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하지말자 [401975] · MS 2012 · 쪽지

2014-11-23 17:06:40
조회수 2,769

시골의사 박경철님의 강연하나 <펌>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5107203


나의 히어로이신 박경철 원장님의 강연.

녹음했다가 이렇게 복원했습니다.

같이 사진이라도 찍을까 생각했는데

꿈은 이루지 말라고 하셔서 인사도 하지 않았어요.

한 오년후에 더 큰 모습으로 당당하게 인사드리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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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방금 소개받은 박경철입니다. 백화점인데 여기 교육장은 별로 럭셔리하지 않네요. (웃음) 어젯밤 제가 서비스업에 종사하시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고민을 했었는데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꿈과 선의에 대한 이야기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웬 쌩뚱맞은 주제냐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소위 말하는 감정노동자들이라고 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분들에게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 선의가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성을 가진 미소와 친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하면서 상대에게 미소를 보내고 친절을 베풀기란 쉽지 않은 일 입니다. 하지만 직업이 서비스업인만큼 이는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덕목인 거죠. 


일단 요즘 제 근황을 잠시 말씀드릴까합니다. 요즘 저는 그리스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시작했었고 지금까지 세차례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달에도 한번 더 가게되어 있어요. 부럽죠? 저는 이곳 그리스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스물네살때부터 해왔습니다. 대학시절에 읽었던 니코스 카찬카스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작가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거든요.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가 쓴 서간문, 단편 등 약 80여편의 저작물을 모조리 다 읽게 되었어요. 그러고나니 직접 그리스를 가서 이 사람이 갔던 곳을 가고 싶고, 그 사람의 글에 있는 장소를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래서 50이 되기 전에 그리스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심을 한게 스물 네살의 일이죠. 그래서 작년부터 시작된 여행은 다른 그 어떤 사람보다 훨씬 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그리스를 방문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순례길을 찾아서 아테네 공항에서 렌트카를 빌려서 지도 하나들고 3,600km를 달려서 이곳 저곳을 다 찾아 다녔습니다. 제가 니코스의 묘 앞에서 잔을 올리고 큰 절을 했더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고 캠코더로 저를 찍더군요. 무얼 하는거냐고 묻길래 '이게 동양에서는 사인에 대한 높은 예의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들 눈에는 웬 이상한 놈이 와서 이상한 짓을 하는구나, 싶었을수도 있겠지만요.


여러분께 한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꿈, 두근거림. 이건 정말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여행에서도 사실 몇가지 두근거림을 남기고 돌아왔지요. 가령 그리스 국립박물관에 가면 여러분이 아는 도자기가 있지요? 뭐 트로이 전쟁이 그려져 있는 도자기말입니다. 저는 그 앞에서 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그냥 안보고 돌아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델피에 신전에 있는 박물관에 가면 가장 보고 싶었던게 오디우프스 신화에 나오는 스핑크스였죠. 하지만 그 작품이 있는 27번방 문 앞에서서 고민 고민을 하다가 안들어가고 그냥 나왔습니다. 심지어 올림피아 박물관에 가면 니코스 카잔카스키가 열두페이지에 걸쳐 칭찬을 했던 제우스 신전의 옹벽도 보지 않고나왔습니다. 그렇게 전역에 가는 곳마다 한군데, 한군데씩 아쉬움을 남겨놓고왔죠. 제가 왜 이런 변태짓을 했느냐하면 바로 두근거림을 잃지 않기 위해서에요. 거기 결국 제가 원하는 곳에 갔지만 그렇게 원하는 것을 남겨놓고 왔기에 돌아오는 길에 아테네 공항에 와서는 떠나기 싫어서 두근두근 거렸습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는 말단 공무원이었습니다. 지위는 사실 사회적으로 내세울게 없었죠. 당신께서는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두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니가 진짜로 간절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손에 넣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이 말씀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고등학교 3학년때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 말씀이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항상 두근거림을 가지고 살아라, 이 말을 하셨던 것 같아요. 두번째 질문은 이겁니다. 여러분의 영웅은 누굽니까? 생각만으로 심장이 두근두근거리고, 얼굴이 벌개지는 그런 사람말이에요. 그런 영웅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꿈은 자본, 지위, 명예 이런 것이겠죠.


