 내 모든걸 건 시험이다. 하지만 이 시험이 내모든걸 대신할순 없다. 내가 다시 경험할 험한 사회의 문턱에 대한 첫걸음일 뿐이다. 이까짓것에 휘둘리면 난 평생을 휘둘리면서 살것이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난 강하다.'
그래. 여기서 내가 질순 없었다. 이제까지 준비해왔던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게 두팔을 꼬으고 있을수만은 없다. 갠또로 찍어서라도 난 맞춘다. 
내 머리의 수학적 사고력을 주관하는 모든 뇌세포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거창하게 묘사하지만 사실 어떻게 풀었는지 기억도 안난다.)
끝까지 풀지못한 pass3문제를 제외하곤 모든 답이 나왔다,. 물론 정답이라고 보장할 확률은 채 50%가 되지 않았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이 pass 3개 빼곤 모두가 정답이었다. 수리 -3)
아...이렇게 망하는 것인가.....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어떤 대인배가 말하길 "수학 졸라 쉽더라. 1개 헷갈리는게 있긴 있는데 그거맞으면 다맞겠어~"........정말 한대 쥐어박고 패버리고 싶었지만, 그럴수있나....다 내가 못해서 이런거지...
(농담으로, 올해 수능때 자살 꽤나 하겠네. 라는 웃지못할 생각도 했었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은 가졌다. 그것이 뭐였고 하니... 6월시험을 쳤을때 난 망한줄알았다. 수학이 그렇게 어렵게 나올줄은 몰랐다. 모든것을 다 포기하고 걍 뛰쳐나가 고시원에 가서 자버리고 싶었지만 진성이가 이렇게 말했었다. '니가 어려우면 니 밑에있는 99명은 죽어난다. 일단 과탐 화투까지 마무리잘하고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지않다.'
6월달 성적을 까고 보니ㅡ 수학은 x00%였고, 나머지 과목까지 합산해서 0.x%가 떴었다. 
이런 선례가 있었기에.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후에 결과만 보고 놓자면, 역시나 동일했다..)

외국어영역. 언제나 자신있는 과목이었기에, 뭐 이것쯤이야 하고 풀었다. 여기에 대해선 딱히 할말이없다. (성적만 까놓고 보자면 외국어점수가 가장 낮았다. xx짓했던것이다.아우 이런 바보.외국어 영역 역대 최악의 성적을 낳는다,.-4)

과탐4개. 너무 어렵다. 정말 내 성적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풀었다고 자신할 정도로 많이 풀고 많이 생각했는데.... 너무 어렵다. 처음보는 문제들이 난무했고 아는걸 적용시키는데도 한참이 걸릴정도였다. 항상 15분을 데드라인으로 잡고 풀고 나머지 15분은 다시한번 검산하는 자세로 공부했는데... 30분이 가까와져가는데도 19번을 보고 있었다. 특히나 지구과학문제는 ....아...생각도 하기싫다.(화1 -1 생1 -1 지1 -1 화2 -1 이었다.)

그렇게 모든 시험이 끝났다. 단하루만에. 정확히 말하면 단 9시간만에.
모든 언론기관과 입시기관에서 한목소리로 '6월,9월 평가원 난이도와 비슷한것으로 추정'을 외쳤다.
아 이런...난 가장 어려웠던 시험이라고 생각하는데..이것들 짜증나 죽겠네...
그날 채점이고 뭐고 가방만 내팽겨놓은채 광주에 가서 창현이, 하늘이와 만나 죽어라 술을 퍼마셨던 것 같다. 술을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날 하루를 잊고 싶어서였을 테다. 

그렇게 한달동안 난 가채점을 하지 않았다. 쿨하게 성적표가 나오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솔직히 말하자면 "쫄아서" 못했다. 그렇게 한달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컴퓨터앞에 앉아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 이제껏 보지 못했던 드라마,영화를 신나게 봤었다. 

성적표가 나오던 날. 그전날밤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었다. 죽을각오(?)를 하고 교육청을 찾아갔다.
어라?성적표 이게 내께 맞나? 할정도였다.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무지하게 잘 나온 점수들이었다. 다시한번 눈을 씻고 쳐다봤지만, 내이름이 분명했다. 동명이인도 없었다. 내가 알기론 1986년 남학생 xxx은 전국에 딱 2명있는걸로 안다.(이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신다면,...이쪽일을 하는분이 위에 계신다. 여기까지.) 
잘친 점수는 아니었지만, 또 그렇다고 엄청 못친 점수도 아니었다. 훗날 이 점수는 날 2월 모든 대학교의 입시기간이 끝나는 그 시점까지 날 괴롭힌다..후훗...

