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철학이고 사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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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자들은 음양오행학설이 정립된 시기를 보통 동주 시기부터 춘추전국시대 사이로 생각합니다. 이 시기는 기원전 770년부터 403년까지의 시기고요. 이후부터 동양 사상의 기반은 그것이 됩니다.
만약 한의학이 음양오행학설로부터 출발했다면, 음양오행학설이 없던 기원전 770년 이전의 동아시아에는 의학이란 것이 없었을까요. 그 전에는 아프면 끙끙 앓다가 그냥 죽었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죠.
이 시기 이전의 사람들은, 이전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축적된 병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험적 지식이 있었을 것이고, 그 지식을 따라 진료하고 치료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지금까지 경험적으로 이어져 오던 의학을 하나의 틀로 묶어서 설명하고자 하는 필요성 혹은 서적으로 남기고자 하는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고, 여기에 그 당시 동아시아 사상의 큰 틀이었던 음양오행 학설을 빌려다 쓴 것이죠. 한의학 최고(最古)의 경전인 ‘황제내경’이 만들어진 시기는 음양오행설이 정립된 이후인 진한 시대(기원 전 221년~기원 후 220년)이므로(한의학이 학문체계로 정립된 과정도 이 시기로 봅니다), 그 순서를 보았을 때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양오행학설로부터 한의학이 출발했다기보다는, 한의학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체계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음양오행학설이 ‘이용되었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2.
물론, 이후 한의학의 발전에는 음양오행이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인체의 생리 및 병리 등 인체현상을 관찰하고 표현하는데 음양오행이 사용되었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에도 음양오행이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이러이러한 병이 든 것은 음허하기 때문으로, 음을 보하는 치료를 해야 낫는다.’ 따위의 것들이 있겠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병의 증상’과 ‘음이 허한 것’의 선후관계입니다. 음이 허해서 어떤 특정한 병이 나타난 것일까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음’이라는 것은 뭘까요? 동의생리학에서 배웠듯 ‘음’이 우리 몸의 혈, 정, 진액 등을 총칭하는 말이라면, 옛 사람들은 혈, 정, 진액 등이 부족하다는 것을 무엇을 기준으로 측정하여 음허라고 진단하였을까요?
애초에 우리 몸은 음양으로 구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설명하는 데 음양이 사용된 것이죠. 기(氣)와 형(形)을 예로 들어 본다면 양으로부터 기가 이루어지고 음으로부터 형체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기운을 양으로 보았고 몸이라는 형체를 음으로 본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음허증으로 다시 가 보겠습니다. 우리 몸에 병이 났는데, 그 증상을 살펴보니 두훈(頭暈), 실면(失眠), 심번(心煩), 오심번열(五心煩熱), 조열(潮熱), 도한(盜汗), 설홍(舌紅), 맥삭(脈數)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음이 허하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음허’라는 이름으로 카테고리화 한 것이 “음허증”이라는 병이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몸의 전체적인 생리와 병리를 음과 양, 목화토금수의 오행으로 분류하여 정리하고 설명하였기에 왜 음이 허하면 저러한 증상들이 나타나게 되는지 설명은 가능합니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체’과 ‘음양’의 선후관계이기에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제가 다시 한 번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의학은 음양오행을 “이용”한 것이지 음양오행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한의학의 진단 방법들 중 상한론 육경변증과 팔강변증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한론의 육경변증을 먼저 이야기 해 봅시다.
육경변증은 태양 양명 소음 태음 소음 궐음이라는 삼음삼양(三陰三陽)을 이용하여 병의 전변 과정을 6단계로 구분하여 진단하는 변증 방법입니다. 아무래도 삼음삼양이라는 용어가 주역 등의 동양철학에서 사용하는 그것과 동일하다 보니 그 개념도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삼음과 삼양은 주역에서 말하는 삼음 삼양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상한론에서 태양병 이하 궐음병까지를 설명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OO병은, 이러이러한 증상이 나타난다.’라는, 어찌 보면 정말 간단한 내용입니다.(물론 그 뒤의 조문으로 갈수록 내용은 복잡해지지만, 어떠어떠한 증상과 그에 대한 치법이 나오는 기본적인 포맷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어떠한 병이 인체의 어느 부위에서 어떠한 증상을 나타내는 것을 'OO병‘으로 묶은 것입니다. 이는 주역의 삼음삼양이라는 개념을 병의 진단에 이용했다기 보다는, 삼음삼양이라는 명칭을 “차용”하여 병을 구분하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상한론정해‘에서는 ’상한론은 풍한 등 외사의 침입부위와 작용범위를 삼양과 삼음의 여섯 대구성(大區城)으로 분류한 것’이며 ‘삼음삼양은 중경(仲景, 상한론의 저자)이 취명기의(取名棄義. 그 이름을 취하고 뜻은 버림)한 용어라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상한론의 육경이 주역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사유에만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팔강변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망문문절을 통하여 병의 증후를 관찰 및 분석하여 병사의 성질, 성쇠, 질병소재부위의 깊고 얕음 등의 정황을 표리한열허실음양의 여덟 가지 단계로 분류한 것이 팔강변증입니다. 이 역시도 병을 관찰한 뒤 그 증상들을 여덟가지로 나누어 카테고리화 한 것이지, 한열허실표리음양이라는 단어 자체에 무언가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한론 육경변증의 태양 이하 궐음까지의 여섯 가지 단어에 큰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4.