제가 보시기에도 운동을 잘 못하게 생겼잖아요? 보기에도 머리가 커서 뒤뚱뒤뚱 잘 뛰지도못해요. 그래서 우연한 기회로 저는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죠. 그런데 독서 몰입의 정도가 심했습니다. 보통은 책을 많이 읽으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게 좋은게 아니거든요.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논어 학이편에서 학이불사즉망이라고 이야기했죠. 다시말해 배우기만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다는 뜻이죠. 그리고 사이불학즉태. 즉,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어리석다는 겁니다. 저는 전 인류사를 통틀어서 이 문장이 바로 공부의 본질을 완벽하게 통찰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지식과 지혜에 대한 이야기죠.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서 끊임없이 지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상대와의 대화를 합니다. 저 상대를 어떻게 설득하지?, 나와 다른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지?, 하면서 생각하게되는 과정이 바로 지혜인 것이죠.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오늘 아침에 집에서 출근하면서 혹시 버스 차선 밖으로 깊은 사색을 하신 분 계십니까? "오늘 저 광화문 창 밖의 빗물은 무슨 자연의 조화란 말인가?"하고 놀란 분 계십니까? 아마 다들 아무생각 안하고 오셨을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헌데 여행을 떠나면 어떠십니까. 당장 지도를 들고 어느쪽으로 갈지를 생각해야하죠. 저건 뭘까, 저 사람에게는 길을 물어봐도 될까. 뭐 이런 생각의 스파크들이 계속 일어나게되지요. 새로운 길을 가면 계속 두리번 거리면서 생각해야하죠. 그래서 우리가 여행이라는 것은 새로운 독서를 해도 마찬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나는것에 의미가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 처음 접하는 작가를 만나게되죠. 이 과정이 지혜인 것 같습니다. 새로움이라는 것이 바로 지혜를 만들죠. 지식과 지혜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식이라는 도구를 어떻게 더 유용하게 사용할까 하는 방법을 모르게됩니다. 반대는 망상은 많지만 사용할 도구가 없지요. 고등학교때 필요 이상으로 독서를 많이시키면 어느 순간 괴리가 일어납니다. 중고등학교때 책 많이 읽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 정신이 나가있어요. 저는 어쨌든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었고, 제 부인은 심지어 격리수용이 필요하다고하고, 책 도착증이 있다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때의 일입니다. 고등학교때 원서를 내고 배치기준표보다 낮은 곳으로 쓸 사람은 그냥 쓰면되고, 더 높게 쓸 사람은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높게 쓰기 위해서 집에가 아버지와 말씀을 하게 되었죠. 아버지는 그때 강력반에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밤 늦게 돌아오셨지만 일단 상의는 드려야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학력고사 시대니까 점수는 이미 아버지도 알고 있었죠. 저는 1지망은 법대로, 2지망은 국문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근데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고요. "근데 너 이과잖아." (웃음) "그래 가는건 그렇다치고 그게 가능하기나 한거냐?"하고 물으시더군요. 그땐 본 점수에서 15%를 빼고 교차지원이 가능했죠. 가능하다고 설명을 드렸더니 아버지께서 저를 보더니 왜 갈거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가 가진 망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무려 한시간에 걸쳐서 왜 법대를 가야하는 이유를 한 시간동안 설명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진 그 늦은 밤 제가 한 시간동안 열변을 토했는데 제 얘기를 다 들어주셨어요. 그리고는 "얘기 다했냐? 그래 니 생각이 그러면 가라."하고 말씀하셨어요. 근데 아버지가 그럴리가 없는데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내가 니 이야기를 들어줬으니 니도 내 이야기를 들줘라." 하시고는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나는 일생동안 경찰관으로 살아왔고 크게 잘못하거나 부끄럽게 살아오지 않았다. 