많은 대학교를 알아보고 또 알아보고 또 알아보았다. 사실 모든 학교들이 다 거기서 거기다라고 생각했었기에 (서울대와 연세대 신촌은 예외라고 생각했다. 물론 난 이곳들을 쓸정도의 실력엔 택도없이 부족했기에 그저 경외의 대상이었지,...) 내 점수대에 맞는 학교(사실 이런거 자체가 좀 아이러니하긴하다.) 의대면 아무데나 상관없었다. 하지만 가고 싶은 학교는 있었다. 연원의와 을지의, 고신의...
(여기서 이것저것장단점을 운운하는건 내가 다니는 학교에나, 떨어진혹은 붙은 학교에 대한 예의가 아닌것 같아 적지 않겠다.)

그렇게 원서를 썼고,마침내 고신의에서 처음으로 합격소식을 알려왔다.
그때 난 내가 가장 사랑했던 동아리 '한소리'(신기하게 내이름을 그대로 부르는것과 동일하다.)합숙훈련(전수)을 가서 컴퓨터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밤9시반쯤? 내 셀폰으로 벨이 울렸다.

"xx야 됐다 됐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예전에 내가 들었던 그 평안한 소리가 아니었다. 굉장히 흥분되어있었고 떨려있었다. 이 'XX야 됐다 됐어!!' 9글자에 말 그대로 전율이 느껴졌다. 
아 나도 드디어 의대생이 되었구나.내가 24년동안 그렇게 기도하고 바랐던 그 꿈이 이제 실현되는구나! ....

전화를 끊고 가장먼저했던일은 기도였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터에 나가 기도했다."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가슴따뜻한 의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자세한건 부끄러워서 못쓰겠다.)
더더욱 신기했던 일은.... 이날은 내 아버지의 53번째 생신이셨다. 정말이었다...기도를 마치고 난 아버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 인생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다. 아들 고맙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묵직한게 내 가슴을 쿵하고 때렸다...그랬다,...


그렇게 고신의에서의 행복한 생활(?)을 꿈꾸며 짐을 챙기던 2월의 어느날...또한번의 전화벨이 울린다.
"안녕하세요 연세대학교 입학처입니다. xxx 학생 맞으시죠? 지금 통화는 녹음되고 있습니다. 본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에 추가합격하셨습니다. 본교에 등록하시겠습니까?"

아.......................

난 이말을 듣고 정확히 0.03초만에 답했다. 토시하나 안틀리고 그대로 옮긴다.
"아 당연히 해야죠!"라고..


아....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난다.......

(잠시 좀 가라앉히고..)








그렇게 해서 지금 이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다.


insomnia를 무한반복하고 있지만 난 잠이 잘 와서인지 
글 뒷부분으로 갈수록 대충대충 쓰려고 하는 거같다. 
어제 신당역 2번출구길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아 내가 과외해서 돈 많이 벌어서 어머니 아부지 갈비 사다드리는것보다, 더 큰 효도는 내가 의대에 합격했다는 거구나."

이건 여담이다.그냥 넘겨도 된다.
우리 아버지는 의사이다. 아버지 친구분들을 보면 대부분이 다 의사이다. 예전에 내가 엄마에게 들은 소리이다.
"니 아빠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냐? 하루종일 입이 귀에까지 걸려있었어. 아빠 친구들은 다 의사들인데 자식들은 의대 못보내고 그런 친구들이 많은데.. 이제 니까지 (형도 의대를 졸업하셨다) 의대에 들어가게 되서 니아빠가 완전 기가 살아버리셨다" 

내가 어려서인지 아니면 무식해서인지, 아직 세상을 덜 살아봐서 인지는 모르겠다,
다른게 아니라 이렇게 작은것이 부모님에게 이렇게까지 큰 기쁨을 드릴수 있다는 것을 예전에 몰랐다. 근데 이젠 좀 알것 같다. 이런것이 내가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 라고.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거기 졸업안하고 여기로 왔어?"라고.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항상 떠들고 다닌다.
어느 여론조사에서 40대 남녀 랜덤 2천명을 표본으로 조사를 했는데
"자기가 예전에 하고싶어 했던 일을 하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92%의 사람들이 "아니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반평생 갖고 지녀야할 내 직업이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다면 그 무거움을 나중에 가선 벗어버릴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23살이 되는 때에 그 짐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좀더 가벼운 짐ㅡ어쩌면 더 무거울지도 모르겠지만 ㅡ 으로 바꿔 끼웠다.
물론 이 의사의 길이 내가 생각했던것과 많이 다를 수 있다. 더 힘들수 있고 나중에 가서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분명 있을테다.
하지만,
이젠 내가 하고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어하는 직업을 갖게 되어 기쁘다. 이 기쁨을 평생동안 누리며 살아가고 싶은 작은 소망이 내가슴 한켠에 남아있다.