그렇다면 한의학은 음양오행이라는 사유체계로부터 벗어난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2번에서 말하였듯이, 한의학이 음양오행이라는 언어를 통해 체계화 된 이후로 한의학의 발전에는 음양오행이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인체의 생리 및 병리 등 인체현상을 관찰하고 표현하는데 음양오행이 사용되었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에도 음양오행이 사용되니까요. 예를 들어보자면 오행을 사용한 사암침 등이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의학은 인체에 적용되는 응용 학문입니다. 음양오행이라는 사유 체계가 존재하고 특정 약물이나 침법이 그 이론 상으로 아무리 들어맞는다고 하더라도, 실제 인체에 적용하였을 때 성립되지 않는다면 해당 처치는 폐기되어야 합니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사암침이 지금까지도 사용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질병에 효과가 있기 때문이지, 그 배경이 되는 이론이 음양오행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사용되는 기타의 한의학적 치료 방법 역시도 그것이 실제 임상에 효과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지가 되는 것이지, 그 배경이 되는 이론이 음양오행적으로 완벽히 설명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서양의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물질이 생물, 화학, 물리학 등의 자연과학으로 설명이 완벽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체내에 들어오면 어떠한 반응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을 하나 개발하는 데 수십억을 쏟아 부으면서 동물실험, 임상시험 등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죠. 심지어 특정 목적을 가지고 개발하는 약이 시험 중 혹은 시판 후에 새로운 적응증이 발견되어 그 사용 방법이 바뀌게 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이것을 한의학에 적용시켜 보자면 생물, 화학, 물리학 등의 기초과학이 음양오행학설이 되겠고(엄밀하게 말해서 두 개가 같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생물학 등은 실제적으로 그 작용을 관찰하여 정리한 것이지만, 음양오행은 인체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초과학을 통해 이론적인 기반을 갖춘 내용들 중 임상시험 등을 통해 효과가 있는 것으로 증명되어 서양의학에서 사용되어지는 처치들이 한의학에서 지금까지 사용되는 처치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양의학이 기초과학이 아니듯이, 한의학도 사유가 아닙니다. 그것으로부터 발전한 응용 학문이고, 실제적으로 인체에 적용되는 ‘의학’입니다.
5.
그렇다면 효과의 유무, 검증은 어떻게 하느냐.
서양에서는 1980년대 경부터 EBM, 근거중심의학이라는 흐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로 기존까지의 치료가 실제적으로 효과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EBM이 사용되었죠. 그러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특정 처치가 특정 질병에 과연 효과가 있는지를 통계적으로 검증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한의학은 의안(醫案)이나 경험집, 치험례 등의 case report나 case series 수준의 내용들이 검증의 주를 이루었으나, 현재에는 EBM이 조금씩 도입되어지는 중이죠. 약물의 경우에는 이곳저곳에서 많은 논문을 내고 있고(일본 츠무라 제약에서도 많이 내고 있죠), 침도 국내 뿐 아니라 중국 일본, 독일, 미국, 영국 등지에서 연구되어지는 중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EBM의 한의학 도입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직 한의학의 진단 방법을 논문에 확실히 적용시키기는 어렵기에 대부분의 연구가 양방 진단명에 한약과 침 등을 사용하여 연구한, 소위 ‘양진한치’가 대부분이기도 하고(물론 이것도 장족의 발전입니다만), 특히 침은 침의 활성성분이 무엇인지(침이 피부를 자극하기만 해도 치료효과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금속이 닿기만 해도 되는 것인지, 피부를 뚫고 어느 깊이까지 들어가야 침의 효과가 있는 것인지) 완벽히 알지 못하는 상태기에, 여러 침 관련 논문들이 ‘sham침을 처치한 대조군과 실제 침을 처치한 실험군 사이에 별 차이가 없더라.’하는 결론을 내고 있기도 합니다.(물론 sham침이든 실제 침이든 아무 처치도 하지 않은 군보다는 월등한 효과를 보입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자금력’과 ‘논문 수’가 부족하다보니, 서양의학만큼 그럴듯한 결과가 나오기도 힘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애초에 EBM의 방식이 서양의학적 측면에 집중되어 있기에, 기반이 되는 학문이 다른 한의학에 EBM을 그대로 도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EBM이라는 것을 마냥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새로운 검증 방식의 하나로써 한의학에 맞는 새로운 툴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7.
‘한의학은 철학이다’, 혹은 ‘한의학은 사유이다’라는 말 때문에, 공담(空談)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의학도는 의학을 하는 사람이지, 철학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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