니 대학가면 내가 학자금도 대줄 수 있다. 어쨌거나 내가 부모로서는 지금만큼은 계속 잘 해줄 수 있다. 근데 나한테 고민이 하나 있다." 하시면서 당신께서 느끼신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그때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있던 시기 아닙니까. 전두환 시절이었죠. "내가 학생회 지도부 중에 하나가 서울에 유학가 있다가 고향집에 돌아온다는 첩보가 있어서 형사 둘이서 집 주변에 잠복해 있다가 새벽에 체포를 했다. 근데 경찰서에 데려가서 조서를 쓰는데 주민등록번호를 보니까 나이가 너보다 두살이 더 많더라. 그래서 부모된 마음으로는 답답해서 맘 같아서는 꿀밤 두대 때리고 집에 돌려보내고 졸업하고 '니 빨갱이가 되어 다시온나, 일단은 니 부모님이 너 공부시키겠다고 어렵게 대학 보내놨는데 이게 뭐냐. 나중에 다시 하면 내가 그때 인정해줄게.' 하고 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권한이 없었다. 소매치기를 잡아도 형편이 어려운 범죄자를 보면 그냥 지갑에서 만원짜리 하나 꺼내주고 싶었다. 반대로 이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전화 한통으로 풀려나는걸 봤다. 이게 꼭 말단 공무원이어서가 아니고 경찰서장이든, 판검사든 마찬가지다. 이런 길을 가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숙명이다. 너가 판검사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이 얘기를 해 주고 싶었다. 인생은 두가지 길이 있다. 설악산 대청봉의 낙엽같이 사는 인생이 있다. 너무 화려하고 아름다운 삶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개울가 바위 옆에 빛바랜 낙엽같은 인생이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낙엽이라는 인생은 다 가을 바람에 날리게 되어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을 바람에 날리는 낙엽인건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내 아들은 잡초로 살더라도 땅에 뿌리박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게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원하는 소망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제가 주인으로 사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순간 이후로 누가 제게 좌우명을 물으면 "갑으로 살자"가 되었습니다. 행사하는 갑이 아니라 휘둘리지 않는 갑이란거죠. 이를두고 저는 소갑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나는 을을 않하겠다'는 수준인거죠. 저는 그 얘길하신 아버지를 보면서 그 순간 아버지와 내가 친구가 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대화하기 힘든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이고, 친구이고, 형님이고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위선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페르소나,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여러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V포 벤데타」의 미소를 여러분들도 가질 수 있죠. 귀까지 걸리는 미소를 짓고 살아야하는 것은 사회적인간으로서의 숙명입니다. 항상 끊임없는 페르소나를 살아갈 수 밖에 없죠. 하지만 그 상황에 대한 가면을 잘못 쓰면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받고, 잘 쓰면 사회생활 잘 쓰는 것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위선으로서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가족입니다 .마약 중독자가 아들을 데려다두고 '얘야 이거 정말 좋단다', 이럴 수가 없잖아요. 아들한테 '아침부터 뭐하러 학교가느냐' 할 수는 없잖아요. '아빠가 공부는 못했지만 성실하게 했단다' 뭐 이런식으로 이야기하겠죠. 하지만 자녀는 말로 훈육되지 않습니다. 말이나 앞모습이 아니라 행동과 뒷모습으로 배웁니다. 아무리 사랑을 이야기하고 서로 존중하라고 이야기해도 결국 아내에게 베개한번 집어던지면 끝입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라고 이야기하고 밤늦게 와이셔츠에 립스틱이 묻어있으면 자식들이 뭘 배우겠습니까. '책읽고 공부해' 하고는 소파 누워서 리모컨을 누르면 어찌되겠습니까. 그래서 가족간에는 반드시 위선을 벗어야합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쉽지 않죠. 


