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u Roman. [69422] · MS 2004 · 쪽지

2016-10-18 18: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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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찾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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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게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샤워를 하고 세수를 한다. 씻는 건 상쾌한데 닦는 건 귀찮다.
감을 땐 개운한데 말리는 건 지겹다. 정반합이 계속되니 익숙해진다.

  어찌 됐건 옷을 입고, 머리를 매만지고 집을 나서려는 그 순간은 설렌다.
어디를 가든, 웬만하면 설렌다. 집을 나선다는 건 그 날의 작은 여행같다.
학교에 가든, 소개팅을 하든, 도서관에 가든, 어찌됐건 새 것을 하는 거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맘에 드는 여자를 운명적으로 만날 수도 있고
옆에 가는 놈과 시비가 붙을 수도 있다. 그 긴장이 설렘의 동력, 나아가 삶의 원천이 된다면 과장일까.

  어찌됐건 이제 안경을 찾아야 하는데, 안경이 없다. 이미 백팩을 메고 머리까지 잘 다듬은 상황. 땀이 나면 안 되는데 가방을 벗고 구석구석 찾을 생각하니 일단은 귀찮고 그 과정에서 땀이 나고 또 애써 만진 머리가 뭉클어지까 꺼려진다. 그래서 그 큰 백팩을 뒤로 젖히고 방 구석구석을 뒤지는데 마치 꽃게가 버스전용차로에서 직진하는 기분이다. 

  혹시 침대 건너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으려나 확인하려면 고개를 쭉 빼고 벽에 머리가 닿는 걸 감수하며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허리를 굽혀 바닥을 보아야 하는데 백팩을 메고 머리를 사수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10분을 찾아 헤맸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어느새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며 백팩을 메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탓에 허리만 아프다. 

  결국, 귀찮음을 감수하고 뒤늦게 가방을 바닥에 놓았다. 몸이 가볍다. 이미 머리가 엉클어져 그 걱정도 할 필요 없게 됐다. 다시 한 번 침대 건너편 바닥을 살펴본다. 아까 백팩을 멘 채로 벽에 머리가 안 닿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었을 때 보이지 않던 그 안경이 약 5센티 정도 좀 더 굽히니 보인다. 안도의 한숨, 다행스러운 기분.

  이미 땀에 흠뻑 젖어 다시 샤워를 해야할 것 같다. 머리를 다시 만져야 함은 물론이다. 허리도 제법 아프다. 그냥 아까 가방 내려놓고 찾았으면 30초만에 찾았을 걸 왜 이 고생을 했을까. 난 왜 그 사소한 괴로움을 견디기 싫어 이 먼 길을 돌아간 걸까. 

  생각해보면, 난 답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찾기로 마음 먹었을 때 가방을 내려놓고 최선을 다했더라면 빨리 찾을 수 있었을 것을. 수능 재수 때도 이렇게 공부 안 하다가는 삼수생 신분으로 더 비참하게, 힘들게 공부해야 될 걸 알았지만 도통 공부에 진력을 쏟지 않았다. 사실 고난은 답을 몰라서 오는 경우보다 알긴 아는데 외면해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난 잘 되겠지. 나는 남들과 다르다. 이런 생각. 

  약속이 있는 신촌에 가기까지 버스와 지하철이 탁탁 내 앞에 떨어져주기만 한다면야, 그리고 연착되는 일이 없다면야 15분이면 간다. 그래서 난 언제나 15분 전에 출발하지만 세상은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정시에 도착하는 방법은 여유를 두고 출발하는 건데 그걸 알면서도 난 10년째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맞춰가고 있다.

  조금 괴로워지는 것에 익숙해져라. 조금 지겹더라도, 조금 귀찮더라도 그것에 익숙해져라. 그래야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잃지 않고 쟁취하는 건 힘들다. 하물며 안경 하나 찾는 데에도 꽤 많은 것을 허비해야 했던 나에게 말하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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