위에서 신나게 떠들었던것처럼 모든것이 단편소설같이 끝이 난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이제 대하소설의 첫 페이지를 막 끄적였을 뿐이고,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수많은 백지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 각각의 페이지마다 지난 일년처럼 내 모든것을 걸고 걸어가야겠다. 앞으로.

누구보다도 가슴 따뜻한 의사가 되어라.
누구보다도 더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라.
누구보다도 더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라.

파이팅이다 !! 후훗! 잠온다 자자.ㅎㅎ

ⓒAlways...

am 3:59, 28th, March.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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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치는 야들아 힘내거라 너희도 할 수 있단다.


아래의 글은 합격한 그날을 생각하며 쓴 잡글입니다.
스킵 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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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생각도 떠올리고 공부도 조금 쉬어갈 겸.

"2008년 11월을 추억하며."


수리 시험이 끝나고 어머님이 싸준 정성 담긴 도시락을 한숟갈을 먹고 변기통에 다 버렸다. 언어는 10개가 헷갈렸으니 5개가 틀렸을 테고(보통 헷갈리면 50% 정답, 50% 오답이다), 수리는 처음에 안풀렸던 문제 별표체크하는데 별표가 13개 였으니 최소 5개이상... 그냥 볼것도 없이 리턴 오브 수의대였는데, 밥이 들어갈 리가 없다.
밥을 남기게 되면 보나마나 우리어머니는 아들이 시험 못쳤나 싶어 걱정하실 성격이 아니신데도 걱정하실테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렸다.
몸에는 비오듯 땀이 나고 공터에 가 엉엉 울고 싶었지만 참았다. 울면 쪼다같아 보일것 같아서, (결정적으로 무섭게 생긴애들한테 돈 뺏길것 같아서)

나는 가채점이라는 것을 할 생각도 없었다. 그 시간에 한문제라도 더 고민하려고 내가 쓴 답을 굳이 써올 시간 조차 아까웠다. 

그렇게 나는 한달간 폐인처럼 살았다. 정말 집 밖을 벗어나질 않았던 것같다. 300여일간 하루에 채 다섯마디도 하지 않을만큼 줄어든 말수, 시험은 망한 것 같으니 자존감은 땅바닥, 아무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침 12시쯤 일어나ㅡ순억지다,아침은 절대아니지 ㅡ 온갖미드영드일드무한도전뉴스백분토론다큐멘타리 닥치는대로 보았다. 미디어의 가뭄속에서 살아온 내 300일을 만족시키기 위해 오늘은 김치찌개에 밥말아서, 저녁도 김치찌개에 밥말아서 (남았으니 다 먹어야지), 이어폰을 끼고 먹고, 새벽까지 여기저기 인터넷을 헤매다 새벽 5시가 되면 잠이들고,, 또 내일 아침 12시에 일어나 내일은 된장국에 알타리김치에........ 무한반복의 한달이었다.

그렇게 놀면서도, 성적발표일이 다가워지는 것은 직감했다. 00년도 수능 이후 역대최고난이도의 수능이었다고 온갖 떠들어대는 매스컴, 성적에 따른 입시방향에 휘둘릴 수험생들을 노리는 대기업들의 요란한 수능입시발표회 현장들, 나는 볼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점수도 모르고 결정적으로 나는 떨어질 테니까. 이제는 별로 존경하지 않는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그렇게 또 나는 아침 12시에 일어나 목포시교육청을 찾아갔다. 그렇다. 오늘이 성적표 배부일이다.

이날 꿈을 정확히 기억한다. 가끔 하던 공상의 나래였는데, 수능 채점하는 기계가 딱 내꺼 OMR을 잘못 읽어서 만점처리 되는 것 말이다. 똑같이 꿨다...하하하..

닥치라 몽상가여.

교육청을 찾아갔다. 