저는 그때 이후 아버지에게 깊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분은 저의 두번째 영웅이 되었죠. 노예로써의 삶이 아니라 주인의로서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마도 제 삶이 이렇게 떠돌아다니는데에는 니코스와 제 아버지가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실제로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발적 공식 백수입니다. 자문위원도 다 놓고 그 어떤 직급으로서의 업무도 다 놓고 있죠. 그래서 제 명함에는 제 이름만 써 있습니다. 진짜 고수가 명함에 이름만 쓴다고 하는데 저는 쓸게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오십전에 그리스를 가야겠다, 하고 생각하고 일년 앞당겨서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나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까 땅에 뿌리박고 살기 위해서는 의사로서의 삶이 가장 적합하지 않겠나 하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환자가 아파서 왔는데 '내가 이 사람을 살리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아' 할리는 없잖아요. 어느 환자가 와서 지금 돈이 없다고하면 나중에 달라고 제 맘대로 할 수 있잖아요. 반대로 이 사람을 상대로 제가 돈을 좀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면 고개를 한번 푹 숙이고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번 오셔야겠는데요' 하고 말할 수 있잖아요. 이후 제가 스물 한살때에 아버지는 돌아셨고 이후 누가 당신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니코스와 아버지죠.


한가지 더. 바로 선의에 대한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여곡절끝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한 환자가 있죠. 40대 초반의 여자였는데 위암이었죠. 하지만 이게 전이가 된 것 같기도하고, 아닌 것 같기도했어요. CT가 그때만해도 3cm 단위로 잘라져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암이 작으면 잘 보이지 않죠. 일단 보고를 드려야 했죠. 아침에 주임과장에게 이런 환자가 있었고 전이가 확인이 안됩니다. 하고 보고를 드렸더니 배를 먼저 열어보고 전이가 되어있으면 닫고 ,안 되어있으면 수술을 하라고 하거군요. 근데 환자 보호자에게 동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런걸 환자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가족과 보호자를 이야기해봤더니 남편은 죽었고. 시댁식구들은 연락이 끊어졌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어 본인에게 직접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고등학교 아들과 중학교 딸이 하나 있는데 내가 죽으면 아이들이 어떻합니까. 할 수 있는일은 뭐든지 해야합니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수술 날짜를 잡았죠. 헌데 배를 열고 보니까 저희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가슴부터 배까지 서리가 내린 것 처럼 햐얗게 되어있더군요. 작은 암세포로 전체가 퍼져있었어요. 너무 심각했던거죠. 바로 닫고 수술실을 나왔습니다. 그런 경우 대개는 급속도로 나빠집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하고 다시 환자에게 가려고 하는데 저는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창 밖으로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가습기에서 희뿌옇게 수증기가 나왔고 침대 옆에서 아이 둘이서 검정색 교복을 입고선 엄마 손 하나를 둘이서 잡고 서 있더군요.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느낌. 뭐 그런거 있지 않습니까. 눈이 마주치자 환자가 저를 보시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해요. 환자는 알고 있었던거죠. 수술을 했더라면 중환자실에 있었을텐데 일반 병실이니까 암이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거죠. 하지만 옆에는 지금 애들이 있으니까 지금은 얘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아니나다를까 수술후 급속도로 나빠져서 퇴원도 못하고 바로 돌아가셨죠. 사망을 앞두고 며칠동안은 아이들이 학교를 안가고 병원을 왔는데 항상 그 자세였어요. 손을 잡고 아이와 함께 셋이서 서서 있었죠. 


우리 외과의사들은 보통 회진을 하면 아침 식사를 몰래 숨어서 하고 그랬거든요. 아침 먹었으면 아주 선배들에게 혼났어요. 신참 의사를 3신이라고 하거든요. 잠자는덴 잠신, 먹는데는 걸신, 일못하는데는 병1신. 어쨌는 하는것도 없다고 먹는거 보이면 혼나고 그랬어요. 그래서 회진돌고는 수업들어가기전에 컵라면 먹고 그랬죠. 그때 외과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었죠. 그랬던 우리들 중 하나가 돌아가면서 그 병실에서 아이들을 데려와서 같이 라면먹고는 했었어요. 하지만 이건 사실 특별한 선의는 아니었어요. 특별한 선의였다면 제 시간에 제 돈으로 아이들에게 맛있는걸 사주었겠죠. 하지만 제약회사에서 가져온 라면을, 인턴이 만들어 놓은 라면을 같이 먹었었죠. 후륵 후르륵 먹으면서 아이들한테 이런 저런 대화를 했었을거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해요. "아이들에게 대학 2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도 힘들었다" 뭐 이런 얘기를 했었나 봅니다. 뭐 그런거 있잖아요. '했었나봅니다'라고 이야기하는건 제가 사실 기억을 못하고 있었던 것을 다른사람에 의해 알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얘긴 잠시 후에 들려드릴게요. 


결국 아이들의 엄마인 환자는 거의 임종이 다가왔습니다. 이때 의사가 할 일은 사망 실시간이 임박하면 사망확인하고 시간기록하고 진단서 쓰는게 다 입니다. 간호사한테 정말로 연락이 왔어요. 돌아가시는걸 지켜보면서 저와 간호사는 서 있었죠. 두 세차례 사인곡선을 그리다가 뚜뚜 하면서 심전도가 멈췄는데 아이들은 또 예의 그 모습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죠. 이후의 상황은 대충 머리속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울부짖고, 간호사들이 떼어내고, 영안실에서 와서 엘리베이터를 통해 지하로 데려가고. 저는 속으로 '이걸 어떻게 보지?'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울지 않고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직 모르나보다. 그래서 한 잠시 일분 기다렸어요. 그러다 아이의 어깨를 눌렀더니 엄머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요. 봤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옷의 절반이 눈물로 젖어 있더라고요. 돌아가신 것을 아는거였더라고요. 저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습니다. 그리고 서 있는데 그제서야 엄마에게 다사서서 왼팔로 목을 잡고 오른팔로 어깨를 안아요. 그리고는 엄마 귀에 대고 뭐라고 말했냐면 '엄마 사랑해요'하고 얘기하더라고요.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떠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처음봤어요. 그 사랑해요라는 말 안에는 떠나는 엄마에 대한 송별사 일수도 있고, 위로일수도 있고, 남겨진자의 각오일 수도 있죠. 저는 많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어떨때는 제가 맡았던 환자가 하루에 5명이 돌아가신 적이 있었어요. 인간이 마지막 떠나는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직위? 돈? 그가 누구든,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그가 무엇을 가진 사람이든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에 하는 단어가 바로 '손'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진짜 내 마지막 순간에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것이죠. 하지만 실제로 어떻습니까. 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되는 순간이 내일이 될지, 다음주가 될지, 10년후가 될지 모르지만 반드시 올 것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때로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럼없이 상처입히고, 더러는 외면하잖아요.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 가장 위로받을 수 있고 마지막에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생각해보면 집에 있는 가족과 아이들이죠.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 보다도 금뱃지고, 좀 더 필요한건 공천이고, 그보다 지금 빨리 필요한 것은 돈다발입니다. 


