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는소년 [515854] · MS 2014 · 쪽지

2014-09-23 23: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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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A형 나희덕,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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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래 작품은 나희덕,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문제에서 이런 저런 것을 물어보면 그건 알겠지만 도통 시 자체는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어떻게 해결 했지만 다른 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불안하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김영하 시인이 [TED 서울]에서 창작이란 한 문장을 쓰고 그 문장을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을 다음에 쓰는 것이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 시의 첫 문장(1~3행)이 서두처럼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밝힌 다음, 다음 문장(4~6행)이 첫 문장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당한다’가 무엇인지 천천히 설명을 하겠습니다.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를 정리하면서 약간의 추론(인과추론-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임을 미루어 아는 것)을 하면,

 

복숭아나무가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졌다

나는 복숭아나무 곁으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 복숭아나무가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나는 그 곁으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밑줄은 조금 더 해석이 필요합니다만 시적 표현이라고 하기도 어색한, 평범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겹이니 겉과 속이 다르다거나 여러 가지 마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고,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것은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거나 좋아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가 과도하게 긴장하거나 무엇을 봐야 할지를 몰라 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앞에서 나무는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졌고 그것으로 인해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문장(1~3행)을 감당하기 위해 다음 문장(4~6행)은 위와 같습니다. 즉,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것이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으므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멀리 지나치기만 했다)는 말이 됩니다.

 

혹시 이렇게 시의 부분별 중심생각(중심정서)의 구조는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이건 시의 전개에 대한 지식입니다. 시를 읽으며 또는 배우면서 이런 전개의 다양한 방식을 배우고, 여러 작품으로부터 눈에 익힙니다.

 

세 번째 문장에서도 이 구조가 반복되는데, 그런 구조를 갖고 있다는 시각으로 세 번째 문장을 보면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이 바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이라는 것을 대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보고서 생각했던 그 나무가 수많은 꽃빛을 피우고 싶어하느라 외로웠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의 마음 깊은 속을 알고서 화자의 마음이 바뀌었고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이 바뀌느라 한 줄을 띄었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꽃잎은 흔히 떨어지고 바람에 날아가서 옮겨갑니다. 어디 먼 데 닿으려면 떨어진 꽃잎이 몇 차례 바람에 날려야 하지요. 그만큼 시간이 흘러야 합니다. 나무 입장에서는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자기 몸에 있던 꽃잎이 흩어진 걸 즐거워할 리 만무합니다. 조금은 심심한 그 얼굴에 내비쳐지는 마음은 약간의 서글픔이겠지요. 왜냐하면 (앞에서 파악했던) 외로웠던 그 심사가 꽃잎 흩어진 이후에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그런 나무의 그늘에 예전에는 오지 않았던 그 그늘에 나무의 외로움을 알고, 서글픔을 알고서 어떤 마음으로 가만히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건 나무의 마음에 손 얹어 주는 마음이지요. 요즘 말로 토닥토닥.

 

자, 이렇게 되지 않는 것이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어를 읽지 못하는 것, 읽고서 마땅히 할 수 있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생각과 생각을 만나게 해서 시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입니다.

 

시어의 해석은....언어적으로 인지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언어적 해석은 시가 아니더라도 늘 하던 대로 일상적인 언어, 관용적 의미, 맥락을 참조해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인지적 해석은 글 표면에 대한 해석(언어적 해석)을 토대로 몸, 경험, 지식에 비추어 추론하고, 시 전체가 구성하는 정서의 구조를 구성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지적 해석을 원리적으로 설명하면 어렵습니다만 이미 위에서 적용해서 설명했습니다.

 

과정에 대한 설명은 처음이라 생소하실 수 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해석하거나 작품이 이런 것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는 감을 떠올리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면 분명 시를 잘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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