"저기" (부끄러움의 끝판왕이다.)
"누구세요? 성적표 찾으러 오셨나요?"
"네"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xxx" (반말 찍찍뱉는 버릇없는녀석같으니라구)

두리번 두리번 찾으시더니, 한장을 빼드신다
두근두근 심장이 쫄깃 쫄깃 조용필이 바운스바운스.

그 선생님이 딱 한마디 하신다.
"오우 수능 잘 보셨네요?"

말없이 받아들었다. 내이름 확인. 맞네.

음 언어가...................?????? 이건 뭐지? 잘못나왔나? 확인해봤다.  맞다.
수리는.....읭?? 왜이래 이거??

........ㄷㄷㄷㄷㄷㄷㄷㄷㄷ

이건 뭥미? 심한 멘붕에 빠졌지만,

그래도 일단 좋았다.
야호.

교육청을 나오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전화했다. 피는 못속인다.
"아빠, 받았어요"
"몇점이냐?불러봐라."
"언어는 xxx 백분위는 xx, 수리는 xxx 백분위는 xxx....영어는 불라불라 과탐은 주접주접이에요"
아빠의 한마디도 내 평생 잊을 수 없다,.
"어이코!! 됐다!"

원래 걸어갈 거리가 절대 아니었는데 집까지 걸어갔다. 상쾌한 공기가 필요했다. 숨이 콱 막혔던게 1달만에 풀리는 묘한 쾌감이 필요했다.

(중략)

...

써놓고 보니 세상에 이런 뭔 xx 쪼다 개불같은 글이 다 있나 싶다.(하지만 상관없다. 내글이니.)
경아가 썼던 글을 보니 나도 이때가 생각났다. 그후 이주일동안 내 점수를 가지고 폐인처럼 오르비에서 살면서, 이사람 저사람 만나가며 이야기 했던 기억, 평소에는 아무 연락없다 성적 나오니 주변의 환호와 칭찬과 응원,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기뻤다. 300일간의 독학 독서실 라이프가 실패로만은 끝나지 않을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실패는 세상적인 '실패'를 의미한다.)


4시간전 수능시험을 끝내고 들어온, 방문을 닫고 틀어박혀 울고 있거나, 아니면 시원하게 밤거리에서 술한잔 하고 있거나, 부모님과 과일 먹으며 조용한 밤을 보내고 있는 65만의 수험생에게 감히 고한다.

"성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신들은 충분히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 외로움과 고난과 싸워 이긴 것이다. 성적이 나오는 것은 조금 후에 생각해도 좋다. 나처럼 어깨 쭈그리고 xx쪼다처럼 살아도 좋고, 어깨 쫙 펴고 시험 마친 젊음을 마음껏 즐기는 것도 좋다. 당신들은 충분히 멋진일을 해냈다. 잘혔어. 이제 인생의 한페이지를 채웠으니, 장을 넘겨서 다음 페이지를 채워봐, 이런 멋진 사람들같으니라구!"

-xxx 단편수필
'무진장 추웠고, 무진장 따뜻했던 2008년 겨울'中에서-

p.s. 찍어서 맞춘건 아니다. 혹시나 운빨이 아니었냐 물으면, 최대한 집중했고 그에 따른 보상이라 생각한다. 
4월 모의고사 이후로 한번도 470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으며 5월초에는 492 까지 받았었다. 이때, 할수 있다는 희망이 물씬 풍겼다. 6월 모의고사에서도 포기할 뻔 했던 수학, 알고보니 백분위 100% 였다. 미친 문제들 천지였는데 말이다. (9월 역시 92점이었다. )
오히려 수능때  평소 내 실력보다 더 못나왔다고 생각하는데, ㅡ시험당시에는 아주 심각하게 못쳤다고 생각함 ㅡ 이정도로 선방한게 어딘가.
언어는 수능공부하면서 3개 이상 틀린적이 없었으며 (수능에서는 실제로는 1개틀렸다. 최대한 고민했던 답들이 결국 10개중에 9개가 맞았던 것이다 하하.) ,  수학은 별표 3개 끝까지 못풀고 나왔는데, 알고보니 그 3개빼고 모두 맞았다. 처음 보자마자 못풀었던 10문제를 다 옳게 푼것이다!(이건 진짜 초인적인 능력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과탐도 가장 어려웠던 지구과학 1개 틀리고 화학1개, 생물1개, 화학2 빠이 ....(42점이었던가?)  영어를 굉장히 못쳐서 5개나 틀리는 바람에 나는 2주간 식음을 전폐할 뻔 했던 것이다. 나는 영어 쓰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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