어쨌든 이후 저는 안동 신세계 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계속 했지요. 근데 십여년이 지나서 간호사가 하루는 신부님이 한분 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냥 피흘리는 신부님이 오셨나보구나 했습니다. 제가 안동에서는 항문외가의로는 아주 유명해서 사실 경상도 지역 전체에서 거의 손꼽을 정도거든요. 신부님들이 보통 손님으로 위장해서 치료받으러 오시는데 그런 분이신가 하고 문을 열고 나가니 손님의 얼굴에 아우라가 스쳐지나갔습니다. 사람의 얼굴의 빛깔과 때깔은 다르잖아요? 때깔은 돼지처럼 먹고, 색조 화장품을 바르면 좋아 집니다. 하지만 빛깔은 습관, 태도 ,사고, 삶의방식들이 지금까지 내 얼굴에 반영되어 반죽으로 나온겁니다. 그 사람의 아우라는 사실상 그 사람에게 나쁜 습관, 나쁜 태도, 나쁜 성향이 거의 없었다는 얘깁니다. 놀라서 제가 '누구십니까'했더니 대뜸 '저를 모르십니까'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그 고등학생이 저랍니다.' 하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제가 혹시나 잘못한게 있나 뜨끔하더라고요. (웃음) 이래 저래 이야기를 나눠보았더니 여동생은 교대를가서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두 누이가 곱게 잘 자랐죠. 그러면서 신부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입장에서는 가혹하고 힘들겠지만 엄마 입장에서 생각하면 남겨진 아이들이 혹시나 잘못되면 어떻할까, 하고 그런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저는 제가 그렇게 멋있는 말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그 말씀이 두 오누이가 살아가는데 버팀목이 된 가장 중요한 말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뒷통수에 벼락이 떨어진 느낌이었어요. 제가 멋있는 말을 했구나 하는게 아니에요. 저는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무심코 했던 작은 선의가 두 남매의 인생을 바꿨다는 생각을 했더니 반대로 누군가를 절벽에서 밀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는 각자 서로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그 영향력의 크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직급은 위로만 올라가야하고, 내가 많은 사람을 휘두를 수 있어야하고, 그 힘은 점점 더 세져야하죠. 하지만 영향력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영향력은 반드시 선한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무심코 한 여배우의 기사를 보고, 무심코 그 기사에 댓글을 달았는데, 하필 그 여배우가 그 댓글을 볼 수 있잖아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렇게 보편적인 악의는 누군가를 절벽으로 밀어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영향력의 크기가 중요한게 아니라 선한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고객을 기쁘게 해야하는 것이죠. 하지만 고객으로 하여금 진정성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웃음이 진심으로 자유에서 나와야하고, 진실로 기뻐서 나와야하고, 선한 영향력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에 두근거리십니까? 집에 놓고 온 아이의 얼굴을 생각하면 두근 두근하고 사랑하는 와이프, 남편의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설레십니까? 이러한 모든 것은 내가 주인이 되는 삶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쁨을 삶 속에서 계속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2.3.23(금) 롯데백화점 에비뉴엘에서.


영양가없고 자극적이기만한 정보들이 범람하는 인터넷 속에서


마음 좀 추스리려 다시한번 읽습니다..


URL을 까먹었네요 ㅠ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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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풋 · 425306 · 14/11/23 17:10 · MS 2018

    안철수 형님이랑 자주 나오다 요즘은...
    역시 멘토는 멘토로 남아야 합니다.

  • 수학실모예찬론자 · 536331 · 14/11/23 17:58

    이분 주식책보고
    많이 배움

  • 패왕색의 패기 · 505036 · 14/11/23 18:23 · MS 2014

    저한테 여러가지 의미로 다가오는 글이네요...
    그리스 여행부터 시작해서 한 에피소드
    그리고 선한 영향력에 대한 생각까지...

    제가 무심코 한 말이 누구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는지 반성하게되고

    어떤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줘서 그 사람이 저라는 사람을 떠올릴때 좋은 인상만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